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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8-20 02:08
신의 얼굴
 글쓴이 : 정건섭
조회 : 4,017  
신의 얼굴


초겨울 저녁 햇살이 힘에 겨운 듯 지하도 계단에 걸치고 앉아 있다.
온기도 없는 햇살이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듯했다. 그나마 어둠에 밀려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더 아래의 계단은 그늘에 묻혀 흔적을 잃어가고 있었고, 마치 자궁처럼 널찍한 보도에는 딸깍이는 금속성 구두 발자국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릴 뿐 적막만이 무섭게 흐르고 있었다.
더 안쪽 지하도 구석에 라면상자를 뜯어 바닥에 깔고, 낡은 점퍼로 몸을 감 산 한 사내가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눈동자는 대상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표정은 방금 떠다놓은 석고처럼 표정이 없다.
핏기 하나 없는 피로한 모습이 더 없이 쓸쓸해 보였다.
씽- 겨울바람이 지하도 터널을 회오리쳐 불 때서야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윈 팔뚝을 파르르 떨어댔다.
며칠이나 감지 않았는지 머릿결은 때에 절어 갈기갈기 곤두 서 있고, 점퍼의 소매 끝에는 먹다가 흘린 라면 국물이 잔뜩 말라붙어 있었다.
그가 머리를 들어 흘깃 옆을 본다. 언제 나타났는지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턱수염이 까칠까칠한 사내 하나가 헌 담요를 펼쳐놓고 그 위에 같은 모습으로 잔뜩 웅크리고 앉았다.
잠시 후, 그 사내가 허리춤에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이빨로 뚜껑을 여는지 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내는 안주도 없는 깡 소주를 입에 물고 벌컥 이며 마셔댔다. 몇 모금 그렇게 들이키던 사내가 불쑥 손을 내밀어 술병을 처음의 사내에게 내 밀었다.
사내가 그 술병을 바라보더니 손으로 밀어 되돌려 보냈다.
“난 술을 마시지 않소!” 술병을 든 사내도 별다른 감정 없이 손을 다시 거뒀고 손에 든 술병을 입에 물었다.
카-악. 지독한 알코올이 목에 걸리는지 그는 진저리치며 괴성을 질렀다. 깡 소주를 마신 사내는 이제 곧 쓰러져 잠이 들 것이다. 그가 옆에 자리잡을 때부터 술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그것은 이미 술에 취해 이곳으로 흘러 들어왔다는 증거다.
사내는 열 달간의 이런 생활로 누가 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훈련이 되어 있었다. 널찍한 이마와 제법 날이 선 코, 단정한 얼굴 힘은 없지만 윤곽이 멋있는 두 눈은 그의 기품을 잘 증명하고 있었다.
“옘병할”
그의 대상도 없이 고정된 시선처럼, 입에서 대상 없는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다. 그 욕지거리는 대상 없는 푸념이 아니다. 비록 차가운 지하도 허공으로 쏟아 부은 욕설이지만 그 대상은 분명히 있었다.
“날 버린 게 분명해! 당신은 날 버렸어. 당신도 이젠 너무 늙어버렸어, 그렇게 따르고 사랑하고 몸바쳐 사랑했는데----옘병할, 그런 나를 이렇게 헌 신짝 버리듯 버리다니, 이젠 당신도 죽을 때가 되었거나 노망이든 것이 분명해! 얼어죽을---”
사내는 무릎을 고추 세우고 그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휴- 하는 한숨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가 한 번 크게 들썩였다. 회한과 고통에 찬 신음이다.
그가 저주를 퍼부은 대상은 그가 믿고 추앙하던 지신의 신(神)이다.
“속았어! 나는 철저히 속았어,. 그것도30년이나. 으- 흐흐흐----”
마침내 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그의 삶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울음이 아니라 자결을 해도 시원치 않을 그런 분노가 가슴에서 끓어올랐지만 ,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분노마저 일으킬 힘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그는 이곳 대전근교에 까지 흘러 들어왔다. 그의 심장 깊은 곳에서 타오르고 있는 복수와 분노의 불꽃을 꺼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아내와 친구를 살해하기로 했다. 신이 자신을 버린 이상, 이제 더 이상 신의 계율 따위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죽여 버릴 꺼야.”
그는 자신과 지신의 신을 향해 결의를 다지듯 또 한마디 내뱉었다.

동호가 대학동창을 다시 만난 것은 1년 전 그가 다니던 교회에서였다. 사업가로 성공했다는 그 친구는 동호의 20년 공직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아직도 공직생활이냐며 함께 사업을 하자고 했다. 5억만 투자하면 월 2 천만 원의 고정 수입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다.
중국에의 수출만도 년 200 억이 넘는다고 했다. 자신이 생산하는 제품의 일부를 받아 수출하라는 것이다. 판로도 대금도 모두 자신이 맡아 줄 테니 형식적인 보증금 5억 만 입금시키라고 했다. 청주의 그의 공장도 둘러보았다.
같은 교회의 장로 아들이기도 한 이 사업가 친구의 권유로 동호는 공직에서 물러나 퇴직금과 집을 담보로 돈을 장만하여 작은 사무실까지 얻었다.
개업식을 하던 날, 목사님은 수려하고도 유창한 목소리로 축복기도를 해 주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사업체가 융성하게 하여 주시 옵고 물질의 축복을 더하여 주셔서 날로 번성하는 회사가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30 년 간 월급에서 한 번도 빼지 않고 십일조를 바쳤고, 주일을 한 번도 집에서 보낸 일이 없었다. 이 사업도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물질의 축복이이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는 목사님의 축복기도를 한 치 의심 없이 믿었다.
이런 간절한 기도를 30 년 간 믿고 따른 자신의 신이 외면할 이유가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에 손톱만 한 의심도 없었다.
그 사업하는 친구의 권유로 난생 처음 중국을 여행하고 보름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귀국하여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참담한 배신 뿐 이었다.
친구의 청주 공장은 이미 부도로 넘어갔고, 자신의 담보금은 아내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내와 친구의 치밀한 음모였다는 것이 밝혀지던 날 그의 집은 은행 담보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대학 다니던 딸마저 반미치광이가 되어 그의 곁에서 사라져 버렸고 그는 IMF로 빈 털털이가 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라면 박스에 몸을 의지한 채 지하도를 떠돌게 되었다.

신은 자신의 믿음과 헌신적 사랑과 신앙을 짓밟아 버렸다고 믿고 있었다. 30 년 간을 하루같이 무릎 꿇고 기도하며 재산을 바친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아도 그는 즐겁게 생각했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할 때의 축복 기도도 철석같이 믿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사업을 시작할 때도 헌금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도 신은 아무 이유도 해명도 없이 파멸시키고 말았다.
폐인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용케도 목숨을 버리지 않았다.
친구와 아내에 대한 복수 때문이며, 그 살의는 신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 대전 근교 어딘가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동호는 청계천에서 작은 손도끼 하나를 구입하여 그의 증오와 함께 가슴 깊이 묻어두고 이곳까지 흘러왔다. 그들을 찾기만 하면 이 도끼로 찍어 그들의 피를 신에게 보내겠다고 맹세했다.
배신한 인간에게는 죽음을, 배신한 신에게는 그 피를----.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며, 방향도 무게도 촉감도 없는 곳,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고, 없는 듯 하면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 끝없이 먼 곳에 있으면서도 손을 내밀면 금세 그 따듯함을 느끼게 하는 것.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으며 또 아무데도 없는 그런 존재. 한없이 가볍고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그런 존재! 신(神)은 그런 곳에 그렇게 머물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있고 누구에게도 없는 그런 존재이지만 신은 이동호 라는 사내의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비통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신은 이동호 에게 수없이 말해 주었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의 음성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듣고자 하는 자에게는 들리고, 듣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이 신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고도 안타깝게 이동호는 신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신과 영혼과의 통로가 분노로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은 쉬지 않고 설명했다.
바늘구멍 만한 통로라도 뚫리면 자신의 음성이 들리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음성은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살고 있는 모두를 향해 외쳐대고 있었다.
“인간들이여, 나는 나를 명쾌히 알릴 방법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노라. 내가 인간 너희들을 창조하여 너희들 심장에 영혼을 불어넣어 주었을 때 나는 이제 내가 간섭하지 않더라도 너희들 스스로 현명하게 살아갈 것으로 믿었었다. 너희들이 너희들 자식에게 유전인자를 물려주듯 나는 너희들에게 이미 처음부터 신성(神性)을 남겨 주었었다. 나는 너희들을 너희들이 키우는 가축과는 다르게 만들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적당히 즐기고 그리고 행복한 일생을 살아가도록 만들었어! 옳고 그름을 알게 했고, 무엇이 네 영혼을 맑게 하는지를 말하지 않더라도 알게 만들었어. 옳고 그름을 알게 했고, 무엇이 네 영혼을 맑게 하는지를 말하지 않더라도 알게 만들었어 나는 너희들에게 불씨 같은 영혼을 넣어 주었어. 그러면 너희들은 그 불씨를 잘 살려 나, 신에 가까운 영혼으로 만들 줄 알았지.----그게 내 실수였어. 자율적으로 살도록 설계했는데 너희들이 방종한 거야. 너희들은 지나치게 물질에 집착하고 지나치게 쾌락만 쫓다보니 어느새 영혼이 말라버렸어. 그래서 서로 불행을 불러오는 거야. 너희들은 내게 기도만 하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으로 아는데 그건 너희들의 자의적인 해석이야.----- 불쌍한 인간들아, 내 호소를 잘 들어라, 나는 아까도 말했지만 너희들을 가축처럼 만들지 않았어. 먹을 것 주고 , 내 말 잘 듣게 만드는 그런 가축이 아니란 말이야. 너희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을 너희들에게 부여했어. 그래서 나는 절대 인간들 일에 간섭치 않아.
너희들이 재산을 달란다고 주고, 승리를 원한다고 승리를 주지는 않아. 솔직히 말하지, 난 인간 너희들 일에 일체 간섭하지 않아. 나를 향해 아무리 기도해도 나는 너희들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 너희들 일은 너희들 스스로 헤쳐가라는 뜻이야. 삶은 때때로 너희들을 아프게도 만들지. 하지만 행복이나 불행은 계속되지 않아. 최소한의 굴곡을 만들어 놓았지. 잘 나갈 때 교만하지 말고, 불행이 왔을 때 좌절하지 말라는 게야. 우주가 멈추어 있는 듯 하지만 실상은 늘 움직이는 이치와 똑같아. 늘 움직이지, 인생사 다 움직이는 게야.
나는 너희들이 너희들 스스로 터득해 나가는 지식과 교양을 통하여 너희들 영혼이 커 가도록 만들었어. 그런데 요즈음 너희들에게는 영혼이 별로 보이지 않아. 너무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기 때문이지 영혼은 네 힘만으로 크는 것이 아니야. 네 자신과 네 이웃을 통해 크는 게야. 이웃을 볼 줄 모르면 영혼은 성장하지 않아.
옛날 어떤 수도사들은 나를 기쁘게 하겠다며 평생 면벽(面壁)만 하면서 일생을 헛되게 보냈어! 그건 잘 못 생각한 게야. 세상은 살아가면서 나를 느끼는 것이지.
답답한 인간들아, 나는 돈이 필요 없는 존재야. 내게 수십 억을 헌금한다고 해도 너희들 영혼이 맑지 않으면 나를 느낄 수 없어. 또 그런 사람들은 사랑하지도 않아. 그런데 왜 영혼이 맑아야 하느냐고? 그건 가치의문제야. 적어도 가축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이지------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어. 그것이 물질에 대한 욕심이야. 그건 짐승들이나 하는 짓이지. 영혼이 흐려지면 그렇게 돼!
그럼 그 가치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살아서 잘 쓰고 신나게 즐기면 됐지 영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글세,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일까?---천당? 지옥? 그건 사실 은유법에 지나지 않아. 은유. 비유법!
영혼이 맑은 사람은 죽어서 신이 될 수도 있어.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가치>야. 적어도 인간이라면 가축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하지 않겠어? 영혼의 무게 말이야.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부심이라 할까?
죽은 뒤의 일은 생각하지 마. 그건 인간의 몫이 아니니까.
영혼이 뭐냐고? 그래 여태 말하지 않았니. <인간의 가치> <인간의 프라이드>라고.
그 존엄성을 잃지 말라고 나는 너희들에게 애걸하다시피 말했어. 어떤 환경에서라도 말이야.---- 나는 아프리카에서 불행하게 태어나 불행하게 죽은 많은 영혼들을 알고 있지. 태어나자마자 에이즈에 걸려 죽거나 굶어 죽은 어린 아기들 말이야.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 그래서 나는 그들의 영혼을 보살피고 있어. 그 고통만큼의 축복을 주지.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지 못해.
-------자. 이동호. 나는 네가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다. 네 영혼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분투했는지도 안다. 하지만 이번의 좌절과 고통으로 쓰러지지는 마라. 너는 반드시 이 시련을 극복할 것이다.
네 안의 신, 네 영혼을 통하여 방법을 모색하면 반드시 현명한 방법이 떠오를 것이다. 나는 너를 믿는다. 마치 네가 옛날에 나를 믿듯 말이야.
교회에 다니는 것은 좋아, 연약한 인간이 영혼을 붙드는 방법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병 고쳐주겠다느니, 돈을 벌게 축복해 준다든지 종말이 온다느니 하는 말에는 속지 마! 한번 더 말하지만 교회는 영혼이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방법은 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인간 일에는 직접 간섭하지 않아. 스스로 영혼의병을 고칠 수 있도록 태초에 이미 신성(神性)은 너희들에게 주었으니까.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겠지?
용서하는 거야.
먼저 네 자신을 용서하고 네 적을 용서하는 거야. 너와 네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바로 나, 신을 사랑하는 방법이지. 나, 신은 네게도 있고 네 이웃에게도 있어. 그래서 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고 가르친 게야.
네가 너와 네 이웃을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지. 그래야 네 존엄성이 살아나. 알겠지? 그만 일어나. 할 일이 있을 거야 .

시간이 흐를수록 지하도의 적막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이날 따라 왕래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옛날 같으면 빨간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에서 예배 볼 시간이다.
‘움찔’ 동호의 몸이 한 번 크게 흔들리더니 부르르 몸을 떨었다. 뼈 속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 때문이다.
그는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차가운 금속성 촉감이 전류처럼 온 몸을 휘감았다. 작은 손도끼의 날이 그를 전율에 떨게 했다.
그 날은 윙윙대며 복수를 재촉하고 있었다.
“찾아 찾으란 말이야, 피가 거꾸로 치솟는 분노를 잠재우는 일은 복수 뿐이야. 네 재산을, 사랑하던 아내와 친구가 가로채어 함께 도망쳤어. 난 피 맛을 보고 싶어, 통쾌하게 복수하고 싶단 말이야. 무너지지 마, 여기서 무너지면 넌 패배자가 되는 게야. 두 번씩 패배할 거야?”
“으-음”
동호는 이를 악물었다. 나머지 기력을 다 하여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어디 있는지 알아야 복수를 하지!”
그 절망은 아무리 복수를 다짐한다고 해도 방법이 없는 벽이었다. 찾아 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그들이 대전 근교에서 생활하고 있더라는 귀띔은 해 주었지만 더 이상 찾을 방법이 없었다. 절망감에 싸인 채 새우등으로 앉아 있던 그가 깜빡 잠이 들었다. 잠시나마 추위와 절망감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에게는 이렇게 죽은 듯 잠에 취해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는 시간만이 그가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래서 잠든 그의 모습은 언제나 평화롭게 보인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보게---이보게--”
누군가가 그를 깊은 잠에서 흔들어 깨웠다. 동호는 귀찮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자신의 단 잠을 깨울 사람이 없다.
“누---누구---시죠?”
“자네가 이동호가 맞나?”
그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서야 소스라쳐 놀라 깨어났다. 그리고 잠을 방해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검은 색 두루마기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70대 초반의 노인인데 얼굴은 흰 수염으로 가득 했고, 그 수염은 지하도 복도를 타고 흐르는 바람으로 무성히 흩날리고 있었다. 무척 낯익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도저히 기억에 떠오르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기품이 있어 보이는 그런 노인이다.
“절 --절 찾으시나요? 제가 이동호---”
“으음, 자네가 이동호 라면 잘 찾은 셈이군. 자네가 자네 친구와 부인을 찾아다닌다는 그 동호가 맞지?”
“네--네. 그렇습니다만--- 노인장께서는 뉘신지. 또 절 어떻게 알고 찾아 오셨는지--”
“내가 누구인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니까.”
“절 찾으시는 용건은--”
“알고 있지. 자네가 찾는 사람들을. 그들이 어디 있는지, 지금 이 시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그래서 찾아 온 게야. 어떤가 찾아서 복수하겠다면 내가 알려주지. 어쩔 텐가.”
“네? 그--그게 정말이십니까. 어떻게 그들이 있는 곳을--”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 시간이 없어. 날이 밝으면 복수하기 힘들 테니까. 따라 오겠나?”
“가겠습니다. 가고 말고요. 지금까지 이 시간만을 위해 목숨을 지켜 왔는데요.”
“후회하지는 않겠지?”
“후회라뇨, 복수, 복수 하나에만 의지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요. 그 녀석들이 어디 있는지 아시면 당장 알려 주십시오.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습니다.”
노인은 손으로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무척 낯이 익어 보이는 노인의 얼굴은 매우 인자해 보였고 대화는 조심스러웠다.
“좋아 그럼 날 따라와!”
노인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루마기 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휘적, 휘적 걷기 시작했다.
지하도를 벗어나자 텅 빈 거리로 택시 몇 대가 씽씽 대며 달리고 있었다.
그 거리를 가로질러 50여 미터를 걷자 얕은 야산 하나가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노인은 그 야산에 익숙한 듯 좁은 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그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야산은 깊은 적막에 묻혀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와 채 떨어지지 못한 낙엽들이 초겨울 바람에 스산히 날리고 있었다.
동호는 이마의 땀을 훔쳐가며 숨가쁘게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산길을 추어 오르면서도 동호는 계속해서 품속의 도끼를 확인했다.
마침내 하늘의 도움으로 복수의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이다.
윙-윙!
좀 더 높은 곳으로 오르자 이번에는 바람이 고막이라도 찢을 것처럼 세차게 불어댔다. 그리고 30 여분을 더 올랐다.
“저기야!”
노인이 지팡이로 어둠 속의 숲을 가리켰다. 멀리 통나무로 지은, 작지만 화려한 별장 하나가 보였다.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의 창문에서 선정적인 붉은 전등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서 창문을 들여다 봐! 복수하겠다면 말리지 않겠어. ----자, 가보라고. 시간이 없어. 나도 곧 가야하니까.”
노인이 동호의 등을 밀었다.
노인의 표정은 없었다. 불안하다던가, 같이 증오한다던가, 아니면 통쾌하다는 표정마저 보이지 않았다.
동호는 품속에서 도끼를 꺼냈다. 그리고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유리문을 들여다보았다.
"흑!“
그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았다. 벽난로에는 장작불이 이글대며 타오르고 있었고, 둥근 식탁엔 양주병과 안주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침대 위에는 아내와 친구가 알몸으로 뒤엉켜 잠을 자고 있었다.
동호는 다리가 후들거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뭐 해, 뛰어들지 않고.!”
노인의 재촉이 없었다면 그는 그렇게 서 있다가 심장 마비로 먼저 세상을 떠 버렸을 것이다.
노인의 목소리가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는 도끼로 유리창을 깨뜨리며 뛰어 들었다.
“이 죽일 놈들아!”
그는 고함을 지르며 별장으로 뛰어들었고 뛰어들기가 무섭게 그들을 향해 도끼로 내리찍었다.
그들은 피할 사이도,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피투성이가 되었다.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잃으면 그것으로 죄 값은 치러지는 법이며, 죽은 사체를 모욕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동호에게는 그런 암묵적 계약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친구와 남편을 배신한 그들이다. 돈 한 푼 남기지 않고 털어 갔다. 딸아이는 집을 뛰쳐 나간 후 소식 한 통 없다.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이해하랴. 죽은 시체지만 이들에게 존엄성을 지켜야 할 이유는 없다.
동호는 시체들을 향해 찍고 또 찍었다. 죽어버린 시체보다도 더 벌건 피를 뒤집어썼지만 그는 그래도 쉬지 않고 찍었다.
그렇게 미친 듯 도끼질을 하던 그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사라진 것이다. 도끼에 살해된 아내도 친구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온 몸을 붉게 물들였던 핏자국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텅 빈 침대를 정신 없이 도끼로 찍고 있었다.
“허허허---.
뒤에서 노인의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이곳으로 데려 온 그 노인의 웃음소리다. 동호는 경악하고 있었다. 허공을 맴돌다 사라진 음향처럼 .
동호는 자신이 누구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찍었고 누구를 살해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요,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먼저 자네에게 묻고 싶네.”
노인이 뒷짐을 짚으며 동호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여전히 인자하고도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넨 그 도끼로 무엇을 찍고 있었나!”
“아내와 친구였습니다. 나를 배신하고 내 돈을 가로 챈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아니!”
노인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자넨 착각하고 있었지. 자넨 자네 친구와 아내를 찍은 게 아니었어. 너의 분노, 너의 증오, 너의 살의, 그런 걸 찍어대고 있었던 게야. 그러니까, 너는 네 자신을 도끼로 찍어댄 것이었지. ------피를 흘리며 죽어간 것은 네 친구나 아내가 아니라 ,네 영혼 속에 머물던 증오, 분노, 배신들이었어.---그러니까 너는 네 자신을 살해한 셈이 된 게야. 생각 해 봐. 이제 네가 죽었는데 더 무엇이 남았겠나. 네 가슴을 불태우던 증오가 너와 함께 죽어버렸어.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젠 복수가 끝났지? 그러니 이 시간부터 새 출발하게. 네게 가장 소중한 것은 네 자신이야. 자. 떠나게. 과거는 다 잊어버려. 그래야 네 삶을 찾을 수 있지. 자-나도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다 되었네. 내가 떠나면 지금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게.”
노인의 모습이 시야에서 흐릿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할아버지!”
동호는 사라져 가는 노인을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그리고 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뛰던 그가 웅덩이에 빠졌다.
“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지하도 냉랭한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의식을 회복했다.
이마가 뜨거웠다. 손으로 훔쳐보니 끈적이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정신을 잃은 채 넋없이 앉아 있었다. 꿈은 아니다. 그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렇다고 현실도 아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그 노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꼭 본 기억이 있는 그런 낯익은 얼굴. 그러나 도저히 누군지 알 수 없는 노인. 아내와 친구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을 죽인 것이라던 노인과 그 말을. 그리고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그 뜻을 곰곰이 짚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지하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붉은 작업복을 입은 몇몇의 환경 미화원들이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이마에 피를 흘리는 동호를 목격했고, 그를 청소차에 실어 인근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 주었다.
그리고 동호의 뼈아픈 사연을 듣게 되었다.
동호보다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미화원이 손을 잡아주었다.
“ 절망하지 마시오. 당신이 내 경우였다면 아마 당신은 자살하고 말았을 거요. 난 더 비참한 일을 겪었죠. 하지만 이렇게 용기를 잃지 않고 삽니다.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새 출발하세요. 인생은 아직도 살만 한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요. 치료비는 우리가 책임 질 테니 어서 일어나 재기하시구려. 지난 일은 다 잊고.”

그로부터 30 년이 지난 어느 날.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월드 그룹’ 총수가 대전 근교를 찾았다. 수행원만도 20 명이 넘었다.
그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그 이상한 일을 겪었던 지하도를 찾고 있었다.
지하도는 사라지고 아담한 주택들이 들어 차 있는데 공원이 된 바로 그 자리엔 지난 밤 쏟아 진 빗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동호는 한없는 상념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무심코 그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앗!”
물웅덩이를 들여다보던 동호가 경악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물 속에 비쳐진 얼굴. 흰 수염이 나부끼는 그 인자한 얼굴. 환상 속에서 보았던 노인의 얼굴.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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