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회 기본 > 시조평론 > 자연의 이법과 호흡하는 공감미학/ 최선옥

"나이가 들면서 말수가 적어 부끄러움을 사지 않도록 단형시조(단시조)를 즐겨 쓰고 있다. 언제나 말수가 많을 때는 그만큼 담아 둘 내용이나 즐거움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자서에서 밝혔듯 요즘의 시는 점점 산문화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시 속에 담고자 하는 내용이 많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을 여과 없이 모조리 쏟아놓으려는 과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다.

글이 길어진다는 것을 무조건 시적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어패가 있다. 그 안에 얼마만큼 시적 요소를 담고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다만 산문화된 시에서의 운율적 요소의 미달은 자칫 시적 감흥을 떨어뜨린다는 우려감 때문일 것이다.

시적요소를 갖추기 위한 조건에서 보통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행과 연만 나누면 무조건 시가 된다는 점이다. 애초에 산문화된 시를 쓸 의도가 아니라면, 또한 산문시를 쓴다 하더라도 시적 상황을 표현하는 데 있어 적절한 운율적 요소를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시적 형태에 익숙해있던 터라 시조의 율격이라든가 미학적 요소에는 생소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시조도 시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으며, 시적 미학의 측면에서의 접근 또한 용이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시조는 운율을 어떤 형태로 갖추고 있을까. 달리 말하면 행의 길이를 어떻게 배치해야 바람직한가에 대한 궁금증을 안게 된다.

운율은 시에서의 억양이나 강세, 리듬 등을 포괄해 수사학적, 미학적 효과를 가져오는 시적 장치다. 운율은 높이와 크기와 길이에 의해 결정되는데 보편적으로 우리는 높이나 크기보다는 길이에 익숙해있다.

일반적으로 시적 운율은 리듬을 가리키지만 운율은 운(rhyme)과 율(meter)을 말한다. 그러므로 운율이라 함은 율격만을 말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주로 율격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순수음절 율격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음수율 3.4(4.4)조인데 현재에는 이에 매이기보다는 좀 더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조에서 운율을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시조)를 시답게 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운율이다. 운율이 필요한 이유는 시적 통일성과 연속성과 동일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그렇다고 엄격한 형식에만 사로잡혀 시적 자유로움에서 멀어지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운율에 대한 관심이 현대시 창작에 그만의 멋과 맛을 획득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요즘 시단은 운율에서 매우 자유로워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운율적 요소를 다분히 갖추고 있다. 다만 시조에서는 보다 엄격히 이것을 지키고 있음이다.

많은 말을 숨기고 긴 호흡을 다듬어 길이는 짧지만 여운은 길게 남는 김준 시인의 시조집 『고향에서 마신 술』은 행마다 운율을 철저히 지킨 시적 선명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조의 운율에 시적 이미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현란한 이미지, 혹은 과잉된 수사학적 장식이 아닌 초장과 중장과 종장 속에 고인 시적 이미지가 시적 시선과 시적 여운을 확 잡아끌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과하면 시적 진실을 왜곡하는 반면 절제되고 제어된 이미지는 시적 본질에 보다 가깝게 해준다. 그러나 절제된 이미지라 하여 무겁거나 엄숙하거나 과묵한 시적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시에 적당한 생기를 불어넣고 있음이다. 이는 시적 언어가 무겁지도, 그렇다고 경박하지도 않으면서 시적 여운과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음이다.

사군자의 하나인 '매화'는 봄을 가장 먼저 알린다. 아직 매운 추위가 가시지 않은 찬바람 속에서 피어난 매화는 시적 의미면에서 비중이 크다.

꽃을 피운 것은 말씀으로 기쁨을 편 것이고, 그 매화가 시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와 '경이로운/큰 뜻을 보이신다'고 시인은 말한다. 자연을 바라보고 거기에 의미를 불어넣는 시적 의식은 시인의 농도 짙은 사유와 사색에서 연유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매화가 피어난 시각적 이미지를 '말씀'으로 전환한 것은 청각이미지의 동원이라 할 수 있다.

'봄날'과 '아침'은 시작을 의미한다. 계절이나 하루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인생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함께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예시에서 보듯 시작이라는 의미에 너무 많은 무게를 싣기보다는 절제된 이미지로 한층 몸을 가볍게 한다는 시적 특징을 잡아낼 수 있다.

그렇기에 시「봄날의 삽화」,「아침 한 때」는 일상을 풍경화하거나 삶의 단면을 자연을 빌어 그림 그리듯 가볍게 묘사하고 있다.

노란 '개나리'가 핀 모습을 '세상을 경이롭게/금박으로 시를 쓴다'는 표현은 시적이미지를 보다 고차원적으로 끌어올린다. 또한 '경이롭다'라고 한 것도 봄의 화사한 이미지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시선이다.

봄은 소생의 계절이다. '겨우내 오지 않던/낯선 참새 한 마리'가 '아침'에 보인다. 참새가 낯설다고 한 것은 미루어 짐작컨대 봄은 새로운 것과도 스스럼없이 섞이고 동화하는, 그래서 설렘으로 시작하는 계절임을 표현한 것인 듯싶다. 또한 '아침을 몰고 와서/햇살을 굴'린다든지, '포르르 날아'오른다는 시적 이미지가 봄날아침을 여는 경쾌함으로 전달된다.

'유달산 진달래가/온 산에 불을 질'렀다는 것과 진달래를 보러 감을 '불을 끄러 오라'고 하는 시적표현은 이미지와 비유가 적절히 섞인 시적미학의 충만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적 이미지는 시편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갑자기 눈이 오는 것을 '하늘이 뜬금없이/보따리를 풀어 놓'는다고 한다. 시각적 이미지의 하얀 눈이 '하이얀 종소리'로 청각화 되며 눈은 '순결'의 의미로 재탄생된다. 그리고 눈 덮여 고요하고 '적막'하기까지 한 풍경이지만 '눈부시다'는 긍정의 시각도 담는다.

'노을'은 황혼의 꽃이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 잠시 황홀하게 피었다가 지는, '머물지 못해/고대 지는'. 노을을 '낙화'로 보는 시각은 황혼기를 처연히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적시각이 아닐까 싶다.

'겨울'은 침묵의 계절이다. 생의 의미로 본다면 죽음이다. 그렇기에 '상복'으로 갈아입는 것일까. 죽음 앞에서의 허무내지는 '허탈'의 심정을 '겨울나무'를 빌어 진술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지나 필연으로 오는 생의 멈춤 내지는 죽음의 겨울을 피해갈 수는 없다. 푸르던 목숨 다 내던진 것처럼 '비울 것 다 비우고도/눈 속에 누운' '겨울산'은 마치 죽음에 이른 듯하지만 다음 봄을 기다리는 침묵에 든 것이다. 즉 '부활'을 예비하고 있음이다.

'산에 와서 서 있으면/나도 또한 나무 된다'는 것처럼, '푸른 숲 숨소리에/풀이 되고 꽃이 되'는 것처럼, '어디쯤 오르고 나니/가부좌한 바위 되'는 것처럼 자연과 인간의 친화 내지는 동화는 결국 자연을 내세워 자연이 퍼뜨리는 파장을 매개로 인간사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자연을 내세워 인간사 및 인간의 감정이 리듬을 타거나 특별한 시적 언어로 재탄생, 본연의 모습보다 더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자연의 깊은 이치'를 찾아냄은 자연에서 인간의 세세한 일상사를 발견, 각성하는 것이다. 자연이 감춘 신비롭고 무한한 비밀들 중 인간이 찾아낼 수 있는 미미한 것에서조차 속성을 찾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 삶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의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이때 차용한 자연은 본래 그대로의 자연인가 하는 의문이 따르지만 그것은 어쩌면 인간에 의해 분류되고 인간의 상상력이 덧입혀져 재구성된 자연이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시조는 과거 교과서에서 접한 시조의 형식이나 내용면과는 많이 달라져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시조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할지도 모른다.

기계적 율격에 얽매이다보면 시적 흥미라든지 여운이 반감될 소지가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시조는 물론 시에는 엄연히 율격이 존재한다. 다만 시는 이 율격에서 보다 자유롭지만 시조는 이 율격에 충실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가 무조건 율격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산문적 형태를 가지는 시라 할지라도 율격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시조집『고향에서 마신 술』은 시적 묘미를 갖추고 있음은 물론 시조가 지녀야할 모든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내용을 담기에 급급한 나머지 시적여운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장황설로 일관하지 않음이며, 시적 감정을 살려 시적 표정을 짓고 있음이며, 짧지만 고른 호흡으로 시적 정감을 절제 있게, 그러나 깊게 드러내고 있음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운율적 역동성으로 시적 묘미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음이다.

시조를 시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지, 혹은 아닌지를 혹자는 의문으로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시조가 율격형식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시적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역시 시적요소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조집 『고향에서 마신 술』역시 정감 있고 따스한 내적 정서는 물론 시적여운의 파장 또한 길고 깊다. 현직을 물리고 난 뒤 자연과 벗하는 삶, 주변사람들과의 친화, 그리고 내적성숙으로 대변할 수 있는 시편들은 복잡하고 착잡한 의미가 아닌 함축하고 응축한 의미들의 집합이다. 이는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사유이자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지성과 감성을 언어를 통해 세상에 내보낸 시인의 세계관인 것이다.

삶의 기쁨이나 애환 속에 깃든 적멸과 그리움까지도 서정성으로, 미학의 깊이로 드러낸 시편들은 단아하면서도 정교하며 또한 구조적 심미성마저도 획득하고 있다. 이는 시적 존재의 따뜻하면서도 서늘하고 또한 복잡한 듯하면서도 고즈넉한 세상풍경을 관조하는 시적 시선 때문이다. 그러나 풍경을 관조하는 시인의 시선은 섬세하고도 예민하다. 이 섬세함과 예민함은 시인자신의 삶의 행로에서 비롯되어짐이며 맑은 시력에서 얻어짐이다.

자연적 사계절과 인생의 사계절을 지나면서 봄날의 경쾌함과 여름의 무성함과 가을의 적조함과 겨울의 황량함까지 몸소 체험하지만 시인의 눈은 여전히 맑고 고상하고 깊다. 그것은 시인의 고향길, 달리 말하면 원초적 생명의 근원을 찾는 과정에서의 여정이며 행로이다.

자연, 특히 시인의 고향에 대한 기억에 결부된 자연에서 생의 의미를 짚어냄은 결국 현실의 물질에 구속된 삶과 영욕에 사로잡힌 삶을 경계함이다. 자연에 기댄 서정성과 함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요소도 함께 담음이다.

비록 시적으로 드러냄에 있어 모남이 없이 순하고 둥글고 단조롭다 하나 자연을 다루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비롯, 우주적 리듬을 터득하고 깨달은 인식의 표현을 시편에서 고루 찾아낼 수 있다.

삶의 여정에서 채 비워내지 못한 욕망, 그리움, 회한 등을 계절에 비유해 마냥 한탄조의 노래로 쏟아내기보다는 밝음으로, 희망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시편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숙명 또한 껴안고 가고자 하는 시인의 시적 사유는 시적 세계를 더욱 깊게, 더욱 넓게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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