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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7-04 07:14
시간의 화살과 종말
 글쓴이 : 이상성
조회 : 2,987  
시간의 화살과 종말

- 이상성 -

시간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묻지 않고 넘어가는 주제이다. 시간은 으레 과거에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지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이라는 것이 결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시간에는 많은 종류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시간, 심리적 시간, 종교적 시간 등 굵직한 종류만도 여럿이며 각각의 항목에서 세분되는 시간의 종류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대단히 많은 것으로 늘어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여러 종류의 시간의 개념들을 살펴보고 이러한 다양한 시간의 개념 안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시간의 끝인 종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도록 하겠다.

먼저 과학자가 말하는 시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과학적 시간을 말함에 있어서 중요한 근본 전제는 절대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이었다. 절대공간은 이 우주에서 어느 한 지점은 공간적으로 절대적인 위치를 가진다는 개념으로서 예를 들어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공간적 위치는 우주 내에서 절대적으로 불변의 어느 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개념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정지상태에 있다고 볼 때에 가능한 개념이다. 즉, 지구는 이 우주 내에서 요지부동으로 한 자리에 가만히 있으므로 지구에서의 어느 한 지점은 항상 우주 내에서 일정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뉴턴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뉴턴에 의하면 정지상태의 유일한 기준은 없다. 물체 A가 물체 B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때 이것은 B가 A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주 내에서 지구는 자전과 동시에 공전을 하고 있고 태양은 은하계 우주 내에서 역시 공전을 하고 있으며 은하계 우주는 또 다른 은하계와 함께 국부은하단 안에서 공전을 하며 국부은하단은 은하단 내에서 역시 공전을 하고 있고 은하단 내의 모든 별은 우주의 팽창과 더불어 움직이고 있으므로 도대체가 정지 상태란 우주 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 하에서 절대공간이란 있을 수 없는 개념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초속 50m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탁구를 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탁구공이 1초 동안에 탁구대 이쪽과 저쪽 사이를 두 번 튕겨서 왕복을 했을 경우에 기차 안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탁구공이 왕복 10m 내외를 움직인 것으로 관측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달리는 기차 밖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이 탁구공이 기차의 속도에 따라 1초 동안에 50m를 이동한 것으로 관측된다. 기차 안에서는 정지된 것으로 관측되는 승객 역시 기차 밖의 관측자에게는 초속 50m로 움직이는 것으로 관측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절대공간이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뉴턴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절대시간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시간은 이 우주의 어느 곳에서도 똑 같은 속도로 흘러가며 어디서 관찰하던지 시계만 정확하다면 정확한 시간을 관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시간의 개념이 아인슈타인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어떤 과학적 법칙도 관찰자의 운동속도에 관계없이 일정해야 한다. 이것은 빛의 속도라는 현상에 대해서도 예외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빛의 속도는 정지해 있는 관찰자에게나 움직이고 있는 관찰자에게나 일정하다. 그리고 움직이고 있는 관찰자에게는 빛이 달린 거리가 정지해 있는 관찰자에 비해 짧아지거나 길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관찰자와 정지해 있는 관찰자와는 시간이 다르게 지나가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모든 움직이는 사람에게 시간은 다르게 나타나며 단지 일상생활에서는 개별적인 움직임에 의해 달라지는 시간의 속도가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세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안될 뿐이다. 이리하여 자연과학의 영역 안에서는 절대공간도 절대시간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떨어져서 전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 시공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절대시간이 없는 과학적 시간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우주론적 시간과 엔트로피의 시간, 허수의 시간, 그리고 심리적 시간이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심리적 시간은 앞에서 말한 과학적 시간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그러한 심리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 시간 안에 속하는 심리적 시간을 말한다. 그리고 허수의 시간이라는 개념은 중력과 양자역학을 통일시키기 위해 만든 수학적 시간의 개념이다. 허수의 시간임으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지만 우주의 무경계조건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시간의 개념이다.

우주론적 시간은 특이점에서 빅뱅으로 시작하여 지속되고 있는 우주의 팽창을 따라 움직이는 시간을 말한다. 이 시간은 우주의 팽창을 따라 계속적으로 진행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이 우주론적 시간은 비록 우주가 먼 미래에 다시 수축을 시작한다 해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진행할 그런 시간이다. 물론 우주가 닫힌 체계여서 언젠가 다시 수축한다 해도 그 시기는 적어도 앞으로 100억 년은 지난 후일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하여간 우주가 다시 수축한다고 해서 우주론적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는 않는다.

엔트로피의 시간(열역학적 시간)은 한 마디로 말하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을 말한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방향과 같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방향으로 시간을 살지 태어나기 전에 죽음으로부터 부활해서 살며 그 후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미래의 사건을 먼저 알고 과거로 돌아가는 그런 삶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테이블 위에서 떨어져 깨어져 있던 유리컵이 다시 테이블 위로 올라와서는 원상태로 복원되는 그런 현상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은 엔트로피가 줄어들고 무질서가 질서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과 반대의 방향으로 시간을 거슬러 살 수 있다면 이는 대단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미래의 일은 미리 다 알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갖가지 혼란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유기체의 삶, 인간의 삶은 증대된 엔트로피에서 발생하는 무질서한 에너지를 이용하여 질서정연한 에너지를 생산,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로 변환시킨 후 다시 원래상태로 엔트로피가 증대되면서 발생시키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유지된다. 물론 이 때 만들어진 질서정연한 에너지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양보다 훨씬 많은 무질서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만든 것이다. 비단 에너지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현상이 질서정연한 곳으로부터 무질서한 곳으로 움직인다. 즉 엔트로피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처럼 질서정연한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이행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질서한 상태가 질서 있는 상태보다 훨씬 많은 것에 있다. 예를 들어 100 장의 조각그림으로 이루어진 퍼즐이 있다고 하자. 그림 조각들을 다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이 완성된 상태를 질서가 잡힌 상태, 즉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 조각들을 허공에 뿌리면 서로 뒤섞여서 혼란의 상태가 된다. 이렇게 혼란의 상태, 즉 엔트로피가 증대된 상태로 변하는 것은 순전히 무질서한 상태의 경우가 질서 잡힌 상태의 경우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질서정연한 그림이 제대로 맞춰져 있을 경우의 수는 단 하나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뒤섞여있을 경우의 수는 엄청나게 많다. 고등학교 수학의 순열과 집합을 기억한다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경우의 수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 조각들을 허공에 뿌릴 경우에 질서 잡힌 그림이 될 가능성은 전체 경우의 수 중에서 단 하나이므로 거의 불가능한 것이 된다. 즉, 무질서한 양상이 될 가능성이 수 백만 배 수 천만 배 이상이 되기 때문에 확률상 질서정연한 것은 항상 무질서를 향하여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엔트로피의 시간은 우주론적 시간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말은 우주의 초기, 즉 특이점에서는 우주는 엄청나게 질서가 잡힌 매끈한 우주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과 함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말은 우주론적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엔트로피는 증가함을 말하고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위해서는 무질서로 바뀌어야할 질서가 있다는 말이며 특이점 이후 150-200억 년의 시간이 경과한 지금에도 증가할 엔트로피가 있다는 말은 우주의 시초에는 거의 모든 것이 질서였으며 엔트로피는 극히 낮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 초기에는 어떻게 해서 매끈하고 질서가 잡힌 모습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특이점 이전에 이 우주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빅뱅 이전에는 물질은 없고 오로지 에너지만 있었는데 이 에너지에 의한 대폭발 이후 그 에너지가 물질로 변환되면서 매우 매끈하고 질서정연한 우주가 형성된 것이다. 즉, 우주의 질서는 그 질서가 보유하고 있는 양보다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 생성된 물질은 절대다수가 함께 생성된 반물질의 쌍과 함께 반응하여 소멸하면서 다시 에너지로 되돌아갔으며 극히 일부의 물질만 함께 소멸할 반물질의 부족으로 인하여 살아남게 된 것이다.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창조된 질서가 지닌 에너지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어야한다는 법칙은 우주 발생의 초기에서조차 적용되는 법칙인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시간의 개념에서 우주의 종말은 과연 존재할 것인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 종말은 어떤 모습의 종말일까? 먼저 빅뱅 이론에서 말하는 두 가지 우주의 가능성을 두고 생각을 해보자. 첫 번째 가능성은 열린계 이론(open system theory)이다. 이 이론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주의 팽창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이론으로서 이 경우 우주의 시작은 있으나 종말은 없다. 최초에 빅뱅에 의해서 시작된 우주의 생성과 그 팽창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종말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 우주의 미래는 참으로 삭막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증대되는 엔트로피는 결국에는 모든 질서 있는 에너지를 모조리 소모함으로써 완벽한 열평형 상태에 도달해서 어떤 생명체도 운동도 없는, 그저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의 운동 외에는 모든 것이 죽은 그런 우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닫힌계 이론(closed system theory)이다. 이 이론은 현재 팽창하고 있는 우주는 언젠가 그 팽창을 멈추고 수축하는 단계로 접어들 것이라는 이론이다. 이러한 닫힌계 이론에 의한 우주에도 또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팽창기에 우주론적 시간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던 열역학적 시간이 수축기에는 역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증대되던 엔트로피는 그 증대를 멈추고 오히려 엔트로피가 낮아지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죽었던 사람이 부활하고 점점 젊어지다가 드디어는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인간의 삶이 진행되고 깨어진 컵이 다시 원래상태로 돌아가며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들이 거꾸로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우주는 최초의 매끈하게 질서정연했던 모습으로 되돌아가 빅 크런치를 맞이하게 된다. 이 이론은 스티븐 호킹이 초기에 주장했던 이론으로서 나중에 그는 이 이론이 틀렸다고 인정했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우주가 수축하는 수축기에도 열역학적 시간은 여전히 엔트로피가 증대되는 방향으로 계속 간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팬로즈가 제안한 이론으로서 우주의 엔트로피는 팽창기에 계속 증대되는 방향으로 시간이 흘러가지만 심지어 수축기에서조차 이 열역학적 시간의 방향은 엔트로피가 증대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C,P,T 대칭성 중 열역학적 시간의 방향은 T대칭성이 성립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빅뱅 직후의 우주는 매우 작았지만 매끈하게 질서가 잡힌 상태였는데 수축기를 거쳐서 빅뱅 직후의 크기로 돌아온 우주는 매끈한 질서는 고사하고 어마어마한 무질서로 말미암아 제멋대로 울퉁불퉁한 우주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뒤틀리고 꼬인 상태에서 우주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 시나리오대로 우주의 역사가 진행된다면 인간은 우주의 수축기로 접어들 때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만약 100억 년 후에도 인류가 생존해 있다면 역시 지금의 상태와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삶을 살 것이다. 우주는 수축하여 우주론적 시간의 방향은 거꾸로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태어나고 살다가 늙어서 죽는 삶을 살게 되는 열역학적 시간의 방향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여전히 이 지구상에는 사용 가능한 질서 있는 자원이 있어야 하고 태양 에너지는 여전히 지금과 같은 정도로 지구를 향해 보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지구상에서 인류가 계속 생존할 가능성이 없다. 지구, 혹은 태양계라는 닫힌 계 안에서 엔트로피가 열평형 상태에 도달해 버리면 그 곳에서는 더 이상 어떤 운동도 움직임도 생명현상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구는 그저 차갑게 식어버린 거대한, 그러나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혹성 하나가 우주를 떠돌고 있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한 마디로 영원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열역학적 시간의 방향이 어떻게 흐르던지 간에 우주가 다시 수축한다는 시나리오에 의하면 우주에는 종말이 있다. 우주가 어느 점에서 다시 수축을 시작하면 팽창했던 기간만큼 다시 수축을 하고 그 수축이 끝나면 최초의 특이점으로 되돌아가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우주는 다시 빅뱅을 통해 새롭게 재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 나타나는 새로운 우주는 현재의 우주와 같은 모습이 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어떤 물리의 법칙이 물질을 형성할지 예측할 수 없다. 그 때 새로 전개된 우주에서는 생명체가 어떤 모습을 가질지 혹은 생명체라는 것이 가능한 우주가 될지 안될지도 알 수 없다. 물질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더라도 완전한 균질의 우주가 될지 지금처럼 울퉁불퉁해서 빈 공간과 별이 있는 우주가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 과학적 시간의 마지막 개념인 허수의 시간이 적용되는 우주의 종말을 생각해 보자. 허수의 시간이 적용되는 우주론의 중요한 이론은 우주의 무경계조건이다. 우주의 시작은 빅뱅에서 출발하고 허수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우주는 팽창하여 부풀어오르다가 다시 수축하여 대격돌(big crunch)로 종말을 맞는다. 이 때의 모델은 마치 지구의 모양과 같아서 최초의 특이점이 북극이라면 허수의 시간은 지구의 표면처럼 흐르고 실제의 시간은 남극과 북극을 잇는 직선으로 나타나며 허수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격돌의 특이점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실제의 시간은 북극에서 시작하여 남극에서 끝이 나지만 허수의 시간은 우리가 지구의 북극이나 남극에 간다고 하여 거기가 지구의 끝이 아니듯이, 지구는 계속해서 이어지듯이 시간과 공간은 끝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허수의 시간이 적용되는 우주의 무경계조건에 따르면 이 우주에는 시간과 공간이 끝나는 점이 없고 사실상 특이점이라는 것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물리의 법칙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그런 상태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무경계조건에 따르면 시공은 지구의 표면과 같은 곡면을 이루고 있어서 시작도 끝도 없다. 우리가 지구의 북극과 남극을 편의에 의해 정해놓고 있지만 북극과 남극이 지구의 시작도 끝도 아닌 지구상의 한 지점에 불과하듯이 허수의 시간이 지배하는 우주에서는 빅뱅의 특이점도 빅 크런치의 특이점도 편의상 붙이는 하나의 시점일 뿐 그곳이 시작도 끝도 아닌 것이다. 지구에서 시작과 끝이 없듯이 우주도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무경계조건을 따르면 이 세상에는 종말이 없다. "우주는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호킹의 말이다.
인간이 심리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간에는 여러 가지의 모습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치 서울역을 출발한 열차가 부산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듯이 시간은 과거라는 출발지에서 현재라는 선로 상의 어느 지점을 거쳐 미래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만 기차와 다른 것은 기차는 어디선가 분명한 출발지가 있지만 시간은 그 출발지도 목적지도 불분명하다는 점일 뿐이다.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또 어떤 사람은 시간은 미래로부터 우리에게로 다가와서는 현재를 거쳐 과거로 사라져 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철길 옆에 서 있으면 열차가 멀리서 달려와서는 내 곁을 지나 멀리 달려가듯이 시간도 먼 미래에서부터 출발해서 나를 향해 달려와서는 마침내 내 곁을 지나 과거를 향해 멀어지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간 역시 시간의 시작과 끝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어떤 사람은 또한 시간에 있어서 현재는 없고 과거와 미래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순간의 시간은 그것을 현재라고 인지하는 순간 이미 과거로 변해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은 결코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라고 인지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과거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어떤 시간이 현재의 시간인가 라고 묻는다면 아무도 정확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이와는 반대로 시간은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고 현재만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미래는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 다가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다. 아직 우리의 현실이 되지 못한 시간에 대해 우리는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에놀라 게이(Enola Gay: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미공군 폭격기의 이름)의 동체에서 분리되어 투하된 순간 이미 과거의 사건이 되었기 때문에 다시 그 폭탄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시간에 대해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시간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심리적 관념도 잠시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철학적 개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지난 호에서 이야기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절대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은 중세가 끝나갈 때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서양 철학사에서 시간에 관해 탐구한 중요한 철학자 중의 한사람으로서 베르그송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불란서 철학자로서 시간을 지속(duration)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했다. 그에게 있어서 지속의 개념은 시간만 아니라 그의 철학 전체를 흐르는 일관된 핵심 개념이었다. 그는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서 인식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밖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분석의 방법보다는 사물의 내부로 들어가서 파악하는 직관의 방법이 보다 더 사물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분석의 방법은 사물이 정체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고 행해지는 것인 반면에 직관은 모든 사물은 지속의 상태에 있음을 전제로 하고 이루어지는 인식의 방법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팔을 움직일 때 분석의 방법은 그의 팔이 어느 특정한 지점을 통과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팔은 매 순간 어떤 지점을 지나간다. 이렇게 파악할 때에 팔이 통과한 두 지점 사이에는 무수한 지점, 곧 무한대의 지점이 있게 되기 때문에 사실상 완벽한 인식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 팔은 정지된 어떤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움직임을 가진 것뿐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어떤 정지된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루어져 가는 어떤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속이라는 개념을 통한 시간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제논이라는 궤변가의 명제를 반박하는 것으로 예를 든다. 제논에 의하면 날아가는 화살은 사실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매 순간 순간에 어떤 특정한 지점에 있으며 그 특정한 지점에 있는 동안은 그곳에 존재해 있음으로 매우 짧은 순간이지만 그 동안 그 지점에 정지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살은 모든 존재하는 지점에서 정지해 있는 결과가 되므로 정지를 아무리 합해도 결과는 정지이기 때문에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지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주어진 순간에 그 화살이 그 장소에 정지해 있지 않다면 화살은 그 장소를 점유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 화살이 그 장소를 지나갔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에 대해 베르그송은 만약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제논의 가정이 옳다면 그의 이러한 명제는 반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말하기를 공간에 실제로 위치가 존재하면 시간이라는 것이 세분된 단위로 나뉠 수 있다는 제논의 전제가 틀렸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위치라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 임의로 가정하는 것이며 시간의 단위라는 것도 사실은 끊임없는 흐름인 시간을 분석적인 지성이 임의로 잘라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제논의 궤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정체되어 있는 위치로부터 움직임을, 그리고 순간들을 합하여 참된 시간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라고 베르그송은 주장한다. 아무리 많은 위치를 합해도 각각의 위치 사이에는 역시 무한의 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연속이 되지 않으며, 아무리 많은 시각을 연결해도 역시 그 시각과 시각 사이에는 무수한 시각이 있기 때문에 연속적인 시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실로 불변의 어떤 실체로서 정적,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연속과 흐름 안에서만, 분석적이 아닌 직관의 능력에 의해서 파악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이 베르그송의 시공에 대한 개념이다.

베르그송의 이러한 시공에 대한 개념은 아직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에 의해 절대시간이 부정되기도 이전에 철학에서 주장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베르그송의 시대에 이미 상당한 물리학적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그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어떤 절대적인 위치와 순간으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관점을 부정하면서 시공은 오직 상대적으로 파악될 뿐이라는 그의 날카로운 통찰은 그야말로 그가 말한 직관의 방법이 아니면 발견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칸트, 그리고 헤겔을 통해 절대화되어 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고 이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철학적 시간 개념에서는 종말은 없다. 오히려 철학은 신학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서구 기독교에 대한 반발로 신앙보다는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혹은 인간의 경험에 모든 진리의 기초를 둠으로써 기독교가 말하는 종말을 거부하고 인간의 역사에 대한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적어도 니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서양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근대와 현대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적 철학에서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에 대한 강한 거부감 때문에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 그리고 경험할 수 없는 것들, 그리하여 검증 불가능한 개념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거부로 인해 신의 창조와 종말에 대한 논의 자체를 배척함으로써 종말이라는 개념이 아예 들어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철학에서 말하는 시간의 개념과 물리학에서 말하는 상대적 시간의 개념들과는 다른 시간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에서는 시간에 시작이 있었다고 본다. 앞에서 말한 어거스틴의 말처럼 시간은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그 때에 창조된 피조물의 하나이다. 시간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하여 하느님의 창조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시간조차 하느님의 창조로 인해 존재하게된 사물로서 파악한다. 현실세계에서는 하나의 사건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어떤 범죄사건의 유죄가 성립하려면 범죄가 저질러진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창조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거부한다. 시간과 공간 모두가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창조는 인간세계에서 말하는 사건으로서 성립할 수가 없다. 이리하여 기독교에서는 시간은 유한한 사물, 곧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파악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시작이 있음을 말한다.

중세의 기독교에서는 세상의 창조가 구약성서의 연대기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계산하면 나오는 기원전 4천여 년에 이루어졌음을 믿었는데 그것은 현실 역사의 경험에 근거해서 타당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불과 천여 년 사이에 엄청난 진보를 이룩한 인류 문명의 발달속도를 보건 데 인간 역사가 결코 그 이상 오래 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이 세상의 역사가 그 정도밖에 안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요즘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나게 늦은 것 같지만 중세 당시의 사람들 눈에는 대단히 빠른 진보였다. 생산 기술의 발전도 그렇고 전쟁기술의 발전도 그렇고 철학적 사유의 발달 속도도 그렇고 예수 당시의 상황과 중세기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발전이 있었다. 그 정도 발전 속도를 거꾸로 역추적해 올라가면 완전한 원시시대, 곧 아담과 하와의 시대까지 그렇게 오래 올라가지 않아도 도달한다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 곧 천지창조가 지금으로부터 불과 6천여 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믿은 중세 교회의 판단은 단순히 성서의 기록에만 근거한 무조건적 신앙이 아니라 당시의 과학적 지식으로 검증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과학적 검증의 정신은 배제한 채 교리화되어 전해 내려오는 내용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에 시작이 있다고 믿는 기독교는 다 알다시피 시간에 끝, 곧 종말도 있다고 믿는다. 매 세기말마다, 특히 서기 1000년 말에 이러한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고 역사가들은 전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도는 사실상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의에 의해 임의로 정한 것일 따름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1천 번 회전한 것과 1천 한 번 회전한 것과는 우주적으로, 혹은 하느님의 입장에서 다를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화가 그런 것에 의미를 둠으로써 일어난 현상일 따름이다. 그리고 과거에 이러한 종말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은 우주의 역사가 짧다고 생각했던 것에도 큰 원인이 있다. 현재가 하느님 역사의 절정기라면, 그리고 창조로부터 지금의 절정기까지가 겨우 수 천년의 세월밖에 흐르지 않았다면 그 종말까지의 시간은 참으로 짧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던지, 심지어 영화나 연극도 절정에 도달하면 다음 순간 그 끝을 장식하게 된다. 왜냐하면 절정에 이른 후에는 더 이상 극이나 역사를 이끌어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를 항상 하느님 역사의 절정으로 파악했던 교회는 그러므로 이제 하느님에 의한 역사의 종말이 곧 도래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기대 때문에 기독교에서 나타난 독특한 시간의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다 잘 알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매순간을 종말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 가지는 시간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카이로스의 시간은 연속적 결단의 시간이다. 매순간 순간을 결단하며 사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름지기 이러한 시간에 대한 개념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시간의 개념이 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카이로스의 개념이 시간에 도입될 때에 우리는 자연과학, 혹은 물리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시간의 허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은 우리에게 이 지구상의 삶이 비록 천문학적 기간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태양이 대폭발을 일으켜 초신성(super nova)으로 변하는 때에 완전히 끝장이 남을 알려 준다. 오늘날도 수시로 관측되는 별의 대폭발이 우리 태양이라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운명이 아님을 우주물리학은 냉엄하게 예언한다. 우리 인간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결국에는 끝장날 운명을 향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생존경쟁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과학의 시간개념은 우리에게 허무감을 줄 수밖에 없다. 이 허무함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역설적이게도 매 순간이 그러한 종말의 때인 것으로 여기며 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순간 나의 삶이 진리를 향한 결단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 그러한 허무한 시간을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어마어마한 우주의 규모와 그 장엄한 역사 앞에서 우리가 겸손해지고 하느님의 창조의 놀라운 힘을 바르게 깨닫는 길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뿐만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시간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시간은 단순히 우리에게로 왔다가 과거로 흘러가거나, 단순히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그런 것이거나, 무의미한 현재성만 존재하거나, 현재는 없고 우리의 통제력 밖에 있는 미래와 과거만 있는,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런 시간이 아닌, 매 순간을 의미 있는 시간, 의미 있는 삶으로 바꿔 주는 것이 바로 이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심리적 시간뿐만 아니라 철학적 시간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준다. 시간이 아무리 복잡한 개념을 통해 설명되어도 그것이 나와 우리의 삶과 직접적 관련이 없을 때 그러한 개념은 공허한 것이 되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한 철학적 시간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시간이 바로 나의 시간, 나의 결단의 장소가 될 때이다. 다만 그러한 철학적 개념들은 나의 결단을 좀더 밝은 빛 안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시간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이 우리에게 불필요한, 혹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인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시간에 카이로스의 차원을 첨가해 줄 때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모든 시간에 대한 개념들이 오직 카이로스의 시간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이 더 이상 역사의 문자적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오히려 우리 삶 속에서 더욱 열성적으로 카이로스적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지금까지 100-200억 년의 역사를 지닌 우주는 그렇게 쉽게 종말을 맞이할 것으로 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앞으로 남은 우주적 시간의 역사를 위해 투쟁적으로 살아야만 한다. 현대 물리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우주론은 종말은 끝이 아니라 매순간 새로운 시작임을 자각하게 해준다. 심리학적 시간, 철학적 시간 모두다 우리의 카이로스가 보다 풍부하고 깊은 내용을 가지도록 다양한 측면에서 시간에 대한 이해를 더하게 해 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는 이제 시간에 대해서도 좀더 다양하고 깊은 성찰을 해야 할 때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순히 심리적으로 느끼는 시간을 넘어서서 우주론적으로, 철학적으로, 그리고 기독교, 혹은 각자가 믿는 신앙인으로서의 입장에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글이 그러한 사색에 일말의 단서를 제공하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 민들레 성서마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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