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열매

             이정자

그렇게 그리워하고 바랐던 전원으로의 꿈이 금년 봄에 다가왔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 전원으로의 생활은 꿈을 꾸어 왔다기보다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아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로 이어지는 회귀이기도 하였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어느 한 시절이 가장 행복한 날로 기억되거나 다가 올 때가 있을 것이다. 그 시기가 나에겐 꿈으로 자주 나타나는 고향의 어린 시절이다. 원래 부모님께서는 대구에서 살다가 대동아 전쟁 말기 소까이( 疎開する) 발령이 나서 대구에서 칠곡군에 소재한 고향 마을로 이사를 하셨다. 그런데 이사를 가고 그 이튿날 해방이 되었단다. 아버지께서는 대구에 그대로 계시기도 했다. 대구집도 정리 안 된 상태에서 고향으로 갔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는 고향에서 어린 우리들과 함께 하셨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왜관으로 옮기셔서 한의원을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간에 양쪽 집을 오가며 두 살림을 하신 것이다. 우리도 두 집을 오가며 학교에 다녔다.

나는 어린 시절 우리 집이 참 좋게 느껴지고 그런 집에서 살고 싶은 것이 꿈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한옥 기와집이다. 그 시절에는 봄이면 동냥하러 오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시주를 받으러 오는 스님들도 많았다. 그들은 '대궐 같은 집'이라고 우리 집을 칭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시켜 그들에게 시주를 하게 하셨다. 나는 기꺼이 내 손이 닿는 대로 곡식을 그릇에 담아서 갖다 주곤 했다. 그들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복 많이 받을 거요'라는 덕담을 해 주었다. 그것이 또 좋아서 으레 내가 그들에게 곡식을 갖다 주곤 했다. 그것이 지금 생각하면 내가 베풀 수만 있다면 베풀어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진 것인 것 같다. 물질이든 봉사든 마음이든 베풀어 주는 기쁨인 것 같다. 봉사도 봉사를 해 본 사람만이 봉사의 기쁨을 안다고 한다. 동창회 일도 봉사하는 마음으로 했고, 단체 일을 볼 때도 봉사하는 마음으로 했다. 내 한 사람 수고로 여러 사람이 이로움을 받고 단체가 잘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했고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원을 가꾸면서 이것저것 모종을 사서 심은 것이 이제 겨우 두어 달 된다. 그 동안 상추, 호박, 들깻잎, 블로커리, 케일, 고추 등 이웃과 지인들과 나누어 먹은 집이 20여 집은 된다. 이곳 객지에서 생활한 지가 18년이 되었지만 그간 학교만 나갔고 문학 활동도 서울 중심으로 하여 이웃도 모르고 이 지역민하곤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전원을 가꾸면서 풍성하게 야채를 수확하면서 나누는 기쁨으로 이웃을 알게 되었다. 곧 이웃과 소통의 길을 수확의 기쁨으로 연 것이다. 그간 서로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어쩌다 만나면 어색한 인사였는데 이번에 야채를 나누어 먹으면서 친근한 인사로 바뀌었다. 손수 가꾼 야채 덕분이다.

방학이 되어 큰 아들 식구들도 다녀갔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아들 며느리도 좋아했다. 밭에서 자라는 야채를 보고는 신기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방학 때 한 번 더 온다고 했다. 고추, 호박, 들깻잎, 가지, 블로커리 케일 고구마 줄기, 파, 호박잎, 지천으로 깔린 게 먹을거리이다. 오늘은 ‘대학옥수수’도 땄다. 밭이 있으니 이렇게 풍성하다. 이웃과 지인들과 아들딸에게 나누어 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추수 때는 콩, 땅콩, 고구마, 붉은 고추, 들깨를 풍성하게 거둘 것이다. 아들·딸집에 나누어 주고, 겨우내 맛있게 간식거리도 만들어 먹을 것이다. 어린 시절 옆에서 바라만 보고, 동냥이나 시주로 베풀어 주었던 그 기쁨을 이제 이렇게 풍성하게 손수 가꾸어 이웃과 지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기쁨이 있어 나에게 밭이 생겼다는 게 행복하다.

밭은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거의 매일 남편과 함께 밭에 가서 2시간 정도 풀을 뽑고 김도 매고 농작물을 보살핀다. 그러고 나면 땀에 흠뻑 젖는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한 잠 자면 개운하다. 밥맛도 좋다. 건강도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남편은 땀을 흘리니 몸무게가 줄어들어 좋아한다. 반대로 나는 일을 하고 밥을 잘 먹으니 몸무게가 늘어나서 더욱 건강하니 좋은 현상이다. 자녀들도 어머니는 몸무게가 줄면 안 된다고 하니 몸무게가 늘었으니 다행이다.

퇴임 후 땀을 흘리면서 일 할 수 있는 곳이 생겨서 좋다. 비싼 돈을 주고 운동을 하며 땀을 흘리면서 살을 빼는데 생산적인 일을 하며 땀을 흘리고 살이 빠졌으니 남편은 더욱 좋아한다. 나는 뭣보다 일을 하며 땀을 흘리니 냉수를 먹어도 탈이 없고 밥맛이 있어 밥을 잘 먹으니 건강에도 좋다. 여름에도 땀 흘릴 일이 없었고 여름에도 더운밥과 더운 물을 마셨는데 밭일을 하고부터는 냉수도 아무 탈 없이 잘 먹는다. 그리고 금년 여름엔 집에서도 땀을 흘렸다. 아마 체질이 변한 모양이다. 출근하듯 날마다 갈 수 있는 곳이 있어 더욱 좋다.

꿈은 이루어지고 꾸준히 바라던 것은 어느 시기 가까이 다가와 손에 잡힌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느낀다. 그렇게 바라고 꿈꾸어 왔던 대학시절의 꿈, 유학으로의 길을 건강상 이유로 이루지 못하고 결혼을 했다. 늘 그 꿈은 내 맘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삼 남매를 기른 후 불혹의 나이에 큰 병을 앓았고,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 국문학으로 전과하여 다시 학문의 길을 가서 박사학위를 땄다. 꼭 20년 간 건국대와 충주대(현 교통대)에서 원 없이 강의를 했다. 전공 관련 학술서도 17권 썼다. 『문학의 이해』는 2012년도 문광부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제 강의를 다 놓고 나니 전원으로의 꿈이 다가왔다. 날마다 출근하듯 나가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어 좋고, 저녁나절이 되면 맑은 정신으로 책상 앞에 앉아 아무 부담 없이 책과 함께 해서 좋다. 시조 영역으로의 길을 시조작가로서의 길과 함께 갈 수 있어 더욱 좋다.

금년은 세계한글작가대회가 열리는 해이다. 국제PEN한국본부에서는 한글문학 큰잔치인 세계한글작가대회를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천년고도인 경주에서 개최한다. 세계한글작가대회는 한글의 우수성과 함께 한국문학을 전 세계에 알리는 좋은 계기이다. 특히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를 2012년도에 이어 전 세계에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맞추어 ‘시조 번역회’ 이름으로 이정자의 영역시조(1)도 출간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을 새겨보면서 -.

학생들에게 버킷리스트(bucket list)로 프레젠테이션을 한 적이 있다. 이제 나는 나의 묘비명을 프레젠테이션 한다.

‘도전, 그리고 꿈을 이루다. 범사에 감사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愛汕 李相厚, 張謂璇)께 감사한다.

그리고 나를 이해하고 도와 준 남편 李永錫과

사랑하는 3남매 恩玖,恩珍,恩助에게도 ... ♣♣♣

-2015년도 이대동창문인회 문집-에서

(연간 문집 공동 주제가 버킷리스트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