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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5-23 09:10
사랑 열차
 글쓴이 : 김수자
조회 : 2,876  

★ 사랑 열차 ★

   오늘은 다만 어제의 내일이 아니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어제만 해도 대단히 먼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과 마찬가지로 조금 전까지 우리 곁에 있었고 우리와 친숙하던 것들이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 중 하나가 교통 수단의 증가로 언제부턴가 우리에게서 멀어진 기차이다. 고속 도로가 생기기 전만 해도 좀 멀리 가는 모든 나들이는 기차를 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고속 도로가 생기고 난 후로는 고속 버스나 그밖의 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 기차를 타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지 않았는가 싶다.

   그렇지만 아무리 신속하고 편리한 다른 교통 수단이 있다 해도 안전한 기차편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도 때로 자가용이나 고속 버스로 봄 가을이나 피서철에는 여행을 하지만 실은 기차 여행에 대한 미련을 좀체 떨쳐버릴 수가 없다. 다만 기차 타고 여행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그날이 그날로 되풀이되는 주부들의 일상속에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마침 친구가 지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좋은 구실이 생겼다. 집들이 겸 축하를 해준다는 핑계로 친구들 몇몇이 길을 떠났다. 지금은 모두 40줄에 접어들었지만 동행한 친구들도 기차 여행의 낭만을 잊을 수 없었던지, 모처럼의 여행이니 이왕이면 기차로 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플랫폼은 애잔한 향수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사람이 많으면 많아서 설레이고 적으면 적은 대로 멋스러운, 그래서 묘한 감정을 일어나게 해주는 곳. 또한 플랫폼이란 영화를 통해서 더욱 멋스럽고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톨스토이 원작의 <안나 카레니나>의 라스트 신을 연상시켜서 내 소녀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검은 연길르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로 뛰어드는 여주인공의 뒷모습에 하얗게 덮이던 눈들이 그때 막 사춘기로 접어든 소녀의 마음 속에 퍽이나 로맨틱한 모습으로 새겨졌고, 그 후로 기차를 탈 때마다 내가 그 영화의 주인공인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했으니까.

   기차 여행은 마음을 느긋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고속 도로를 달리는 차들처럼 긴박감도 없고 속도의 가감에 따른 운전 부주의나 차선을 위반하다 생길 불행한 사태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 좋다. 정해진 시각에 출발하여 곧게 펼쳐진 선로 위를 절도 있게 달리는 차 안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차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는 기차 여행의 맛이란 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다.

   봄이 오고 있는 길목을 거슬러 달리고 있는 남행 열차는 금방 부화된 병아리처럼 보드랍고 노란 개나리가 줄지어 피어 있는 간이역을 지났다. 비탈진 바위 틈에 수줍은 듯 얼굴 붉힌 진달래의 분홍빛 순정이 곱게 타고 있는 산모퉁이를 돌아, 실실이 늘어진 천 가닥 만 가닥의 수양버들 어섬서리가 파랗게 물드는 강변을 끼고 기차는 달렸다. 투명하게 맑은 강물 위에 흰구름이 떠가고 산이 거꾸로 물구나무선 모습이 비치고 있는 위에 놓인 철교를 지나면서 저 멀리 널따랗게 펼쳐진 들판에서 평화롭게 일하고 있는 농부들에게 손을 흔들며 우리는 철없는 아이가 되었다.

   기차의 속도가 더해감에 따라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나들이 나온 아이 모양 마음이 부풀기 시작했다. 그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처음으로 기차를 타본 것은 아마도 세 살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때가 겨울이었던지 창가에 앉은 내가 입김을 호호 불어서 창문에 낀 성에를 녹여가며 창 밖 풍경을 내다보던 기억이 난다. 난생 처음 타보는 기차가 얼마나 빠르던지 길가의 전봇대가 모두 뒷걸음을 치며 뒤로 내빼는 통에 덩달아 내가 어지러워져서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묻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기차에 얽힌 추억은 운명의 지침을 바꾸어 놓은 남편과의 만남이다. 대학시절 한창 어수선했던 정세로 우리는 예정보다 일찍 여름 방학을 맞았다. 계획에도 없던 조기 방학을 맞은 나는 언니네 집에 다니러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그때 우연히 그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장난기 섞인 농담으로 주고받던 말이 긴 시간을 여행하는 동안 진지한 대화로 바뀌어 기차의 레일처럼 끝없는 긴긴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아직까지도 우리는 의견의 일치를 보는 일이 드물다는 것이다. 두 줄기 레일 사이의 간격만큼 되는 의견의 차이가 있어 늘 토닥토닥 다투기도 하는데, 그것이 기차 안에서 맺어진 인연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지만 우린 곧바로 뻗은 선로처럼 각기 자기의 분수을 지키기에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선로의 간격처럼 서로에게 간섭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관심한 관계도 아니다. 양보와 신뢰로서 가정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기차가 선로를 이탈하지 않고 안전하게 달리듯이, 우리 가정에도 그와 내가 선로의 두 줄이 되어 우리 아이들이 그 궤도 위를 마음놓고 달릴 수 있게 해야겠다. 그리하여 지금처럼 푸르름이 짙어가는 계절에 꽃향기를 안고 달리는 특급 열차에다 사랑과 꿈과 낭만을 싣고 모두에게 희망을 주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러면 이웃간에 미움이나 다툼이나 불신 같은 것도 털어질 것이다. 항상 평화가 깃들고 즐거움이 감도는 특급 열차는 명랑하고 즐거운 기차 여행을 원하는 사람이 있는 한 언제나 만원인 채 끝없이 달리고 있을 것이다. 

                     < 놓친열차보다 아름다운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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