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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6-14 19:34
 조회 : 3,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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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이란 말이 한 때 중국을 풍미했다.
누구든 내노란 얘기를 들고 나와 나만의 세계를 자랑하던 시대다. 서로 나만이 옳고 나만이 세상에서 제일간다는 자긍심을 일제히 뽑냈다.
듣기에 좋았을 것이다. 시끄럽긴 했을 테지만 그래도 각자의 멋과 맛이 넘쳐나는 장관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것이 펼쳐지고 뭉쳐지고 나눠지고 합쳐져서 문화가 싹트고 분파했을 터.
백화제방백가쟁명 [百花齊放百家爭鳴] 이 그 연원.이며 한때,중국의 정치구호로 인구에 회자됐다.
'온갖 꽃이 같이 피고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는 이 말은. 1956년 당시 중국공산당 선전부장인 루딩이[陸定一]가 한 연설에서 처음 쓴 말이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다른 사상과 경쟁하는 속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여야 하는 것이 마땅하며, 처음부터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상으로 강요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획기적인 사회주의 문화정책을 표방하였다.
문학대혁명 때는 이 정책이 부르주아지 자유주의라고 규탄당하면서 루딩이도 비판당하였다. 1976년 4인방이 체포·실각된 후 문예·학술 분야에서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이 한때 장려되었고, 1978년 3월 채택된 중국 헌법에서는 "국가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을 실천함으로써 예술발전과 과학발전을 촉진하고, 사회주의 문화번영을 촉진한다"(제14조)고 명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은 그때 그때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정치적 책략에 불과하였다. 1978년 이 정책을 명문화시킨 것은 당시 덩샤오핑[鄧小平]이 문혁파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혁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정치투쟁의 방편으로 이용하였으나, 실권을 장악한 후인 1982년 12월 채택한 헌법에서는 이 조항을 삭제하였다.
지금 우리가 그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름' 이 나서 백화百花를 섭렵하기 100일째를 넘긴다. 그 소회가 없을 수 없다.
지난 3월4일 '나무딸기(3월4일의 꽃~애정) '에서 시작, 6월14일 뚜껑별꽃 Anagallis에 이르기까지 꼬박 100날을 백화 속에서 지났다.
세상이 좋아서 사이버를 열면 모든 꽃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우주 속에 핀 꽃을 찾아내듯 그것을 고르고 뽑는 일만 나의 몫이었다. 365일의 꽃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시조를 곁드리는 것은 많은 시인묵객이 노래하고 그림그렸다하나 한 묶음의 시조다발로 펼치지 않은데서 생긴 호기심이 발동한 때문이다. 이미 관심자들이 여기저기 뿌려놓은 데이타가 있긴 했으나 더러는 중복이고 유사하기도 해서 그런 것은 과감히 쏚아냈다.
거기서 얻은 것이 있다면 '백화는 다투어 피지 않는다'는 것.
저마다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각각의 얼굴과 모습을 펼쳐보인다는 것.
그것을 보고 울고 웃는 것은 사람들의 의식일 뿐, 꽃 그 자체와는 무관하다.
다만 사람들이 좋아하면 좋아하고 웃으면 웃고 울면 울고 소리지르면 소리지르는 점에선 매우 상대적인 커뮤니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꽃이 아름답고 좋은 줄을 이제 조금 알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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