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시는 외금강에서 열리는 종교 수양회에 참석 후 해금강을 찾던 길에서 하루살이 떼를 만나 그 속을 눈을 감고 헤치고 지나와서 바라 본 하루살이 떼를 보고 지은 최초의 시조로 23세 때 작이다. 선생님은 19살부터 교회에 열심히 나갔다. 그 곳에서도 지식층의 여성과 자연적으로 접하게 되니 자연 부부간의 거리는 소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 시절 전통적인 결혼에서 온 부부간의 소원함은 소설에서 뿐 아니라 실제로 주위 이야기에서도 들어서 안다.
나의 고향에서도 그런 분이 계셨다. 내가 어릴 때 그 아이들이 명절이나 여름 방학 때면 고향에 왔었다. 곧 둘째 부인의 애들이다. 그 분은 학계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분이다. 바로 서로 대화가 통하는 신여성과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한 것이다. 그 시절엔 그것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호적 정리는 1969년(?)인지 호적정리 기간에 본처가 아이들을 생각해서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는 말도 들었다. 첫 부인에게서는 아들 하나 둘째 부인에게서는 3남매인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그 사실이 아마 학계에서는 장례식장에서 알려진 것으로 안다. 그래서 이 또한 사필귀정, 사실은 어느 때는 밝혀지게 마련이다. 그 외도 몇 분을 알고 있다.
그에 비한다면 평생 밋밋한 대화로 살았지만 선생님과 사모님의 삶은 떳떳하고 자식들에게, 제자들에게, 동료들에게 사회에 모범이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사모님은 그야말로 오로지 자식들이 잘 자라서 잘되기만을 바라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안주인으로서 가족을 위한 희생적 봉사를 큰 낙으로, 당연한 내조로 여기고 사셨다고 본다. 그 시절 어머님들의 마음이셨을 것이다.
내가 선생님 댁을 찾아간 것은 결혼 후 남매를 가정부에게 맡기고 이대 대학원 다닐 때이다. 그 때 이숭원 교수가 서울대 사대 국문학과 2학년이었다. 마침 방에 들어와서 선생님께서 아들 자랑을 하며 인사를 시켜 주셨다. 훤칠한 키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얼굴이 희고 잘생긴 학생으로 기억한다. 세검정(부암동) 그 주택은 나무가 풍성한 널따란 정원이 있었고, 마당에 정자도 있었다. 대문도 앞문과 뒷문 또는 위쪽문과 아래쪽문 이렇게 있었다. 그것은 마당이 층을 이루며 넓어서 아랫길과 윗길을 잇기 때문이다. 그 주택은 내 어린 시절 고향의 우리 집 같은 생각이 들어서 참 좋았다. 내가 꿈꾸는 집은 마당이 넓은 정원이기도 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1987년, 다시 학문의 길에 들어설 때 선생님을 찾았을 때는 그 좋은 주택자리에 다세대 건물이 들어서 있고 그 한 층에 선생님이 계셨다. 물론 자녀들은 다 분가시키고 두 내외만 계셨다. 답답하고 그 주택이 많이 그리웠다. 그리고 상계동에 계실 때는 사모님께서 손수 준비하신 따끈한 점심밥을 함께 먹은 적도 있다. 잠실 우성 아파트를 거쳐 대치동에서는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계셨다. 그 후 필자도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온 처지라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다. 그래도 스승의 날 전 후에는 해마다 꼭 찾아뵈었다. 어느 때는 남편과 같이 가서 모시고 나와 식사를 대접해 드릴 때도 있었다.
선생님을 통하여 시조계 소식, 시조문학에 얽힌 이야기, 김준박사께 시조문학을 맡긴 과정 등등 얘기를 세세하게 잘 해 주셨다.
돌아가시던 그 해 찾아뵈었을 때는 전과는 다른 선생님의 모습을 약간 느꼈다. 그리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고 병원으로 문상을 가서 이런 저런 사연을 듣게 되면서 약간의 치매기 때문인 것으로 나중에 알게 되었다.
3.
思悼의 章
단풍 잎 가지마다에
마지막 정열은 타고
산국화 오복소복히
이슬이 차가웁다
먼 줄기 서리운 강물엔
고향만이 다가서고 --
코스모스 웃는 모습
그대 주고 간 마음
갈대 숲 서걱서걱
그대마음 울려오네
꿈으로 도피온 가락
산새만이 배워 나나?
갈 곳 차마 모르던
떠 도는 한 마리 철새
흐려진 비명(碑銘)에
비와 바람 다구쳐도
제 날개 제가 따르며
울어 쫓는 삶의 길.
(1968. 10 모래내에서)
위 시는 마음을 나누었던 그 여선생과 안타까운 이별을 하고 그녀가 미아리 묘지에 묻혔다는 소식을 들은 지 30 여년 후 가을을 맞아서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곧 30여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한 ‘사랑의 장’이다. 이렇게 선생님은 한 여인을 가슴에 품고 사신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인이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면, 아마 젊은 날의 한 때의 사랑으로 기억하며 추억의 한 장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랑이 이별 후 그것도 몇 개월 후 병사했다면 그것은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으로 인한 마음의 병일 수 있다. 어떻든 일방적으로 냉정하게 끊어버린 사랑의 닻줄이 아무리 그녀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로서는 실연에 대한 상처가 컸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도 자책감이 문득문득 되살아났음을 표출한 것으로 본다. 그녀와의 추억은 평생을 선생님과 함께 있었음을 다음 시에서도 나타난다.
가을이 오면
풀섶 나무 잎이
노을로 불붙으면
드높은 창궁은
투명 속의 청자거울
빠알간 능금알들이
가슴가슴 안기네
이렇게 가을이 오면
마음은 돛을 달고
그 옛날 두뚜루(後坪里)의
능금 밭으로 닿는다.
못 잊을 하나의 영상을
되찾아나 보련 듯이
내 지금 잎이 지는
가로수 밑에 섰다.
잡답과 소음이
휘밀리는 한 복판에
어설픈 밭길도 멈춘채
황혼을 부르면서 -
(1972.9.30)
위 시 「가을이 오면」은 「思悼의 章」을 지은 후 4년 되던 해 가을을 맞아 옛 일을 떠올리며 지은 작품이다. ‘1936년 가을 두 여선생과 함께 춘천 뒤뚜루에 있던 과수원을 찾았던 일을 회상하며 얽은 것이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렇게 가을이 오면 //마음은 돛을 달고 //그 옛날 두뚜루(後坪里)의 /능금 밭으로 닿는다.//못 잊을 하나의 영상을/ 되찾아나 보련 듯이” 라고 읊었다. 그러니 그 사랑의 그림자가 평생 가슴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다. 그것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애타게 뜨거워진 사랑의 닻줄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고, 그로 인해 그 사랑이 이 세상을 하직 한 것과 같은 자책감으로 남았으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그림자이다.
그래도 그 사랑의 그림자도 세월이 가면서 자식들로 인해 많이 지워진 것으로 보인다.
‘ 세 딸도 다 잘 커줬지만 숭원이도 어려서부터 둥실둥실 잘 자라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혼자 공부하였고 석사 박사 과정에서는 자력으로 하였고. 대학 교단생활도 순조로웠고, 뭣보다 며느리가 순량하고 성실한데다 슬기로운 손자를 둘이나 낳아 주어 참으로 기쁜 마음은 채워지지 않던 물이 흥건하여진 것도 같다’고 하여 부부간에서 채워지지 않은 물그릇이 자손들로 인해 채워졌음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4.
‘ 아내는 62년이나 넉넉지 못한 살림을 불평 없이 꾸려주고 자기 마음에 채우려던 그릇에 물을 채우지 못한 채 노을로 지고 말았다’(전게서 p.45)고 회상하며 다음의 시조 한 편을 남겼다.
짝은 떠나고
팔순 한 평생을
사는 듯 살도 못하고
한마디 말도 못한 채
떠나간 그대 모습
봉긋한 무덤으로 누워
부슬비에 젖는가.
피려던 18세에
귀밑머리 풀고 와서
어렵사리 살림살일
말없이 꾸려 주고
사남맬 키워 키워서
보란듯이 세웠고.
회한은 비바람 되어
문득문득 잠겨온다
아침 저녁 상머리에
언뜻 언뜻 어리는데
그 미소 안개 속으로
아스라이 숨는가.
(1971.7.10)
애틋한 사랑보다 한평생 살아온 부부의 끈끈한 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품이다.
첫 수에서는 “팔순 한 평생을/사는 듯 살도 못하고//한마디 말도 못한채/떠나간 그대 모습//봉긋한 무덤으로 누워/부슬비에 젖는가.” 라 하여 임종시의 회한을 얽었다. 초장에서 ‘팔순 한 평생을/사는 듯 살지 못하고’ 는 아내에 대한 남편으로서의 미안한 마음도 배어 있다. 여기는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아내는 자기를 가까이 사랑해 주기를 바랐고, 나는 나를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는 아내로 바랐으니 서로가 채워지지 않는 물그릇 이었다” 에 나타나듯이 아내를 살뜰하게 사랑해 주지 못한 마음이 드러난다.
이어 둘째 수에서는 “피려던 18세에/ 귀밑 머리 풀고와서//어렵사리 살림살일/말없이 꾸려 주고//사남맬 키워 키워서/보란듯이 세웠고.“라 하여 아내로서의 일생을 치사(致謝)한 것으로 나타났다. 곧 18세에 시집와서 1살 아래인 공부하는 남편 만나 오순도순 사랑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시부모 모시고 시집살이 하면서도 말없이 살림살이 잘 꾸려 나갔고, 4남매 모두 보란듯이 잘 키웠으니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한 평생 살고 떠나고 나니 하나하나 지난 세월이 고마울 뿐이다. 뭣보다 자식들을 훌륭히 잘 길렀으니 그것이 가장 고맙고 그것이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여자로서의 성공한 삶이리라.
셋째 수에서는 “회한은 비바람 되어/문득문득 잠겨온다//아침 저녁 상머리에/
언뜻 언뜻 어리는데//그 미소 안개 속으로/아스라이 숨는가.”라 하여 옆에 아내가 있을 때는 있는 듯 없는 듯 모르고 살았는데 정작 옆에 없고 보니 빈자리를 느끼게 된다. 그 빈자리가 서늘하게 다가오고 아침저녁 마주 하던 상머리에서도 빈자리를 의식하고 말없이 미소 짓던 그 모습이 아스라이 멀어져 감을 실감하며 그 회한을 형상화했다. 이 한 편의 시속에 아내가 살아온 그 일생의 삶의 모습이 드러나고 남편으로서 아내에 대한 감사함이 독자로 하여금 따뜻한 정감을 가지게 한다. 이래서 시인이 좋다. 사후에 이러한 시편을 받을 수 있는 아내가 그 몇이나 될까 싶다.
“아내는 자기를 가까이 사랑해 주기를 바랐고 나는 나를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는 아내로 바랐으니 서로가 채워지지 않는 물그릇이었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되어 거의 일생을 이 집에 와서 희생적 봉사를 한 것에 대한 고마움은 잊지 않았고 그저 아이들이 자라나서 잘되기만 바라고 살아왔다고 본다.” 고 선생님은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선생님의 술회는 곧 바로 위 시조 「짝은 떠나고」에 고스란히 표출되었다.
5.
이렇게 월하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회한』은 선생님이 남긴 세 편의 시조 작품에서도 충분히 읽으며 짐작할 수 있고, 월하의 자전적 수필집 『먼 영마루를 바라 살아온 길 손』을 읽으면 보다 선명하게 다가온다.
월하 선생님은 전통관례에 의해 17살 고등학교 시절 1살 위인 사모님과 얼굴 한 번 못 보고 혼례를 올렸다. 그래서 선생님은 직장에서 교회에서 신여성을 만나면서 대화가 통하는 배우자가 그리웠을 것으로 본다.
선생님은 춘고 졸업 후 보통학교(초등교)에 근무하던 시절 동료교사인 K여선생과 서로의 마음을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내가 있는 몸임을 잠시도 잊지 않고 중심을 잘 지킨 것으로 본다. 곧 Platonic love를 23세쯤 1년 동안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사랑도 새봄이 되면서 선생님의 전근과 함께 안타까운 이별을 하였고, 그 후 절연 편지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그 해 가을 그 여선생은 신병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 사랑을 선생님은 아마도 평생 안고 사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앞 장에서 제시된 「思悼의 장」과 「가을이 오면」 시조 두 편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사모님은 시집살이 하며 시부모 모시고 남편 뒷바라지 하고 자식 넷을 기르고 그 자식들이 잘되기만을 바라며 알뜰히 살아온 전형적인 우리네 어머니셨다. 선생님 부부는 부부로서 서로가 책임과 의무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왔고 그 길에서 소임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짝은 떠나고」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 시절 어른들의 세계가 그러려니 생각해 본다. 그래도 선생님과 사모님은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은 없었다 하더라도 한 평생 끈끈한 정으로 이어졌고 한 평생 서로에게서는 채워지지 않은 물그릇에 그 자식들로 하여금, 그 손자들로 하여금 가득가득 채워져서 그 시절 성공한 부부상으로 축복받은 삶이라 하겠다.
(2013. 10.12. 시진회 가을 학술 세미나 발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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