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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5-27 00:34
맨손으로 일으킨 현대여류시조의 산맥
 글쓴이 : 박구하
조회 : 3,242  
정운과청도
맨손으로 일으킨 현대여류시조의 산맥

박구하

화창한 봄의 꽃길, 남도를 가다

누가 뭐래도 봄은 오고 꽃은 핀다. 봄꽃은 정말 화사하다.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은 새삼 우리의 생의 한복판에 살아있다는 자각을 갖게 한다. 매화와 산수유가 잠든 대지를 깨우면 목련이 깃발을 올리고 개나리, 진달래 철쭉이 다투어 합창한다. 절개지 둔덕, 시궁창을 가리지 않고 꽃은 핀다. 이렇게 봄이 달아오르면 벚꽃이 제왕처럼 온 세상을 환히 밝힌다. 진정 봄은 꽃은 축제다. 그러나, 그 꽃성(城)은 오래 가지 못한다. 진해에서 올라온 벚꽃이 여의도 운중제에서 절정이더니 하루 밤이 다르게 꽃은 진다. 온 것처럼 가는 걸음도 바쁘다.

유달리 춥고 매웟던 지난 겨울,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나는 겨울 내내 이영도(1916~1976)의 마지막 유고시집『언약』을 찾아 읽었다. 책머리에 나오는 선생의 사진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초가집 돌담을 배경으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모습은 그저 누님 같이 정답고 어머니 같이 포근하다. 어릴 적 본 듯한 먼 산이 띠를 두른 마당에 고목 한 그루가 한가롭게 서 있다. 어느 한적한 시골의 오후, 쪽진 머리, 하얀 동정, 넉넉한 치마저고리에 초추의 양광이 눈부시다. 그 강렬한 음영의 콘트라스트를 보노라면 까닭 없는 그리움에 눈시울이 아려온다.

해거름 등성이에 서면/ 愛慕는 낙락히 나부끼고
투명을 切한 水天을/ 한 점 밝혀 뜬 言約
그 자락/ 감감한 산하여/ 귀뚜리 예지를 간(磨)다(「언약」)전문)

사람은 가도 글은 남는 건가. 그 생애가 짧았던 만큼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세속적 행복보다는 높고 찬 정신세계에서 생의 뜻을 찾으며 한 마리 백학처럼 살다간 정운(丁芸) 이영도! 생각할수록 그 목숨과 생애가 애잔하여 언제고 기회가 되면 그 살던 곳을 가보고자 했었는데 마침 선생의 생가를 지키고 있는 사람과 연락이 되어 어느 봄날 경상북도 청도 끝에 있는 생가를 찾아 길을 나섰다. 해마다 봄이면 몸의 관절마다 나사가 풀려 앓는다던 저운, 봄내 육신을 앓아서 한결 황홀하고 찬란한 자신의 봄을 꽃피우고 싶어했던 정운, 그 산천에 녹음 지고 산꿩과 뻐꾹새가 저를 대신하여 울어주기를 고대하였던 정운은 기어코 그 봄에 가고 말았다. 그 정운을 나는 흡사 숨겨둔 애인 만나러 가듯 가슴 벅차게 찾아 가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영도 선생과 생전에 가까워질 수 있는 인연 가까이에 있었으나, 타계하기 일년전 단 한번 만나본 일 말고는 내 뜻이 못 미쳐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놓친 것이 지금도 억울하고 애석하다.

서울서 새마을호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미리 약속해둔 시인들과 함께 자동차로 밀양을 거쳐 청도 쪽으로 달렸다. 국도라고 해도 새로 난 길인데다 평일이라 길이 한적해 쾌적한 드라이브였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봄철의 논밭과 낮은 구릉들이 어찌나 평화로운지 나는 바로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목메기는 없었지만 밭둑에는 보라빛 자운영이 주변의 어설픈 개발풍경에는 아랑곳없이 제철을 만나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물오른 수양버들 가지사이로 노란 장다리꽃이 키대로 서서 벌 나비를 부르고 있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복사꽃은 지금이 한창이라 그 화사한 꽃가지가 어우러진 언덕은 그 자체로 무릉도원이었다.

초가 나직턴 마을을/ 기워 입힌 원색 지붕
農路 닦는 아낙네/ 황토빛 질퍽한 이마
그 남루/ 어루만지듯/ 복사꽃 흐드러졌네(「풍경 1」전문)

준비한 김밥을 까먹으며 이 화창한 봄날, 선생의 시에 나오는 복사꽃을 육안으로 보며 그 생가를 찾아가는 길은 행복했다. 선생의 생존당시의 남도 농촌의 모습이 아무리 남루했을지라도 저 복사꽃만은 그 화사함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으리라. 차 속에서 우리는 복사꽃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다들 시인들인지라 화제가 풍부하여 복숭아 "桃"자가 들어가는 '도화' , '도원' , '수밀도'등을 이야기하다가 화제가 '도색(桃色)'에 이르러서는 모두 웃었다. 사실 '도색'은 그 발그스름한 빛깔이 너무 고와 열 일곱 처녀의 물오른 얼굴빛에 비유된다. 그런데, 그 좋은 낱말이 어쩌다가 '도색잡지'니 '도색영화'니 하는 야릇한 뜻의 형용사로 내몰렸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일본풍의 영향일 게다. 그러고 보니 길가에는 가로수보다 러브호텔이 더 많이 줄지어 서서 지나는 아베크족을 유혹하고 있었다.

초행길이라 해도 25번 국도을 바라고 올라가면 별로 힘든 길도 아닌데 꽃바람에 홀렸는지 몇 번을 헤매었다. 생가가 있는 유천은 이제 사라진 옛 지명이 되어 버렸고 기차역명도 지금은 상동역으로 바뀌었다. 국도변 어디에도 "유천" 이라는 팻말은 나오지 않고 밀양시를 지나서 얼마 못 가 "학일온천"이라는 표지판이 나오는데 거기서 바로 우회전하여야 한다. 우회전하여 다리를 건너면 바로 유천이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이 비파강(琵琶江)으로 경상남북도의 경계를 이룬다.

사라진 솟을대문

비파간은 선생의 수필이나 그와 동향인 박옥금 시인의 글에서 많이 보았기에 이름이 눈 익었고 이 강을 앞에 두르고 유호리와 내호리가 붙어 있는데 내호리 쪽으로 우회전하면 바로 파출소가 나오고 일제시대 때 건물 그대로인 듯한 약국이 있고 버스 한 대 지나면 꽉 찰 지나갈 좁은 길을 10여 미터 가면 "이영도선생 생가"라는 팻말이 나온다. 제대로 왔으면 1시간 반 남짓했을 길을 우리는 2시간을 넘어 도착했다.

집앞 길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선생의 친척 이보기(李輔基, 78세)씨가 나와 있었다. 이 선생은 키가 크고 백발이 성성한 미남형의 학자풍 모습이었는데 매우 자상하고 건강해 보였다. 바로 이영도 생가로 들어갔다. 상상했던 솟을대문은 보이지 않았다. 이보기 씨의 말에 의하면 사라호 태풍 때에 '앞 강물'이 넘쳐 그 물이 바로 여기 흙담장 중간까지 들어와 그 솟을대문을 휩쓸어버렸다는 것이다.

근사했을 솟을대문 대신 밋밋한 함석 대문을 지나 들어서니 집은 기역자로 두 채가 낡은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고 입구에 선 늙은 벚나무 아래에 이영도 선생의 청동시비가 이호우 선생과 나란한 크기로 누워 있었다. 시비 주위는 잔듸와 철쭉 등이 심어져 환했으나 그 옆은 가꾸지 않은 듯 잡초더미였다.

시비를 지나쳐 들어가니 바로 사랑채였다. 저 사랑채의 바깥방과 안방에서 사이 문을 열어놓고 양가 어른들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시늉만으로 맞선을 본 이영도는 갓 스물살의 나이로 이 집을 영영 떠나갔다. 이 사랑채 앞에는 큼직하고 잘 생긴 모과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었다. 이 모과나무에 관한 이영도의 글을 보면, 오빠인 이호우가 심었다는데 그 어머니는 열매를 따서 차와 술을 담그는 등 다용도로 썼다고 한다. 선생은 날로 새것으로 대치되는 도시생활에서 창호지와 대소쿠리와 이 못 생긴 모과열매를 회상하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들어서니 마당은 단디가 보송보송 자란 가운데 하얀 꽃잔디가 밝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지금 이 집에는 이호우 선생의 육촌 제수씨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마침 집을 비우고 없었다. 이 집은 원래 이영도 선생의 부친인 이종수 군수가 돌아가시고 이호우 선생이 대구로 이사갈 때, 그때 돈으로 굉장히 비싼 값에 팔렸다고 하는데(당시 대구에서 값비싼 대궐 같은 집 값이12만원이었을 때 이 집 값으로 8만원을 받았다고 함) 그것은 당시 일본에서 귀국한 돈 있는 사라들끼리 서로 사려고 경쟁이 붙어 실제보다 그렇게 값이 올라갔다고 한다. 어쨌든 이 집은 우리 시조문학계에 남녀 양쪽으로 각각 거봉이 된 두 시인이 출샣하고 성장한 곳인 만큼 후손이 재매입하거나 당국에서 매입하여 문화유적지로 개발했으면 한다.

안체는 와가삼간으로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볼 수는 없었으나 좁고 비쩍 마른 툇마루와 댓돌을 보며 그 옛날 쩡쩡 울린 군수집안의 서슬 푸른 호령과 개구쟁이 귀공자 이호우 선생이 뛰놀았을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릴 적 일본순사와 다투었다는 안마당 한가운데를 흘렀다는 시냇물은 선생의 말대로 물꼬를 돌려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마당 한켠에 있었다는 별당 어디쯤에서 장지문을 열어 놓고 수를 놓고 있을 선생의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박옥금 시인이 어릴 적 깨금발로 감꽃 주우러 다녔다던 감나무도 그대로 있었다. 밑둥치에서부터 두 갈래로 뻗어나간 그 큰 감나무 밑에 가서 방금 돋아난 듯한 연초록 감잎을 만져보았다. 백년을 산다는 감나무는 그 밑둥치가 변색되고 각질이 드러났으나 윗가지는 태연히 막 속잎을 피우고 있었다. 곧 예전과 다름없이 감꽃이 떨어지고 감이 열리겠지만, 그 때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가고 없으니 새삼 인생 무상을 느낀다.

꽃과 풀과 나무만 남은 뜨락

감나무는 뒤뜰에 있었고 앞마당은 그대로 정원이었다. 매화나무, 석류, 박태기나무, 모과나무, 동백, 오동나무, 오갈피, 황장미 들이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익숙하 자세로 서 있었다. 가꾸지 않아도 모진 생명을 저버릴 수 없었음인가. 주인 없는 빈 정원을 나무끼리 의지하며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 이 나무들은 유난히 자신들을 잘 가꾸어 주던 옛 아기씨가 그리울 것이다. 나무는 가꾸는 이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였던가. 이영도 선생은 얼굴도 이쁘지만 손은 크고 거칠었다고 한다. 그것은 타고난 성품이 한시도 그냥 있지 못하고 푸나무를 가꾸고 집안살림을 손수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이 집을 떠나 시집간 대구와 홀로 되어 통영, 마산, 부산 서울 등지로 전전하면서도 가는 곳마다 화초와 나무들을 가꾸고 손바닥 뜨락을 가꾸었다. 여기 있는 이 나무들과 저 축담 밑으로 돌아가며 지천으로 피어나는 맥문동과 난초, 지초에서 이름없는 잡초까지 하나같이 선생이 손길이 닿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꽃 하나 풀 하나 예사로 보아지지 않았다.

내가 이호우 선생의 「살구꽃 피는 마을」이라는 시를 떠올리며 어째 이집에 살구나무가 하나도 없는가 하고 물었더니 이보기씨는 대답 대신 이호우 선생이 대구로 이사갈 때 좋은 나무들을 많이 파 옮겨 가져가 지금은 옛날에 비해 나무가 적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살구나무 종자를 얻어다 유천마을에 온통 살구나무를 심을 것이라 한다. 내가 여기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가고 물었더니 시비를 만들 즈음에는 많이 찾았으나 정작 시비를 세운 이후에는 뜸하다고 한다.

청초 우거진 쓸쓸한 산소

선생의 산소는 마을앞 비파강을 가로질러 차로 십 분도 못 가는 거리에 있는 야트막한 남산의 7부능선에 있었다.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바로 건너보이는 산이지만 행정구역상 생가는 경상북도, 산소는 경상남고로 엇갈리는 곳이다. 옛날 이곳에서 사람들이 대처로 나갈 때는 두 부류가 있었다. 잘사는 사람들은 대구 쪽으로 나갔고 못사는 사람들은 부산 쪽으로 많이 나갔다고 한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길이 잡초에 묻혀 있었다. 계곡은 물이 말라 있었고 옛날 논이었다는 계단식 평지에는 감나무가 심어져 있거나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옛날에는 이 논밭을 소작 부치며 막걸리를 지고 와 계곡에 발 담그고 새참을 먹었다는데 지금은 살기 나아졌는지 아무도 힘든 산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선생의 「산답」이라는 시는 아마도 여기를 두고 읊었을 것이다.

손 저을수록 높아만 가는/ 아득한 응답의 공간
한 뼘, 한 뼘 虛氣를 톺아/ 보리뙤기들 산을 오르네
은총은/ 오수에 졸고 / 봄하늘만 벌겋다(「山畓」전문)

조금 더 올라가니 밤나무가 자생하여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 산은 선산으로 이호우 선생의 후손들이 산소로 쓰고 있으나 거의 버려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르다가 내려다보니 경부선 철로가 눈 아래 보이고 그 너머 넓은 비파강이 보인다. 청도 쪽에서 내려오는 물과 산외면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수하여 비파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데 지금은 상류의 댐고사로 수량이 줄어 강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아름다운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 된 강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저 강이 밀양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가는데 그 옛날 저 물이 만수로 불었을 때, 이호우 선생의 '달밤'은 지향없이 남으로 흘러갔으리라.

이마에 돋는 땀을 훔치며 자꾸만 발을 낚아채는 풀더미를 헤치고 가시덤불에 옷자락을 찢기며 다다른 곳이 이영도 선생의 무덤이었다. 둥그런 묏등 하나에 상석 하나만 덩그마니 있을 뿐 아무런 안래표지가 없다. 사방에 솟은 소나무, 밤나무가 주변을 가려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묘를 썼을 때는 시야가 트여 있었을 텐데 세월의 횡포로 나무들이 저리 자라 앞을 가리고 서 있었다. 비석 없는 상석에는 한글로 "이영도의 묘"라는 표지와 그 옆면에 "사위 김리준 딸 박진아.. "등의 명문이 선명하였다. 그래도 무덤은 누군가가 벌초를 해놓았는데, 그가 누구이며 왜 선생는 출가외인이면서도 시집이 아닌 친정 선산에 묻혔을까 궁금했지만 이보기씨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아마도 선생의 남편이 결혼 8년만에 죽은 후 대구갑부라던 시댁이 시아버지의 방탕으로 망했고, 아들도 없는 선생은 딸 하나 데리고 붙잡지도 않는 시집을 제 발로 나와버린 것이리라.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그러니까 선생의 타계 5년 전인 1971년 본에 전북 익산의 가람선생 산소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 상석도 없는 묘소와 후손들이 생전 끼니를 염려할 정도의 가난을 보고 애석해 했던 선생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선생도 시조와 국문학에 일생을 바친 가라선생의 생애를 기리면서 그 먼 길을 참배하고 왔는데 그 참배하던 사람도 이제 죽어 한 줌 흙으로 여기 묻혔구나 생각하니 인생무상이 절로 느껴졌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누군가 먼 후대에 이 글을 읽는다면 그도 인생무상을 말하겠거니 생각하니 새삼 인생이 우스운 생각도 든다.

"나의 마지막 철은 오월이나 시월이었으면 한다. 장미꽃이 환히 필 무렵, 장미꽃으로 장식된 관속에 장미향기에 묻혀 떠나갈 종언의 날··· 국화꽃이 필 무렵, 국화향기에 싸여 떠나갈 나의 영구 ··· 흔히들 육신과 더불어 영혼도 없어진다고 허무해 하는 말들을 한다. 얼마나 신의 음성에 귀 막힌 알량한 인간지식의 보챔들이겠는가. 나의 영혼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화창한 오월이 오면 잠시 나들이 오듯 이슬이 촉촉한 초원의 풀잎에 쉬었다 가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도란도란 속삭이는 미닫이 밖에서 축복도 하여주고,··· "

이는 선생의 「어머니와 수의」라는 수필의 일부인데, 선생의 마지막 철은 오월도 시월도 아닌 3월이었다. 화장하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묻힌 육신이야 이미 썩고 없겠지만 선생이 그토록 믿었던 영혼불멸이 사실이라면 우리 산천초목은 그래도 선생의 은총으로 행복할 것이고, 낯선 인연이라마 묘소를 찾아온 우리에게도 좋은 시의 길로 인도하는 축복을 내려주리라 믿어본다.

선생의 묘에서 20여 미터 더 올라간 곳에 이호우 선생의 묘가 있었다. 그는 선생보다 6년 먼저 타계하였는데도 비석은커녕 상석조차 없었다. 같이 간 이보기씨가 일러주지 않았다면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옆자리에 붉은 묘가 있었는데 이호우 선생의 묘라고 한다. 밭흙을 써서 봉토가 붉은 색이었다. 부인은 이호우 선생보다 오래 살아 불과 3~4년전에 돌아가셨기에 한꺼번에 보수할 요량으로 그냥 두고 있다고 한다. 내려오니 산소 입구에는 무슨 절이 들어선다면서 길 닦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비파강에는 갈매기 두 쌍이 훨훨 어디론지 날아가고 있었다. 낙동강을 따라 북상한 갈매기가 예까지 나르고 강심에는 백로가 먹이를 찾고 있었다. 아직 강은 죽지 않았나 보다.

비둘기 내리는 뜨락

하산하여 그냥 발길 돌리지 못하고 붙드는 이보기씨의 집에 들러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 이 분이 집은 이영도 생가과 흙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허름한 가건물 같은 토담집이었으나 모란을 비롯하 갖가지 꽃들이 심어져 있고 조그만 연못이 있었다. 부인이 끓여내는 커피는 그 맛이 일품이었다. 마당에서 딴 포도로 만들었다는 포도주를 내와 한 잔씩 돌리고, 직접 만든 곳감을 맛보라고 내오셨다. 두분 다 독실한 기독교신자로서 이보기씨는 장로요, 부인은 권사로서 두 내외가 서로 아끼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가식 없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내가 농담으로 그 부인에게 이 선생님이 미남이시라 젊었을 때 애께나 먹이셨겠다고 했더니 " 이양반은 세상에 여자라고는 나밖에 없는 줄 알아요"라고 했다.

마당에 비둘기는 없었지먼 이 노부부를 보고 있노라니 선생이 「비둘기 내리는 뜨락」이라는 수필이 생각났다. 철쭉, 모란꽃, 작약, 채송화, 옥잠화, 금낭화··· 이 땅 어디에나 흔한 화초들을 아기자기 심어놓고 가난한 살림을 부자로 알며 사는 이분들이 바로 비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만 마당에 채소도 심어 뽑아먹고 이웃에 갈라주고 나무와 꽃들을 소중히 심고 조그만 일에도 기뻐하며 사는 모습은 우리가 늙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 성경을 직접 붓으로 한지에 써서 책 두 권을 만들어 한 권은 교회에 헌납하고 한 권은 보관하고 있었는데 작은 글씨로 정갈하게 한 자, 한 획 어긋남이 없이 그 많은 구약, 신약을 어떻게 다 필사를 하였는지 절로 감탄이 나왔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 이 따에서 범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맡아보는 사람냄새가 반갑고 고마웠다. 나올 때, "해마다 자두가 열릴 때는 꼭 누군가가 찾아올 것 같아 기다려진다"고 인사조로 하는 말이 가슴 뭉클하게 들렸다. 예사롭게 하는 말도 내가 듣기에 바로 시였다.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다가 정작 동백꽃은 못보고 막걸리집 아낙의 육자배기만 들었다는 미당의 시처럼 이영도 선생 생가에 가 그 분은 못 뵈었어도 그 흔적 같은 이보기씨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는 선생은 누님이라 부르며 따랐고 원래 자기 집은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사는 이 집도 원래는 이영도 생각의 한 울타리 내에 있었다며 여생을 누님집을 지키며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노을 타는 자갈밭을 돌아 나오며

여긴 내 신앙의 둥주리/ 낙동강 흥건한 유역//
노을 타는 갈밭을/ 철새 떼 하얗게 날고//
이 水天 헹구는 가슴엔/ 세레요한을 듣는다.

용서하자 용서하자/ 일곱 번이 일흔 번도//
넉넉히 푹을 열고/ 봄을 풀어 흐르는 강//
내 가슴/ 한 뼘 오기에도/ 물고 이제 터거라
(「흐름 속에서」제1수, 제4수)

꽃이 피면 지듯이 선생도 태어나 꽃처럼 한세상 살다 가셨으니 새삼 그 생과 사를 아쉬워함은 아니나 선생의 일생은 실로 시련의 연속이었고 여류시조의 물꼬를 틀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임에 대한 아쉬움이 큰 것이다. 선생의 유년은 필시 유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축첩으로 부정에 굶주렸고, 시집이라고 간 것이 병자시중만 들다가 남편 사별 후 여자 홀몸으로 세파를 견뎌나갔다. 그 후 열정적으로 다가온 청마와의 사랑도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로 가슴에 멍울만 더해갔다. 하나뿐인 딸자식마저 불행한 삶을 살다 (비록 선생 사후이지만)일찍 갔으니 선생의 생애는 시련과 불행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등을 돌릴 때에도 다만 시조와 문학만이 그를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벗이었고 지탱해준 힘이었다. 그래서 선생의 길에는 언제나 슬펌이 동행하고 있고 그 슬픔은 아프지만 아름답다. 세파의 흐름 속에서도 언제나 고향이 주는 원형을 잃지 않고 넉넉히 용서하고 응어리도 풀고 이제 그 신열을 다 보내고 하늘 향해 손 저으며 봄강을 따라 흐르겠다는 위의 시를 다시 되뇌어 보며 아쉽지만 짧은 탐방을 마치리고 하였다.

언젠가 허락된다면 선생의 일대기를 한 번 써 보고 싶다. 황진이 이후 이 땅이 낳은 최고의 여류시조 시인이자 현대시조의 맥을 이은 이호우 시인의 친누이로서 대시인 청마 유치환과의 20년에 걸친 애절한 러브스토리는 우리 문단에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아 있다. 선생의 일생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가진 자도 만나 보았으나, 내가 보기에 사랑과 문학과 인생에 있어 올곧은 자세로 일관하였고, 지 · 정 · 의(知情意)의 3박자를 고루 갖춘 규방신인으로서 매사에 성실하면서도 스스로 정한 법도를 지켜 한국의 여인상의 한 전범을 보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사표가 될 만 하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비파강변에서 참으로 귀하게도 꽃망울을 터뜨린 어린 오동나무를 볼 수 있었고, 남으로 내려올수록 해거름을 만나 올 때 보았던 복사꽃은 더욱 화사하고 신비로웠다. 사과꽃도 곳곳에서 하얗게 벌어 상큼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산 그림자 내리는 국도를 되짚어 내려오며 문득 차창 밖으로 올려다 본 하늘, 거기에는 이제 곧 지려는 마지먹 선량한 햇무리가 먼 종소리 같은 은은한 빛가루를 뿌려놓고 있었다. 오직 사랑하리라는 그 음성 들리는 듯, 아아, 모색(暮色)! 저것이 바로 선생이 말하는 '모색'일 것이라 생각하니 오늘 하루의 탐방을 비로소 선생이 감응하고 우리를 배웅해주는 것 같아 목젖이 울컥했다. 그리움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꽃이 벌 듯 안에서 피어오르는 것이라는 선생의 말을 실감하였다. 밀양 어름에서 이윤택 시인의 연극마을이라는 푯말을 비쳐준 것을 끝으로 해는 완전히 졌고, 나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어느덧 기분 좋은 피로가 눈꺼풀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 이글은 2001년 4월에 쓴 것이다. 그 후 나는 이영도 선생의 첫 사회생활터였던 통영과, 마지막 몰가(歿家)인 서울 서교동 집을 찾아가 보았다. 그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는 따로 써 두었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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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이름에 대하여/ 다담 李昌熙 李昌熙 05-15 3257
102 눈을 감고 가는 길 정채봉 05-19 3133
101 떠남과 만남 구본형 05-20 2948
100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김용택 05-21 3409
99 소나무처럼, 바다처럼 이해인 05-22 3093
98 사랑 열차 김수자 05-23 2947
97 맨손으로 일으킨 현대여류시조의 산맥 박구하 05-27 3243
96 고독과 마주하라 법상 스님 05-29 2932
95 비익조(比翼鳥) 정호승 05-30 2822
94 송충이 천국은 소나무 성철용 06-04 3046
93 네잎 클로버 이어령 06-10 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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