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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4-14 03:57
 조회 : 5,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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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尹氏)의 고향 파평산 산행 Photo 에세이 (2008. 4. 12/ 임진각 전 덕천교- 덕천공설운동장-사방공사탑-제1약수- 제2약수- 제1 8각정- 제2팔각정 정상- 봉영사/ 고양시 주엽산악회 따라 Home http://cafe.daum.net/san6288)
*. '파주'를 왜 '坡州'라 하였는가
저는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그 고장의 지명이나 이름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문학도의 작은 임무 중에 하나라고 늘 생각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파주에서 가장 크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 금촌(金村)인데 제가 알고 있는 그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경의선 철도가 놓일 때였습니다. 지금의 금촌에다가 역을 만들고 '그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일인 담당자들은 망설였습니다. 어느 날 그 담당 일인 직원이 지금의 팜스프링 아파트 쪽으로 가서 그 마을의 촌로에게 물었습니다. "이 고장 이름이 무엇입니까?" " '새말'이지요." 그런데 일본인들이라. 우리말을 잘 몰라서 '새 마을'을 '쇠(金) 마을(村)'로 잘못 알고 금천(金村)이라 이름하였다 합니다.
파주의 지명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옛날에는 이 고장을 술이홀현(고구려), 봉성현(신라), 서원현(고려)이라 하다가 이조 태종 무렵에 와서는 원평도호부라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으로 왕위에 오르는 바람에 수양대군의 아내가 정희왕후가 되었습니다. 왕비는 이곳에 살던 파평 윤씨 윤번의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왕비의 내향(內鄕)이라고 해서 윤씨의 본관인 '파평'의 '파(坡)'에, 고을 '주(州)'로 이름하고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되었던 것이지요.
파주가 경기도에 속하여 있으니 '경기(京畿)'의 유래도 말씀 드릴까요? -경기의 '京(경')은 원래 천자가 도읍하는 '京師(경사)'의 준말입니다. '畿(기)'란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王城)으로 사방 500리 구역'을 말하는 것이구요. 그래서 경기(京畿)라 한 것입니다.
*. 파평 윤씨의 고향 파주
 파평면의 진산(鎭山)이 우리가 오늘 오르기로 한 파평산(496m)입니다. 그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못이 있는데, 이 못이 파평 윤씨 시조 윤사달이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의 고장으로 파평 윤씨들의 성지입니다. 임진각폭포수 어장을 가기 직전 우측 도로 변에 있는 이 용연은 윤씨라면 그냥 지나쳐서는 절대로 안되는 조상의 얼이 깃든 곳입니다. 다음은 거기 서있는 비의 비명(碑銘)에 쓰인 유래답입니다. -우리 파평 윤씨의 시조 고려 태사(太師) 휘(諱) 신달(莘達)께서는 단기 3226년 신라 진성왕 7년 음 8월 15일에 이 용연(龍淵)에서 출생하셨다. 고문집에 의하면 오색 새털에 싸여 돌함에 들어 이 연못 위에 부상하신 것을 동네 윤온이란 노파가 건져서 양육하셨는데 그 외모 비상할뿐만 아니라 양쪽 겨드랑이 아래에는 81개의 용의 비늘이 있고 좌우 어께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사마귀가 있었으며 족부(足部)에는 북두칠성 같은 7점의 흑자(黑자)가 있었다 한다. 고려조에 이르러 왕건 태조를 도와 삼국을 통합한 후 삼중대광태부 등을 역임하셨다. 혜종 원년에 경주 대도호부에 중신을 파견하게 되어 태사공께서 거기서 30년을 유임하시다가 단기 3306년 광종 24년 81세에 임지에서 서거하셨다. 이 비가 6. 25 동란에 파괴되어 이에 재건하였는데 남아 있는 옛비를 보면 총알 자국이 선명하였습다. 파평이 시조할아버지 고향이면, 여기에 그 묘소가 있어야 하는데- 하였더니 경주 쪽에 그 묘가 있다니, 경주 임지에서 돌아가신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용연은 예로부터 지하수가 솟아나는 천연의 연못입니다. 이 용연이 홍수에 파괴되거나 마르면 파평 윤씨 가문에 좋지 않다하여 예로부터 각별히 보살핀 흔적이 역역합니다. -병자 여름 대홍가로 침수당하여하여 연변 수목이 피해 막심하여 맹철대종회 부회장의 성의로 그 비용을 전담하시어서 중추절에 식수와 정지함 -이 용연 관수공사는 파평면화수회 및 동네 부녀회 성금으로 시공케 되었으므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세웁니다. 현지에서 보니 선조 숭모와 그분들의 파평 윤씨에 대한 긍지가 조용한 산 그림자와 함께 맞추어 핀 노란 개나리와 함께 피어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분은 자라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서 고려 건국의 큰 뜻을 이루게 한 공신이 되었습니다. 역사서에 羅濟之平 尹莘達之功也(나제지평 윤신달지공야)라는 글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신라는 물론 백제를 평정한 것은 윤사달의 공이라 하겠습니다. 고려의 서울이었던 개경은 파평에서 말을 타고는 먼 거리가 아니어서 매일 임진강을 건너 다녀서 그때 말이 물을 마신 '여음진(如飮津, 음진)'란 지명이 지금까지 전하여 오고 있답니다. 그 용마가 죽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파평산에 치마대(馳馬臺)를 세웠다는데 군부대가 있는 서봉이라서 일반인은 가볼 수 없는 곳인 모양입니다.
*. 파평 윤씨는 잉어를 안 먹는데- '파평 윤씨들은 잉어를 안 먹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하는 말입니다. 시조 전설에 나오는 시조 몸의 '81개의 비늘' 때문인가 하였더니, 그보다 윤신달의 5대손 윤관(尹琯) 장군에 대한 전설 때문인 모양입니다. - 고려시대 여진족을 정벌하여 국가에 대공을 세운 윤관 장군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거란군과 전쟁 때 이야기입니다. 싸움에 패하여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배 한 척 없는 강을 무사히 건너 탈출을 하게 되었다 합니다. 잉어 떼의 도움이었습니다. 그래서 파평 윤씨 자손들은 자기들의 자랑스러운 선조에게 도움을 준 잉어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차원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 파평산 산행 파평산은 파주 사람이거나 윤씨 아닌 사람에게는 별로 알려진 산이 아니어서 그 입구를 찾기가 힘듭니다. 파평산을 차로 가려면 자유로를 타고 가다가 문산 가는 쪽으로 좌회전하여 적성쪽으로 가다가 임진강폭포어장 바로 못 미쳐 덕천교를 건너지 말고 우측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거기 공설운동장인 축구장 옆 주차장으로 봉영사 가는 길이 이 산의 들머리입니다. 나는 그동안 파평산에 가보고 싶어서 벼르다가, 맞추어 이 산을 가는 '주엽산악회'를 따라 왔습니다. 이 분들은 서울 근교는 관광버스를 이용하지 않아서 회원들의 차 3대에 16명 속에 묻혀 왔습니다. 유난히 봄기운이 감도는 좋은 날씨가 우리들의 오늘 봄나들이를 축복해 주는 듯합니다.
주차장서 10분쯤 오르니 체육시설이 있고 거기에 등산 안내도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빙 둘러 서서 서로 인사를 합니다. 그 바로 위에 산으로 향하는 철문이 있고 갈림길 이정표가 첫 번째 8각정인 3거리까지 2.0km요 봉녕사까지는 0.4km라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오르니 좌측에 탑이 8,000만원을 들여 만든 사방탑비가 있습니다. 사방(砂防)이란 산이나 바닷가의 흙이나 모래의 이동을 막기 위한 시설한 댐을 말하는데 ( ) 속에 있는 '눌노리'란 무엇이지요? 아까 안내 지도에서 본 '사방댐(덕천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계곡 아래 마을이 이름이 '늘노리' 같습니다.
산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밋밋한 오름길인데 얼마를 오르니 작은 돌탑을 수없이 쌓은 가운데에 약수터가 있고 거기 파이프를 통하여 맑은 물이 흐릅니다. 그 물은 지하로 흐르다가 솟아나는 용천수인가 냉차를 마시는 것 같이 시원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우물 앞에는 앉아서 마시라고 친절하게도 통나무를 가로질러 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약수는 바로 위에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다시 또 이정표가 있고 멋진 나무 층계가 가파른 언덕 위로 오르고 있습니다.
그 위에 공터가 있고 그 공터 귀퉁이에 첫 번째 8각정이 있습니다. 시원한 막걸리를 파는 마음씨 좋은 장수도 있구요.
*. 파평산에서의 유감
이곳 이정표는 잘못되었습니다. 정상 가는 길은 표시하지 않아서, 8각정을 보고 정상이라고 착각하거나, 그 위로는 군부대 출입금지 지역으로 알고 그냥 다른 길로 하산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정상을 오르는 나무 층계 끝의 나무 위에 있는 까치집은 낭만적인 풍경입니다. 그러나 그 옆의 도치카는 그런 마음을 깨는 살벌한 분위기입니다. 옛날에 다음과 같은 '까치집' 시(詩)를 쓴 것이 생각납니다. 고향의 까치 같은 집에서 군인 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부모 마음을 생각해서였지요.
암수로 맺은 인연 고향 한 칸 짓고 싶어 높이 솟은 나뭇가지에 골조(骨組)만을 지어 놓고 몸으로 풍우(風雨)를 막아서 벽이 되고 지붕 되고-. -까치집
거기를 다 오르니 기다리던 우리들 오늘의 목적지 8각정 정자가 드디어 우리를 맞습니다. 여기에 오면 지금 우리가 휴전 중에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토치카며, 서쪽으로 보이는 정상의 군부대, 군 막사 그리고 꼬불꼬불 정상까지 난 가파른 포장 도로 등이 우리가 일선 지방에 온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드디어 두 번째 8각정입니다. 헬기장 너머 그 오르는 길이 통나무로 된 길이어서 아주 환상적으로 아름답습니다. 파평산에는 정상 봉이 둘이 있습니다. 동봉(東峰)과 서봉(西峰)이지요. 동봉은 우리가 오른 곳이요, 서봉은 요란한 레이더 기지가 있는 군부대로 거기에 아까 말한 치마대(馳馬臺)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 8각정에 선착객이 있어 초면인 우리들에게 그 아까운 홍어회에 술 한 잔씩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은 내가 평생 고마워해야 할 즐거운 추억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8각정 앞은 전망대인데 감악산 쪽으로는 규석 광산이 있어 산을 반이나 부수고 있고, 멀리 휴전선 넘어 윤신달 태사가 말 타고 달려 오고 갔다는 개성의 송악산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그 그림과 함께 어떤 것이 송악인지 하는 등의 설명이 있어야 할 곳입니다. 단순한 등산을 넘어서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소개 하여야 할 곳에 그 중요한 것이 빠였습니다. 그 많은 돈을 들여서 만들어 놓은 층계보다 먼저 우선하여야 할 시급한 일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서봉에 있다는 치마대에 대한 위치나 설명도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파평산은 이러한 것을 빼면 우리나라 수많은 아름다운 산에 비하여 그 높이도 그렇지만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는 산입니다. 정자 뒤를 돌아가 보니 깎아지른 바위 절벽입니다. 그 절벽에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저 마을 건너 뾰족한 산이 감악산인 것 같습니다. 하산은 친절한 막걸리 장수의 안내로 인적이 드문 서봉쪽의 계곡으로 향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등산로라서 나무 층계 위엔 낙엽이 덮여 있었고 가끔 만나는 진달래 무리는 더욱 선명하고 거기에 소리내어 흐르는 물은 청정수 중에 청정수였습니다. 이 길로 내려온 덕분에 우리는 계곡에서 식사 후에 다른 길로 가면 못볼 봉영사(奉寧寺)를 구경하고 올 수도 있었습니다.
*. 적멸보궁 봉영사
봉영사 옆을 지나면서 일행은 그냥 하산한 모양이지만 저는 이를 둘러보아야 합니다. 저는 등산에다 답사까지를 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탑과 대웅전 그리고 범종각을 둘러보고 급히 일행을 뒤 따라 갑니다. 절은 생각보다 더 큰 규모였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 '적멸보궁(寂滅寶宮)' 하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어서 불상을 모시지 않고 법당만 있는 불전인데 이 절에는 적멸보궁이라면서 불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多寶塔)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이 탑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불탑입니다. - 이 절의 주지 만월 스님이 불우아동 돕기의 인연으로 불교의 나라 미안마(버마)에 가서 성지 순례 중이었을 때였습니다. 거기서 부처님의 진신사리 10여과를 받아와서 대웅전에다 모시고, 나머지 2과는 불자 선남선녀로 하여금 친견하도록 대웅전 앞 다보탑에 봉안하였답니다.
제 생각으로는 대웅전 불상을 모신 상태에서 모신 진신사리라서 대웅전에 불상과 함께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등산회를 따라와서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다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언제 디시 차를 몰고 혼자 와서 파평 윤씨의 고향 에 대하여 쓴 이 글을 더 보완하였으면 하면서 귀가길에 들어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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