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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12-02 15:21
 조회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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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꿈꾸는 시인의 인생에 대한 통찰
조윤아 문학박사
“일하면서 사색하고 시심을 갈고 닦아 온 몸의 힘을 다한 창작들이다.”
故 월하 이태극 시조시인께서 장지성 시인의 첫 시조집인 風雪期
의 서문에 해주신 말씀이다. 10여 년 동안에 씌어진 장지성 시인의 시조작품을 두고 평가한 말씀인데, 시인은 마치 이 말씀대로 행하라는 뜻으로 여겼는지 그후로부터 20여 년 동안 꾸준히 “일하면서 사색하고 시심을 갈고 닦아 온 몸의 힘을 다해” 창작활동을 해왔다. 그 결과 높은 경지의 미적․정서적․정신적 성취를 이룩한 작품들이 우리 앞에 있다. 그러나 이 길은 시인에게 있어서 쉽고 즐거웠다기보다는 고통스럽고 고독한 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바로 시인의 길이다.
눈보라 흩뿌리는 겨울 벌 시야 멀리
외로운 저 행보는 가는 거냐 오는 거냐
셈하듯 구구단을 외며 귀 울음을 터는 거냐.
어쩌면 복음처럼 온 누리를 점유하며
함묵의 수림 속에 눈꽃 저릴 뿌려 놓고
머나먼 유형의 길에 運身으로 가는 거냐.
처음도 끝도 없을 생의 길도 외길이면
뼈 시린 족적으로 방점을 찍어 놓고
잃은 꿈 감청이 된들 바람결로 푸는 거냐
- ｢겨울 電柱｣ 전문
겨울 벌판 저 멀리 꽃도 잎도 가지도 없는 하나의 기둥이 길게 우뚝 서 있다. 황금물결을 이루었던 시절은 지나가고 허허벌판이 되어 있는 논밭 저 너머에 서 있는 그것은 눈보라가 흩뿌려 가려는 건지 오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외로운 행보를 하고 있음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시인은 ‘겨울 電柱’를 그렇게 보고 있다. 어쩌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을 전주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는 측은지심이 가득하다.
온 누리에 복음을 주었을지도 모를, 복음처럼 온 누리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를 전주가 왜 ‘머나먼 유형의 길’을 가야 하는지 반문한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머나먼 유형의 길’은 어떤 길인가. 아마도 ‘수림 속에’ 있지 못하고 ‘처음도 끝도 없을’ ‘외길’인 듯하다. 이렇듯 시인은 가던 발길을 멈추고 벌판 저 멀리 홀로 있는 전주를 보고서는 안타까워하는데, 그 마음에는 시인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머나먼 유형의 길’을 ‘運身으로 가는’ 전주의 힘겨운 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겨울 電柱｣의 마지막 수에 오면 시인의 시선은 이제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 ‘처음도 끝도 없을 생의 길’이라고 한 것은 시인이 품고 있는 인생에 대한 사상이고 ‘외길이면 / 뼈 시린 족적으로 방점을 찍어 놓고 / 잃은 꿈 감청이 된들 바람결로 푸는 거냐’ 한 것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아마도 ‘잃은 꿈’이 있는 듯하다. 그것을 떠들썩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가끔은 누군가 알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한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외로운 행보를 자처하는 것으로 그 상처를 풀어내려고 하느냐며 자신에게 되묻고 있다. 그 물음은 자책일 수도 있고 반성일 수도 있고 연민일 수도 있다.
｢겨울 電柱｣와 같은 시상은 ｢겨울 가로수｣에서도 발견된다.
조각 난
생의 파편
다시 깁은 포도 위에
옹이진
아픈 세월
상흔들을 묻어 두고
긴 유랑
끝 간 데 몰라
서성이고 있는가.
- ｢겨울 가로수｣ 첫째 수
가로수를 ‘서성이고 있는’ 것으로 보는 시인의 독특한 시선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나무(전주는 나무일 수도 콘크리트일 수도 있는데 외형의 나무의 이미지에 포괄된다.)에 자신을 투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나무들은 ‘잃은 꿈’을 간직하고 있거나 ‘옹이진 아픈 세월’을 묻어두고 있으며 추운 겨울 유형의 길이거나 긴 유랑의 길을 가는 ‘외로운 행보’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시인의 쉽지 않았던 인생의 행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나무는 외로움을 깨닫게 해주는 대상물이기보다 인간이 기댈 만한 의지처이거나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자로서 순박하고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대상물이다. 예로부터 나무는 하늘과 땅 사이에 수직으로 서서,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시인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시집 風雪期에 실려 있는 ｢고목｣에서 “성황당 발치에서 / 천년을 살았던가 // 마을의 전설들이 / 별빛으로 피는 밤엔 // 아들만 / 점지해 주십사 / 합장하는 여심이사.”라며 인간에게 있어서 나무가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밝혀 보여주었다. 나무와 동고동락하면서 나무를 보살피고 열매를 거두고 나무의 일거수일투족에 웃고 울며 많은 시간을 보내온 시인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나무를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나무와 관련된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시인이 나무를 통해 ‘외로운 행보’를 절감하는 것은 아마도 소원을 비는, 수많은 사연을 안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어야 하는 나무의 역할 때문은 아니었을까. 시인이 되면서부터 그는 이러한 나무의 역할과도 같은 시인의 역할 때문에 ‘외로운 행보’를 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의 시조에는 측은지심이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나무와도 같은 존재가 시인이다. 예로부터 시인은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시인은 신과 인간의 교통을 책임져야 했으므로 인간의 일상생활에 길들여지고 안주할 수 없었으며, 인간의 희로애락 어떤 경우에도 편히 지낼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 호메로스는 신들의 세계를 노래할 수 있었으나 장님으로 떠돌아야 했다. 적선의식(謫仙意識)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은 자신의 고향을 초월적 이데아의 세계, 즉 신들의 세계로 여겼다. 그들은 신의 세계를 넘겨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시인뿐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때문에 평탄한 일생을 보낼 수 없었다. 범상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세계를 감지하는 시인은 그만큼의 어려운 짐을 떠맡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개인의 욕망을 분출하거나 대리만족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보다는 중생을 위로하고 가르치며 혹은 정화시키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깨달은 자로서의 시인은 깨닫게 하는 시를 지어내야 한다. 장지성 시인은 바로 이러한 시인의 길을 잘 알고 있다. 제 6회 월하문학상 수상작인 ｢법주사｣는 바로 깨달은 자로서의 시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지혜의 노래이다.
골도 깊은 골을 속리라 이름 하고
석등에 불을 밝혀 깨우친 누리라면
불이문 안과 밖에는 마음 넘쳐 비울 것도.
탑돌이 후광 속에 기척 없이 오신 대불
오리숲 한나절에 되려 눈이 감아지네
적막도 시방 피는가 쇠북 소리, 그 파장…….
빗장 푼 대웅전은 죄업들도 시름인 양
추켜올린 하늘 한 점 기왓장에 골을 치고
그림자 밟히지 않는 인간 꿈은 어디인가.
- ｢법주사｣ 전문, 제6회 월하문학상 수상 작품
위의 작품은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깊은 골에 위치한 속리산 법주사라는 한 절에서 ‘불이(不二)’의 도를 추구하던 한 중생이 대불을 만나는 경이로운 순간과 중생의 화두를 다루고 있다. 무게 있는 주제를 다루었는데도 작품이 딱딱하거나 어둡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고 밝게 여겨지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소리의 파장, 시선의 이동 등 ‘유동성(流動性)’으로 그 주제의 무게를 사뿐히 떠받치거나 유유히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본당에 들어서기 위하여 통과해야 하는 ‘불이문’은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둘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 같은 ‘불이’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으므로 불이문을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시인은 ‘불이문 안과 밖에는 마음 넘쳐 비울 것도’ 없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표현을 쓸 때 마음에 담겨 있는 그것은 욕망이나 상처, 증오 등이다. 그런데 시인은 비우고 말 것도 없다 하였다. 여기서 그 까닭은 마음에 무엇인가 담겨 있지도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담겨 있는 것이 넘쳐서 흘러가게 놔두면 되므로 비울 것도 없다고 한 것이다. 불이문의 안에 있는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마음이 넘치니 비울 것도 없어 불이문의 안과 밖이 다르지 않다. 즉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런데 마음이 넘친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나쁜 것에 쓰이기보다 좋은 것에 쓰이는 표현이어서 다시 한 번 시구(詩句)를 들여다보게 한다. 만일 불이문의 안이나 밖이나 모두 마음이 넘친다고 한 것을, 불이문의 안쪽만이 사랑이 넘치고 자비가 넘치는 진리의 세계 불국토가 아니라 불이문의 밖 역시 진리의 세계일 수 있다는 뜻으로 본다고 해도 시인의 깨달음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리라. 시인이 두 가지로 해석되도록 놔둔 것은 비워야 하는 나쁜 것과 넘치는 좋은 것, 이 둘 역시 둘이 아니고 결국 근원은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진정 불이의 지경이리라.
｢법주사｣의 둘째 수는 대불과 만나게 되는 엄숙하고도 성스러운 순간의 두근거리는 감동이 우러나온다. 대불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 중생들의 간절한 기원은 어느 때인지 알 수 없는 때에 ‘기척 없이’ 이루어진다. 탑을 돌며 기도를 올리는 중생은 문득 대불이 오신 것을 알고서는 ‘되려 눈이 감아지’고, 점점 파장을 일으키며 울려 퍼지는 쇠북 소리 따라 중생의 심장 소리 또한 울려 퍼진다. 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중생은 눈을 들어 ‘추켜 올린 하늘 한 점 기왓장’에 시선을 가져간다. 그리고 또 다시 생각한다. ‘그림자 밟히지 않는 인간 꿈은 어디인가’. ‘그림자 밟히지 않는 인간’은 부처를 의미한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때는 언제쯤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때까지 중생은 죄업을 쌓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수 초장에서 ‘대웅전은 죄업들도 시름인 양’이라고 한 것은 석가모니불과 그 외 여러 보살들에게는 우선 대웅전에 와서 기도를 올리는 중생들의 고통이 첫 번째 시름이고 여기에 ‘중생들의 죄업들도’ 시름이 된다는 뜻이다.
시인은 불이문의 안과 밖이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과 부처가 되고자 하는 꿈 사이에 있다. 부처와 중생은 다르지 않다는 ‘불이’가 곧 부처가 되고자 하는 중생의 노력을 버려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장지성 시인이 시시때때로 “단수의 묘미는 그야말로 삼단논법이 절실히 요구되는 절제된 상의 집약과 압축미가 살아날 때 생명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듯이 첫째, 둘째, 셋째 수가 각각 한 편의 단수로서 삼단논법의 묘미와 절제된 상의 집약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구성미 또한 뛰어난 작품이다.
시인은 늘 나무와 함께였다. 나무에게서 자신을 보았으며, 나무를 통해 자연의 섭리,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고 사랑의 섭리, 사랑의 이치도 깨달았다. 그는 모든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랑에 관하여 시를 지었으며 특히 ｢사랑보법｣ 연작시를 통해 다양한 사랑의 형상을 보여주고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장지성 시인의 개성은 과수원에서 발견한 사랑의 원초적 생명력에 있다. 결실이 한창인 가을 과수원의 밤 풍경에서 시인은 ‘물 오른 젊음’과 ‘홍안의 숨결들’을 느낀다. 그리고 ‘바람의 입맞춤’이라든가(｢가을 과수원 1․2｣) ‘살 부빈 깊은 애무’, ‘뛰는 심장’(｢가을 과수밭｣) 등의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과수원에서 발견한 사랑이란 긴긴 기다림 끝에 얻어지는 열매와 같이 “다독인 불씨 하나 三冬을 품 안고서 / 비로소 꽃잎을 여는”(｢목련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인이 깨달은 중요한 것은 “아, 진정 / 꽃들이 아름다운 것은 / 낙화가 있기 때문”(｢꽃 진 자리｣)이라는 삶의 이치이다.
한 송이 꽃핌에도
내홍이 없었으랴
그 다툼, 시샘들을
지천으로 풀어 놓고
아, 진정
꽃들이 아름다운 것은
낙화가 있기 때문이다.
幻生은 어디이고
불멸이란 무엇인가,
죽어도 다시 사는
섭리를 깨치면서
어느덧
꽃 진 자리에
도도록한 열매 하나.
- ｢꽃 진 자리｣ 둘째, 셋째 수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 겪어야 했을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꽃은 ‘낙화’가 되어야 한다. 열매는 꽃이 꽃으로서의 삶을 고집하지 않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환생과 불멸은 이생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것이 아니다. 생애는 “만남도 헤어짐도 꽃잎처럼 떨치면서 / 처절히 焚身으로 가는”(｢목련화｣) 그런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삶의 이치를 잘 알고 있지만 인간이기에, 아직은 부처를 꿈꾸는 인간이기에 “얼마쯤 떠 흘러야 꿈결처럼 부침되나”(｢가을 과수원 1｣) 한탄한다. 얼마나 더 인생의 기복에 크게 좌우되지 않고 떠오르고 가라앉음을 꿈결처럼 평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언제쯤이나 인생의 성하고 쇠함에 너무 기뻐하거나 너무 슬퍼하지 않고, 크게 오만하거나 깊게 좌절하지 않고 모두 꿈이었다는 듯이 평상심으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 만물에 부처가 있다지만 부처다운 부처는 드물다. 수많은 시인들이 있지만 시인다운 시인은 드물다. 장지성 시인은 부처다운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 꿈인 시인다운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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