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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5-21 09:21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글쓴이 : 김용택
조회 : 3,408  

◆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
김 용 택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는 여러 그루의 살구나무가 있다. 심은 지 10년 이쪽 저쪽이 된 여러 그루와 함께 커다란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큰 살구나는 아주 오래 전 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을 했을 때도 내 아름으로 한 아름이 넘었었다. 살구나무들이 봄에 꽃을 피우는 모습은 뜨거운 솥에서 강냉이가 톡톡 뒤밥이 되는 모습 같다. 파란 봄 하늘에 툭툭 터져 있는 살구나무 꽃은 아름답고 신기하다. 살구 꽃은 한꺼번에 피지 않고 가장자리에서부터 몇 송이씩 피는데, 수업을 한 시간 하고 보면 몇 송이가 피어 있고, 또 한 시간 끝나고 내다 보면 몇 송이가 더 피어 있다. 반면 작은 살구나무는 개살구들이어서 살구가 아주 양증맞은데, 살구가 노랗게 익어 있는 모양을 보면 정말 따서 가지고 다니며 보고 싶을 정도로 예쁘다. 작은 살구가 샛노랗게 익을 무렵은 딱새 새끼들이 날기 연습을 할 땐데, 딱새들이 살구가 환한 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는 풍경은 꿈속같이 아련하기만 하다.

나는 좀전에 큰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가 왔다. 이 나무에 살구꽃이 그 얼마나 환하게 피어났던가. 작은 학교 운동장 가에 핀 이 꽃나무 그늘에 앉아 나는 시를 쓴 적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여선생에게 살구꽃이 피었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나의 학교 생활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이 나무 아래 서면 나는 부끄러워 고개가 수구러지기도 한다.

살구나무에 꽃이 지고, 새 잎이 돋아나면 아주 작고 파란 살구가 열리기 시작한다. 살구가 조금씩 여물어가면 아이들이 나무 밑으로 서서히 몰려들어 살구를 노린다. 푸르딩딩한 살구가 익기도 전에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돌을 던지고, 나무막대기를 던진다. 나는 온갖 잔소리와 이런 저런 협박으로 겁을 주며 살구를 지키지만 살구가 온전히 지켜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환한 보름달이라도 뜨면 학교 아랫마을 아이들의 습격을 막을 힘이 나도, 살구나무도 없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살구가 주렁주렁 노랗게 익을 때를 기다려 6학년 아이들과 살구 타작을 했다. 살구나무 아래에 넓은 포장을 깔고 살구를 털어 모든 아이에게 나누어주었다. 어쩔 때는 어찌나 살구가 많이 열리던지, 한 반에 두 바구니나 세 바구니씩 열두 반을 다 나누어주고도 남아서 선생님들도 실컷 먹고 가져다가 술을 담기도 했다.

그랬던 그 살구나무가 언제부턴가 서서히 꽃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처음 살구꽃이 조금 피었을 때 나는 살구나무가 해갈이를 하는 줄 알았다. 모든 나무 열매는 해갈이를 한다. 올해 열매가 많이 열면 내년에는 적게 열면서 한해 동안 몸보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다음 해에도 살구꽃이 형편없이 적게 피었다. 나는 놀랐다. 그렇구나, 이 살구나무가 이제 늙었구나. 늙어서 나무가 점점 죽어가는구나. 그때야 나는 살구나무를 자세히 보았다. 살구나무 작은 가지가 많이 죽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내 아름으로 한 아름이 넘었으니까 지금 얼추 생각해도 이 살구나무를 보고 산 지가 50년이 넘었다. 그래, 그러면 이 살구나무 나이는 도대체 몇 살이나 될까. 살구나무의 수명이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학교가 생긴지 70년이 넘었으니, 얼추 살구나무 나이는 아흔 살쯤 되었을 것 같다.

사람들은 과학과 의학을 자랑하며 생명을 연장하며 자랑스러워한다. 유전자를 가지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기도 하고, 영원히 살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이든 식물이든 살 만큼 살고 자연스럽게 죽어야 한다고 믿는다. 생명을 몇 십 년 연장한다면 이 작은 지구의 생태계는 알게 모르게 교란될 것이 뻔하다. 한 사람의 생명을 몇 년 더 연장해서 그가 이룰 것이 무엇일까.

나무들은 평생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한 그루의 나무가 이루어내는 세계는 아름답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이루어지는 하루와 1년과 몇 십 년의 세월은 아름답다. 나무들은 언제 어디서 보아도 위대하고 성스럽다. 올해도 살구나무는 눈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꽃송이만 드문드문 피웠다가 졌다. 그 몇 송이 안되는 꽃이 살구가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다.

올해 초 그 살구나무 아래에 유치원 아이들의 놀이터를 만들었다. 작은 그네, 미끄럼틀, 정자와 그 외에도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울긋불긋한 놀이 기구들과 지긋하게 나이 먹은 살구나무와 유치원 아이들의 몸짓은 어울려 보인다. 살구나무는 그렇게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연초록 잎을 피우기도 하고 자기 그늘 아래 모여 놀고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보거나, 내가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는지 농땡이를 치는지 이따금 교실을 넘겨다보기도 한다. 내가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면 살구나무는 흐뭇해하고, 내가 어영부영하면 살구나무는 영 힘이 없어 보인다. 내가 입학해서 처음 만나고 나와 함께 평생을 살고 죽어가는 이 살구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슬퍼지기도 하고, 행복해지기도 하고, 쓸쓸해지기도 한다. 내 인생을, 내 일생을 생각하며 코끝이 찡해오기도 하는것이다. 평생을 한 그루 나무를 보며 살아온 내 삶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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