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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5-20 00:30
떠남과 만남
 글쓴이 : 구본형
조회 : 2,908  

★ 기차 안에서 ★
    기차는 늘 시간 속을 달린다


   오후의 해가 오른쪽 차창 밖에서 줄곧 기차를 따라온다. 커튼을 쳤지만 여전히 햇살은 강하다. 더워서 잠시 객실 사이 연결 통로로 나왔다.

   선로의 곡선을 지날 때마다 기차는 이음매를 삐걱거리며 몸을 조금씩 비튼다. 휙휙 지나가는 선로 바닥은 내가 떠나고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느끼게 한다. 기차를 철마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기차를 타면 씩씩거리는 가쁜 호흡을 느낄 수 있다.

    느긋한 여행자에게 기차가 달려가는 곳은 어떤 행선지가 아니다. 기차는 늘 시간 속을 달린다. 몇 년 전 어느 카페로 나를 데라고 가기도 하고, 느닷없이 어느 대화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또한 부끄러움 속으로 혹은 아련한 그리움 곁으로 데리고 간다. 그런가 하면 나의 장례식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옛날처럼 객실 사이 문을 열어놓은 채 발판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맛은 사라졌다. 선배 한 사람이 생각난다. 그가 발판에 서서 젊은 날의 고뇌에 빠져 있을 때, 앞에 서 있던 여인의 긴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그의 얼굴을 온통 뒤덮었단다. 빨랫비누 냄새가 났단다. 그는 고뇌를 씻는 데는 빨랫비누가 최고라며 그것처럼 깨끗한 냄새는 없다고 했다. 깨끗한 옷도 며칠 지나면 더러워지듯 그의 고뇌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지만, 한때나마 그때처럼 하얗게 세척된 적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직은 아무 계획도 없다. 행선지조차 없다. 표는 구례까지 끊었지만 순천까지 갈지도 모른다. 아니면 곡성쯤에서 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압록의 강변을 따라 걸을까? 아니, 한 정거장쯤 전인 남원에 내려도 안 될 건 없다. 공간적 자유, 그것은 아무데나 내려도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다. 계획도 목적지도 없다. 발길 닿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혹은 기억을 따라서 혹은 그저 기대를 따라서 간다. 혹은 꽃을 따라서 강물을 따라서 간다. 바람을 따라서 스스로 바람이 되어 그저 내가 한줄기 바람인 곳으로 간다. 전라남도 해안지역을 돌겠다는 생각은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른다. 마음이 끌렸을 뿐이다. 왜 마음이 이곳으로 끌렸는지는 알 수 없다. 꽃 때문이었을까? 매화와 산수유와 벚꽃 혹은 동백 때문에? 섬진강변부터 시작하자고 마음먹은 것은 분명 매화 때문이었다. 나무는 참을 수 없이 '간절하고 열렬해지면'꽃이 된다. 그래서 이 봄에 가장 먼저 뜨거워지는 매화로부터 시작하려는 것이다. 매화, 소극적 열정 혹은 별당아씨.

   세 번째 책『월드 클래스를 향하여』를 3월에 내고, 신문사 몇 군데와 안터뷰를 끝내고 서둘러 행장을 꾸려 떠나왔다. 원래 거의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스스로에게 10년에 한 달씩 휴가를 주었다. 20년 간 회사를 다녔으니 두 달의 휴가는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이 휴가를 새로운 시작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기획했다. 벌써 보름이 훌쩍 지나버렸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두 번째 인생은 절대로 바쁘게 보내지 않을 것이다. 첫째,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오직 나만이 나에게 명령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줄 것이다. 둘째, 더 많이 배울 것이다. 때로는 진지하고 때로는 진지함을 버릴 것이다. 셋째, 배운 것을 통해 기여할 것이다. 주제넘지 말 일이다. 내가 만족한 나의 삶만이 이 땅에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생략할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다.

   단언하건데, 비효율적으로 한 달 반을 보내게 될 것이다. 쓴 만큼 못 얻는다는 것이 비효율의 정의다. 일주일에 다섯 군데밖에 구경하지 못했다면, 같은 시간에 열 군데를 둘러보 ㄴ사람에 비해 얼간이 같은 짓을 했다는 뜻이다. 나는 얼간이가 될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인생이다. 산다는 것이 바로 목적이다. 인생이 전부 경제와 경영일 수는 없다. 사랑도 해야 하고 눈물도 흘려야 한다. 순수한 배움 자체는 즐거운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이 중요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활동적이다. 철저하게 혼자 있을 때 가장 고독하지 않다. 이제 물리적으로 갈 수 없는 지리적 오지란 별로 없다. 마음속의 오지가 더 넓다. 나는 나와 함께 있을,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운 비밀스러운 공간을 찾아간다. 나를 위해 아낌없이 시간을 쓸 예정이다. 햇빛이 들과 밭에 내리듯이. 산과 강과 바다에 쾅쾅 쏟아지듯이. 거기에 무슨 효율이 있는가?

   햇빛이 맑으면 걸을 것이다. 그곳이 어디라도 좋다. 마음이 가면 내 발도 따라갈 것이다. 비가 오면 뒷골목 허름한 술집에서 비를 보며 앉아 있을 것이고, 그것도 싫으면 초라한 객지 여관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한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나에게 장대하고 아름다운 꿈이 있는지 물어볼 것이고,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더 이상 묻지 않고 기다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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