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강 룡
1920년대는 KAPF의 결성과 함께 이 땅에 프로문학이 정립된 시기이다.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몇 가지 문학 운동 가운데 육당, 가람, 노산, 위당 등이 중심이 되어 시조부활운동을 일으켰던 바, 이 운동을 본격적인 현대시조의 출발점으로 보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이후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당시의 황량하던 시조 풍토를 생각하면 현대시조단은 가히 백화난만의 시대라 하여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시조단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 하나가 근년에 와서 새롭게 등장한 정격과 파격에 대한 논란이다. 이 문제가 지금에 와서 다시 쟁점이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문학의 산문화 바람을 타고 종래의 정형이란 틀에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유로운 흐름을 선택하는 시조인들이 적지 않게 되었고, 이에 대하여 시조가 시조답기 위해서는 구별된 틀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쪽의 주장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비평을 담당한 시인들 간에 같은 작품을 놓고도 한 쪽에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내용을 읽기도 전에 형태면에서 벌써 파격, 내지는 ‘시조 아님’의 딱지까지도 붙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각별히 잘된 작품이라 하여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작품까지도 “시조도 되지 않음”의 딱지를 붙여버린다. 다시 말하면 시조의 형태에 대한 개념 정리부터가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조의 장구(章句)에 대한 논의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시조가 3장이라는 데 대해서이다. 지금도 절장시조, 양장시조 등을 실험하는 시인들도 간혹 있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여 이미 시조의 한 형태로 정착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였다는 판단이 났으니 이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하고, 단시조의 형태가 3장 구성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극히 일부의 시인과, 시인이 아닌 일반인에 의하여 ‘3행’이란 용어가 회자(膾炙)되면서 시조의 장(章)에 대한 개념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최근 공영방송의 모 프로그램에서도 어떤 교육학자가 “앞으로 나의 희망은 3행시 짓기를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뿐이 아니다. 야유회를 갔을 때도 우리는 심심찮게 ‘3행시 짓기’ 놀이를 하며 즐기고 있다. 개인적이지만, 그 때 그 분이 말한 ‘3행시’나 일반 언중(言衆)이 말하는 ‘3행시’의 개념은 시조의 3장과는 전혀 별개로서, 길이도 운율도 상관없이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되는, 시조와는 상관이 없는 용어이니 차제에 시조의 3장이란 용어와는 구별하는 것이 옳겠다는 견해이다. 지면 관계로 정작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는 구(句)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못하였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호에서 한 번 더 논의하기로 하고 3월호에 실린 작품들을 주의 깊게 읽는다. 게재된 작품들을 논란이 되고 있는 형태면에서 먼저 살펴보았다. 음수율을 적용한다면 핀잔을 받지 않을 작품은 아홉 편 가운데 딱 한 편밖에 없고, 음보로 본다면 약간의 문제점을 안은 채 모두 정격 단시조로 보아줄 수 있다. 작품을 보기로 한다.
아우는 암으로 가고 목련꽃만 활짝 핀 봄
종일 누이와 말없이 햇살을 보다
목을 빼 허공을 흔들며 네 간 곳을 묻는다.
검은 짐승이 삼킨 그 처절한 흔적들이
피 묻은 메아리로 낱낱이 되돌아와
에인 듯 가슴에 뚫린 그 구멍만 키웠다.
-조주환,「메아리」전문
죽음이 있다는 것은 산 자에게 슬픈 일이다. 지금 시인의 가슴속에 ‘부딪치어 되울려 오는 소리-메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병으로 먼저 간 아우의 소리이다. 특히 동기가 비명(非命)에 갈 때 남은 자는 그 슬픔을 평생 동안 가슴에 묻고 살아가게 된다. /검은 짐승/으로 대치된 병마 앞에서 보았던 /그 처절한 흔적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시인의 가슴을 후비며 /뚫린 그 구멍/을 키우고 있음을 비통해 하고 있다. 인간은 죽음이 있어 이승을 보다 선하게 살게 되고 오늘의 삶이 더 소중한 시간이 된다. 하여, 이 죽음의 고통을 초월하고자 하는 자리에 종교가 있다. 그러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득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제외한 우리들 범인(凡人)이야 동기의 죽음, 특히 비명에 먼저 가는 동기의 죽음 앞에서야 더 할 말이 무엇이겠는가. 절절한 슬픔을 시적으로 잘 승화시켜 독자의 가슴에도 깊은 메아리를 울리게 하고 있다.
세금 포탈할 줄 몰라 비자금도 없습니다.
위장전입하지 못해 방 한 칸도 없습니다.
언제나 춥고 배고픈
따라지 인생입니다.
가진 것 없으니 뺐길 것도 없습니다.
내 집이 없으니 문 걸 일도 없습니다.
누군가 툭툭 치고 가면
그냥 웃고 맙니다.
-김선영,「백수 일기」1/4 ,3/4)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청문회의 회오리가 온 나라를 휩쓸고 있다. 하나같이 우리를 씁쓸하게 하는 것은, 너무 세세한 사생활 부분까지 ‘아니면 말고’ 식으로 털어 대는 데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게 가리고 가려 뽑은 사람들이 저 모양이니 많고 많은 고위관직 자들이 관례라는 미명으로 포장하여 살아가는 삶이 어떠했겠는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그들의 엉뚱한 삶들이 가지지 못한 자나 특히 백수들에게는 크나 큰 상실감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적 여과 없는 직설적인 내뱉음이 다소 걸리기는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참여시도 구호가 아닌 ‘시’이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를 시로 승화하는 데에는 고도의 시적 고뇌를 요하는 어려움이 있어, 김수영의「풀」과 같은 잘 된 참여시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앞강물이 뒷강물의 푸른 이마를 쓸어주고
앞산맥이 뒷산맥에 푸른 등을 내어주는
속 꽉 찬/바람법문에
귀가 밝아지는 법당.
-박권숙,「배추밭」전문
시인은 지금 산사(山寺) 앞이거나, 또는 들판의 배추밭 가에 서 있다. 여기서 그 장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선 배추 포기들, 시인은 그 정연한 배추 골을 바라보며 연상의 가지를 벋어 낸다. /속 꽉 찬/ 배추들이 줄지어 선 배추밭, 거기에는 흘러가는 푸른 강물도 보이고, 줄기줄기 이어가는 산맥도 보인다. 앞 물을 이어 흐르는 뒷물, 앞에서 달려가는 산맥을 따라가는 뒷산맥도 보인다. 그러다 문득 그 자리에서 한 편의 /속 꽉 찬/ 법문을 듣게 된다. 그 법문은 /바람법문/이다.
기독교에서도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 하였듯이, 불교의 법문 역시 절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닌 줄 안다. 천지자연이 들려주는 법문, 귀를 바르게 밝히기만 하면 우주의 삼라만상이 저마다 온갖 종류의 법문을 설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만 사람의 귀가 아둔하여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아비규환 속에서 몸부림하며 사는 것이 아니던가.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그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밝아지/ㄴ다면, 선 자리가 어디든 거기가 곧 /법당/ 안이 아닐까. 짧은 단수 안에서 깔끔하게, 그러면서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가편(佳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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