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자유시와 달리 정형의 틀을 지니고 있는 정형시이긴 하지만, 결코
형식이 내용을 제약하거나 시상을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시조의 형식장치
에 최대한의 자유로움을 얹어야 한다. 혹자는 시조가 정형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구시대의 유물로만 폄貶하려는경향도 있지만 이는 시조
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인 것이다. 시는 산문과 달
리 압축과 비유 상징을 표현의 특성으로 하는 운문이 아니던가. 운문 중에서
도 특히 시조는 더욱 운문적이다. 여기서 운문적이라는 것은 시조가 언단의
장言短意長으로 함축과 내포의 매력을 담고 있으며 율격(음률)과 호흡, 박자
의 율감을 조화해 가면서 의미와 비유 상징, 이미지 따위를 율격으로 이끌고
통일성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결국 시조는 시상을 율격에 맞게 정제되어야
하고 함축의 미를 지니는 예술작품이어야 한다. 일찍이 A.Poe가 “단시短詩
만이 시다”라고 언급할 걸 상기하면 역시 정제와 함축의 묘미를 지닌 시조!
시조의 3장 6구가 바로‘시 중의 시’로서 제대로 된 시라고 생각 된다.

이번 호에서도 계간 『시조문학』여름호의 작품을 편집순서에 따라 살펴보
기로 한다. 하나의 작품은 곧 작가 자신의 응축이자 정신의 모두이기에 필자
는 한껏 겸허한 자세로 감상에 임하게 된다.
그러면 먼저 <시조문학 소시집>란에서 두 분의 작품을 한 편씩만 살펴보자.

바람도 잠을 자는 산골의 정경 속에
녹다 만 은설 자락 햇살로 빛이 나고
남겨진 반쪽 인생을 꺼내보는 새 아침

붓으로 그린 능선 산새가 찾아들고
생각의 늪을 나와 바라본 안식처에
작은 빛 향기가 되어 내 옆에서 숨을 쉰다
- 고현숙, 「2013년 1월 1일」 전문

고현숙 시인의 연시조가 가지런히 격식을 맞추고 있다. 새해 원단元旦을
맞는 감회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일은 미래를 설계
하는 데 초석이 되어 준다. 따라서 뒤돌아보는 삶은 성찰의 삶이요, 깨달음
의 삶이 아니겠는가. 일년지계는 원단에 있다고 했다. 화자는 존재의 근원을
찾고 삶의 의미를 살피는 여유를 누리고 있다. 둘째 수 종장“작은 빛 향기가
되어 내 옆에서 숨을 쉰다.”는 의인화 수법의 시적 변용變容으로 희망적 인
깊은 의미가 함유돼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돌리면 돌아가네 디지털 동영상이
내장형 메모리칩 저장된 삶의 행적
생각에 클릭을 하면 마음 창이 열리면서.

추억이 담긴 파일 압축을 풀어보면
기록된 시나리오 선택해 볼 수 있고
단 하나 아픈 기억들 지울 수가 없다 하네.

무시로 볼 수 있네 장소와 관계없이
이끼 낀 한 세월의 내가 그린 자화상을
두 눈을 감고 보아야 보여지는 영상이네.
- 박상준, 「비매품」 전문

박상준 시인의 「비매품」이다. 우선 제목 설정의 재치에 방점을 찍고 싶다.
작품의 착상도 참신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화자는 삶의 행적이 담긴 동영
상을 장소에 관계없이 무시로 열어본다. 생각에 클릭을 하면 마음의 창이 열
리면서 추억이 담긴 압축파일도 나온다. 그런데 이 동영상은 유독 두 눈을
감고 보아야 보여지는 영상이기에 비매품인 것이다. 상상과 시적 비유를 통
한 창조의 세계가 이미지화 되고 있다. 세 수의 연시조가 전체적으로 통일성
을 갖추어 주제심화에 기여하고 있음도 이 시인의 개성일 터이다.
다음은 <신작 특집>란의 작품들에서 골라 보았다. 이 <신작 특집>란에는
열두 분이 각기 다섯 편씩의 신작을 싣고 있는데, 이 신작들이야말로 땀 흘
린 작가들의 분신이라고 사료되어 필자는 조심스럽고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다가서게 된다.

토종감도
제주 것은
설어야 더 쓸모 있다
단맛, 아예 알기 전
떫을수록
짙은 육즙
흰 무명
황토빛으로 적신
그 함성이 들리는 듯
- 고성기, 「풋감을 따며」 전문

고성기 시인의 이 단시조는 3연 9행의 짜임을 보이고 있다. 한 장을 한
연씩으로 하였고, 역시 운율과 이미지, 그리고 의미를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배행을 했으리라고 본다. 시상의 연결이 매끄럽고 쉽게 읽혀지고 있지만 내
포되고 함축된 그 의미는 깊게 느껴진다. 특히 ‘토종감’, ‘설어야’, ‘떫을수록’,
‘짙은 육즙’, ‘흰 무명’, ‘황토빛’,‘함성’ 등의 시어들이 모두 주제의 심화에 톡
톡히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고성기 시인은 <시작 노트>에서 “내 시
는 제주 토종감처럼 시고 설다”라고 했지만 이렇게 일상적인 소재에서 귀한
시상을 뽑아 올리는 기량은 높이 살만 하다. 또 종장에서는 전환과 비약의
묘미를 살리면서 의미심장한 결구로 산뜻하게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맘때쯤 제주의 갈천은 토종 풋감으로 온통 물들인다고 한다.

간밤에
쓰다가 만
연서 하나 있었는가
아직 남은
그리움을
홀로 나와 가슴앓이
밤세워
눈물로 지운
하얀 고백 내 사랑.
- 김경희, 「낮달」 전문

김경희 시인의 단시조다. 직관력에 의한 현실의 재창조다. 이것이 시적
진실이며 감동의 세계인 것이다. 김 시인은 자기 생각을 이미지와 이미지로
연결하여 그 생각을 구조화하고 시적 정서로 드러내었으며 그에 대한 상상
력이 참신하고 사유의 깊이도 만만치 않다. 초장에서는 설의법으로 종결하
고 중장과 중장은 명사로 종결하여 표현의 기교를 살리면서 단시조의 특성
을 보이고 있다. 특히 종장의 둘째 음보 ‘그리움을’에서는 의외로 목적격조
사 ‘〜을’을 사용하여 ‘낮달’의 상징성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겉으론 수절하듯 저 고운 목련꽃도
사랑 앞엔 별 수 없이 푸덕이는 새가 되나
지난 밤 깃털 빠진 듯 낙화가 어지럽네.

성성한 눈발 속에 정신 놓은 매화 좀 봐.
늙어서 굽은 등을 강골로 버티면서
노망에 회춘 하듯이 꽃 피우고 나오네.

이 엄동 설한풍에 화냥년을 보았나.
제 서방 오는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길손을 홀리고 있는 저 요망한 동백꽃.

쑥같이 어리석고 멍청한 국화꽃아,
그 좋은 봄여름에 꽃 피우고 볼 일이지
어디서 무얼 하다가 서리 쓰고 꽃이냐.
- 김 원, 「꽃 타령」 부분

김원 시인의 「꽃 타령」은 여섯 수의 연시조로 비유, 상징, 돈호, 설의, 영
탄 등 다양한 표현의 기교를 섞어가며 한껏 골계미를 보여줌으로써 은근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여기서는 목련꽃, 매화, 동백꽃, 국화꽃을 노래한 네
수만을 뽑았으나 뒷부분에 할미꽃과 호박꽃 타령이 이어져 있다. 통영에서
귀촌 생활 중이라는 김 시인은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겪은 체험의 산
물을 시적 경험으로 재구성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품이 체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주제의식도 작용하고 상상력도 가미되어, 대상에
대한 재창조의 시적 과정을 거침으로써 이렇게 한편의 시조라는 예술작품으
로 탄생되는 것이다.

아반떼 차를 몰고 어디론가 가는 여자
보이잖는 행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서너 살 계집아이와 마주보고 노래하는……

그 가사 어떤 것인지 들리지는 않지만
저리 맑은 웃음 속에 섞어내는 노래라면
행복을 노래하지 않아도 행복으로 들리겠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그 시간에
엄마와 아기가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래
행복이 물상物像이라면 저 아니고 무엇이랴.
- 문무학, 「그 여자·5」 전문

문무학 시인이 발표한 연작시조 「그 여자」중에서 한 편을 고른 것이다. 문
시인은 ‘그 여자’ 연작을 쓰는 이유에 대해 <시작 노트>에서 “팍팍하다고 하
는 우리네 일상, 그 속에 분명 우리 삶의 기쁨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걸 찾
아보고 싶었다.”라고 피력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장별 배행의 세 수짜리 연시
조로서 순간포착의 한 장면에서 착상된 한 폭의 그림이다. 리얼리즘의 정서
를 담고 있으며 핵심어는‘행복’이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
란다. 그러나 행복은 저절로 굴러오는 것도 아니요 누가 가져다주는 것도 아
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며 명예나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꼭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행복이 자신의 마
음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찮
은 일상에서도 제재를 취하여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시인은 행복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시인의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건전한상상력이 귀한
행복을 창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젖은 발길 멈칫멈칫
자꾸만 돌아본다
찬 이슬 달빛 아래
반짝이는 흔들림뿐
뉘 있어 자정을 걸어
이슬 따러 나왔겠나.

한참을 흐른 세월
옷깃소리 님이신가
시린 발길 그림자로
따라오던 하얀 미소
뒤돌아 다시 들으니
내 발자국 젖은 소리.
- 문복선, 「젖은 발길」 전문

문복선 시인의 구별배행의 연시조다. 시조의 음수율, 음보율을 갖춘 품이
정격을 유지하고 있다. 시상도 안정적이다. ‘젖은 발길’은 화자의 지나온 길
을 의미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사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마음은
여유의 마음이요 성찰의 마음이기도 하다. 삶의 여유가 없다면 뒤돌아볼 겨
를도 없는 일이다. 시인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겨우내 울고 싶어 어이 참고 살았느냐
설움도 얼어붙어 눈가루로 뿌리더니
녹아서 눈물이던가 시도 때도 없구나.
- 백상봉, 「봄비」 전문

백상봉 시인의 단수가 풍류와 가락의 멋을 보여주고 있다. 설의법, 영탄
법으로 재미성을 더하며, 감정이입의 이 작품에서‘봄비’는 ‘눈물’에 은유되고
있다. 설운이 얼어붙어 눈가루가 되고 눈가루는 녹아서 눈물이 되고 있는 형
국이다. 사실, 시(시조)에 있어서는 이렇게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대상을 주
제로 표현할 때에도 항상 객관적인 보편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한 서술이나 묘사나, 그 재현에만 그친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의 시
(시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적 대상을 전혀 다른 예술작품
으로 창조하여 새로운 의의와 가치를 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목련꽃 봉오리가
살며시 눈 트는데
심술쟁이 꽃샘바람
나뭇가지 흔들면
어머나!
깜짝 놀래서
옷깃 도로 여민다.
- 양계향, 「삼월」 전문

 

양계향 시인의 단시조다. 요약된 이야기를 기-승-전-결로 구성한 동시
조적 작품이다. 각 장을 구별로 배행하면서 종장의 첫 음보는 별도로 앞세워
놓아 3연 7행으로 표기하고 있다. 시조가 본래는 ‘시절가조’로 출발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삼월은 절기상으로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기에 꽃샘바람이
매운 시기다. 시인은 정화의 공간으로서 ‘삼월’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모난 돌 함께 얼려
깎기고 닦기면서
쌓은 덕悳
심한 연줄
감기고 풀리면서
우정의
옛 얘기하며
즐겨가는 황혼 길.
- 이근구, 「구괴정九槐亭에서」전문

‘구괴정九槐亭’은 충남 아산의 시골에 있는 정자로서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춘 세 정승이 모여 국사와 학문을 논하던 장소라 한다. 시의 행과 연이 시
읽기의 리듬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시 고유의 여백을 창출해 준다는 걸 감
지하게 한다. 아울러 시조의 형식과 내용이 적절하게 어우러져서 완결의 미
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물오른
가지 끝에 갈채 같은 환한 미소
삼동을
밀어내고
봄으로 길을 여네.
온 동네
잔칫날인 듯
불 밝히는 꽃대궐
- 이석희, 「매화 마을」 전문

이석희 시인의 「매화 마을」은 시적 이미지의 형상화가 확연하다. 시조는
이렇게 나름대로 곡진한 비유의 가락을 드리우면서 눈에 보이듯 이미지화
되어야 한다. 화자의 눈밝음이 긍정적이고도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 종장을
보면 매화마을은 “잔칫날인 듯 불 밝히는 꽃대궐”인 것이다.

부소산 아스라이 까마득한 낭떠러지
한 잎 한 잎 한이 서린 꽃잎들이 낙화된 곳
세월 속, 눈물로 흘러 백마강을 이루더라.

서글픈 곡조들은 강심으로 흔들리고
외로운 조각배는 무심으로 오고 가며
그날의 잃어버린 꿈 달빛으로 빛나더라.

백화정百花亭 푸른 숨결 솔빛으로 오는 봄은
어지러운 가지마다 꽃은 피어 또 아프고
천년 일 어제 일인 양 구름 비켜서 가더라.

인간사 흥망성쇠를 어찌 입에 담을까만
검은 바위 붉은 뫼가 서러운 저 나그네는
망국의 쓰린 하늘을 예서 다시 보더라.
- 전유철, 「낙화암落花巖에서」 전문

천유철 시인의 연시조는 ‘시간의 현상학’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시인은
자연사물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사유해 보게 된다. 어쩌면 자
연 속에서 인생의 참 모습을 찾아보는 게 시조의 발상법이기도 하다. 시상을
이끌어가는 힘이 있고 연과 연 사이의 긴밀성, 연결성, 완결성을 수월하게
극복하여 공감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다만, 각 수의 종장을 ‘〜더라’의 각운
으로 종결하였는데 이는 독자들에게 강조의 효과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자
칫 과거형의 영탄에 힘이 실리는 구태적인 표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
해야 할 것이다. 천 시인은 <시작 노트>에서 “현대시조의 정형적 한계를 감
내하되 ‘절제’와 ‘균형’,‘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의 결합을 통해 현대시조
의 양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라고 자신의 시 정신을 다부지
게 피력하고 있음도 색다른 점이었다.
다음은 <단시조 특집>란의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싹수가 노란 별종 바람이 잘 데려갔다
어차피 눈 밖에 나 일찌감치 놓은 가지
그렇게 한 시름 더니 신수가 다 훤하다.
- 김명호, 「둥구나무」 전문

김명호 시인의 작품 「둥구나무」는 시상의 정제와 함축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둥구나무는 크고 오래된 정자나무다. 수목들도 수령이 오래이다 보면
노쇠해질 수밖에 없다. 어차피 정자나무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나뭇가지
라면 미리 전지라도 해주어야 하는데 덩치가 큰 나무이고 보면 그 일이 만만
치 않다. 헌데 마침 강풍이 불어 쓸모없이 메말라가는 나뭇가지들을 시원스
레 꺾어 버리니 화자의 마음은 더없이 후련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어차
피 치워야 할 장애물이 있다면 미리미리 제거해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교훈
을 얻는다.

눈 덮인 적막한 산
정지된 시간의 꿈
복수초 상사相思 앓는
애잔한 신음소리
찬란한
황금빛 사랑
산천이 들썩인다.
- 김보안, 「얼음새꽃」 전문

김보안 시인의 ‘복수초’라는 부제가 붙은 단시조로서 전연 7행 시조다.얼
음새꽃은 봄이 되어 눈이 녹기 시작하면 꽃을 피운다. ‘원일초’라고 부르기
도 하며, 얼음을 뚫고 올라와 꽃을 피운다하여 ‘눈색이꽃’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중국에서는 ‘설연’, 또는 ‘설연초雪蓮草’라 부른다는 꽃이다. 우리나라
에선 이른 봄에 노랗게 피어나는 꽃이 생명의 소중함과 기쁨을 준다고 해서
‘복수초福壽草’로 더 알려진 꽃이다. 이 작품을 읽어 보면 시각적 심상과 청각
적 심상, 역동적 심상이 그려진다. 마치‘장미’를 보고 가시를 생각하느냐 꽃
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시는 머리와 손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눈으로도
쓰고 귀로도 쓴다. 서정적 자아는 얼음새꽃에서 귀로는 상사相思 앓는 애잔
한 신음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찬란한 황금빛 사랑을 보는 것이다. 이 사랑
이 산천까지 들썩이게 하나니.

훔치고
훔쳐내도
가시지 않는 골 깊은 무늬
빠개질 듯 버거운 세월
실핏줄 터져 휘돌아
몇 억겁
썰물과 밀물
그어지는 또 하나의 빗살
- 노영임, 「빗살무늬 토기」 전문

노영임 시인의 작품 「빗살무늬 토기」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숨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감정을 통솔하여 정서적 질서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
다. 감정을 삭혀내는 시인의 심상도 엿볼 수 있다. 감정의 절제는 현대시조
가 요구하는 기본 원리다. 세월의 흔적은 지우려 해도 가시지 않는 빗살무늬
토기를 빚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유의 깊이가 있고 행간의 여백 속에 담긴
아득함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 작품을 낭송해 보고 또 음보의 체계를 살
펴보면 그 호흡이나 형태면에서 노 시인은 음수율에 매달리지 않고 나름대
로 시조의 현대성을 의미율화에서 찾고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전설 속 시간 멀리 걸어오는 사람 있다
몸주고 뜻 주어도 별 볼 일 없던 사람
그 남자 혼불이 살아 찬 밥통을 데운다.
- 리강룡, 「한식」 전문

리강룡 시인의 이 단시조 역시 정제미와 함축미를 지니고 있다. ‘한식’은
글자 그대로 찬밥 먹는 날이다. 이 한식날은 2600여 년 전 중국 춘추전국시
대 은사隱士이며 충신이었던 개자추介子推의 죽음에 대한 전설에서 유래한 것
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설의 내용을 알고 나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
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걸 금방 느끼게 된다. 정치의 계절에 생각나는 개
자추의 바른 정신이 그것이다. 화자는 종장에서 “그 남자 혼불이 살아 찬 밥
통을 데운다.”라고 종결하였는데 이는 역설적인 화법으로 이 시대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진기가 다 빠져버린 쓴 세월을 건너서
오래 묵혀 약이 되는 묵은지 같은 사람
어느 날
만날 수 있을까
새로운 강을 건너
- 하순희, 「묵은지」 전문

하순희 시인의 작품 「묵은지」에서 시적 대상에 대한 깊은 인식이 감지된
다. 현실적인 삶의 냄새가 풍겨지는 작품이다. 우리의 김치는 발효식품으로
신토불이 토종 음식이다. 요즘에는 김치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김치 중에서도 ‘묵은지’라면 그 맛이 한결 숙성된 오묘한 맛이 있다. 짜지도
맵지도 않은 그야말로 약이 되는 중용(?)의 맛이랄까. 화자가 간절히 바라고
있는 “오래 묵혀 약이 되는 묵은지 같은 사람”에서‘묵은지’에 함유된 그 의미
를 되새겨 본다.
다음은 <여름 시조단> 작품들에서 골라본 작품이다.

전생前生이 발가벗고 부르는 독립만세
자신이 아닌 자기 비로소 눈치챘나
억겁을 지켜온 정조貞操 고생대의 나신裸身들.

그 누가 겁탈했누 홍보석 저 속살을
부정 타 용이 못된 이무기 눈물이여
아직도 분을 못 삭여 뚝뚝 듣는 눈물강.

사람들 동티가 나 기도 중 마리아와
잘못한 중생 제도 참회의 관세음과
오늘도 거꾸로 서서 벌을 받는 종유석.

무심에 밟혀 죽은 시간의 시신屍身위로
굳게 입 닫아야 할 인간이 뿜는 살기
신神들은 휴가 갔는가 직무유기 중이고.
- 서길석, 「고수동굴」 전문

서길석 시인의 연시조 「고수동굴」에서는 관찰력과 심미안으로 응집된 혜
안을 엿볼 수 있다. 시적 비유와 상징의 표현 수법이 다채롭고 사유와 상상
의 세계를 개성적으로 창조해내는 나름의 솜씨를 보이고 있다. 무생물에 의
미를 부여하여 시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공감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다만,
흠결이라면 연시조의 특성인 시상의 통일성이 좀 미흡하고 각 연의 긴밀성
이다소 느슨한 점이라 할 것이다.

산과 함께 살기 위해
새소리로 울고 웃고
산과 내가 하나 될 때
풀꽃으로 피고 진다.
치악산
솔바람 소리
산 마음 내 마음.

냇물은 끝도 없이
산 말로 일깨우고
구름은 쉬지 않고
산머리를 싸고돈다.
비로봉
저 삼신돌탑
하늘마음 산 마음.
- 원수연, 「산마을」 전문

원수연 시인은 치악산 시인이라 부른다. 한결같이 치악산 아래 살면서 자
연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산마을」도 자연친화, 자연합일 사상
의 서정적 작품이다. 시조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조화로운
노래시임을 다시한번 일깨워 주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스승이라고 했던가.
‘산’, ‘새소리’, ‘풀꽃’, ‘솔바람 소리’, ‘치악산’,‘냇물’, ‘구름’,‘비로봉’, ‘삼신돌탑’
등의 시어가 주제의식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음미해 볼수록 무욕의 경지와
청허한 정결미를 느끼게 된다.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연을 통해 세상을 바라
보고자 하는 순수한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천칭天秤
저울눈이
행적을 가늠하는
천지간
그 기로에
한 발 걸친 내 그림자
영욕이
어룽진 한 생
툭, 낙엽이 어깰 치네.
- 허 일, 「가는 길에」 전문

책의 편집순서대로 거론하다 보니 이번에도 끝 순서가 되고 말았다. 허
일 시인께서는 뜨거운 시혼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 특히 허 시인의 단수는
깨달음으로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영감을 발견하게 된다. 이「가는 길에」의 작
품에서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영감의 샘물은 갈수록 더 신선하고 풍
성해지는 것 같아 놀랍기도 하다. 참신한 시상을 감동으로 단장하고 귀한 시
심으로 갈무리해서 예술작품으로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다정다감하고 온
건 후덕하신 근본의 심성에서 비롯되는 개성일까. “영욕이/ 어룽진 한 생/
툭, 낙엽이 어깰 치네.” 정한을 숙명처럼 거느리고 순간적인 기지와 감동으
로 직조된 절구에 공감의 찬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뜨거운 시혼으로 인생
황혼을 채색하고 있는 노익장이 부럽기만 하다.

이상으로 여름호에서 ‘시상의 정제整齊와 함축미含蓄美’를 중심으로 살펴보
았으나 역시 수박 겉핥기식이 되고 말았다. 워낙 학문이 일천하고 문재文才
가 모자라는 필자이다 보니 도리 없는 귀결이 아니겠는가.

시란 영혼의 기쁨을 위해 창조한다고 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마음으로 창작에 임하는 것일 게다. 정서와 지혜와 예지의 꽃인 시조!
현대시조의 본질적 요구는 형식과 운율의 질서화이며 동시에 내용의 현대성
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의 감정만을 노래하지 않는다. 때로는
상대의 위치에서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타인의 번민과 고뇌, 아픔까지도
대신 앓아주어야 한다. 그러기에 시(시조)에서는 작자가 있고 시의 화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석공이 돌을 깎는 자세로 시어를 조탁하고 지고至高, 지미
至美, 지순至純의 경지에서 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을 빚어내려고 비지땀을 흘
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시조의 전래의 작시법에 대한 반성과 현대시론적 접근 방법의 모색
도 이미 1960년대의 일부 시조시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아직까
지도 하나의 통일된 진로설정을 못하고 허둥대고 있는 점은 우리 시조단의
현안문제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말로는 시조의 틀을 지키고 율격을 살리는
게 진정한 시조의 길이라고 하면서도 실제 작품에 있어서는 현대성을 표방
한답시고 자유시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한 실정이니 이 어찌해야
할 일인가.
오늘도 씁쓸한 심정으로 이만 무사蕪辭를 접는다.

(시조문학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