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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3-04 13:41
78세 새내기 이야기 :내 삶 소설로 쓰고 싶다
 글쓴이 : (사)시진회
조회 : 1,927  
“내 삶 소설로 쓰고 싶다”
78세에 영남대 국문과에 입학한 안목단 할머니
《 소녀의 바구니는 텅 비어 있었고, 부지런히 나물을 캐던
손은 갈 곳을 잃고 움직일 줄을 몰랐다.
경북 포항시 효자동. 언덕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길을 따라 포항여고를
다니던 언니가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었다.

○ 소녀만의 비밀 구덩이

공부는 곧잘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3학년을 건너뛰어 4학년으로
월반을 했고 4학년 반에서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연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원서도 냈다. 하지만 그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밥장사를 하며 꾸려 나가는 가난한 살림살이였다.
마을 어른들도 하나같이 말을했다.

“가시나가 공부는 무슨….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안 돼!”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뒤뜰로 향했다.
비밀 구덩이를 찾아 흙을 파냈다. 아침에 파놓은 구덩이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글씨를 써 내려갔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학교 가게 해 주세요.’

혹 누군가 보지는 않을까 주변을 살피며 소녀는 구덩이를 향해 몇 번씩이나
절을 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비밀 구덩이를 흙으로 조심스레 덮었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잠들기 전에 한 번 이어지는 소녀만의 ‘의식’이었다.

‘교수한테 시집가면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지 않을까.’

소녀에게 교수는 이 세상에서 제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소녀를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재취 자리라도 공부를 시켜
주겠다는 약속만 해 준다면 결혼하고 싶었다.

집을 나가려고 수차례 마음먹기도 했지만 홀어머니를 두고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 주먹밥을 건네주었던 그와의 재회

“1학년∼.” 지난달 29일 오전 입학식을 마치고 강의실을 찾은 안목단 할머니(78)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안 할머니는 “80에도 대학을 갈 수 있고, 90이 되어서도 공부를 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경산=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야야, 난아(소녀의 아명·兒名). 우리 집에 함 가봐라.”
“와예?”
“우리 아들이 함 와봐라 안 카나.”

이웃집 아줌마가 거칠게 오빠의 방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오빠, 와 그라노?”
오빠 옆으로 낯선 군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시 한 번 오빠에게
“근데 와?”라고 물으며 방 안에 들어가 앉았다.
군인의 이름은 김태종이라고 했고, 그와는 이미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빡빡 깎은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소녀의 마을 옆에는 형산강이 흘렀고 여름이면 그곳에서 멱을 감았다.
그러나 6·25전쟁과 함께 형산강은 최대 격전지 중 하나로 변했다.
집은 인민군의 공습에 불타 버렸다. 피란을 가지도 못했고 공습이 있을
어머니와 단둘이 강변으로 몸을 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밤이면 다른 집에서 파놓은 굴에 끼여 새우잠을 잤다. 그 집 아이들이
“가시나, 우리 굴도 비잡다”며 허벅지를 꼬집었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새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어느 날,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총알에 소 한 마리가 맞아 쓰러졌다.
모두들 달려들어 발 빠른 마을 사람들이 고기를 가져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그 주변에 서 있는데 누군가 소녀를 불렀다.
“난아, 이리 온나.”
자신의 몫에서 떼어낸 작은 고기 덩어리를 소녀에게 건네주어서 어머니에게
달려가 함께 구워 먹었지만 소녀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런 소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일까. 학도병으로 입대했던 군인 한 명이
어느 날부터 가끔 철모에 주먹밥을 두어 개 담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부대로 돌아간 군인과 3년 정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가 주먹밥을
건네주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프러포즈를 받고 난 뒤에야 알았다.
군인은 소녀를 잊지 못했다고 했다. 자신의 부대에 신병의 고향이 포항
효자동이라기에 그녀를 아는지 물어봤다고 했다.
바로 옆집이라는 대답에 그는 소녀에게 열심히 편지를 써서 보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함께 보내왔다.

▼ 군인남편 사별 → 봉제공장 운영 → 장학 사업 박사 도전 ▼

그가 한번 더 휴가를 내고 이웃집을 찾았다 노래를 불러주며 말했다.

“결혼하고 싶어요. 예스인지, 노인지 분명하게 말해줘요!”

그는 사내다웠고 결국 소녀는 교수에게 시집가겠다는 꿈을 접었다.
1956년 3월 31일, 스물두 살에 다섯 살 차이가 나는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 그의 마지막 모습

1962년 12월 17일. 아줌마가 된 소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군복을 다리며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침에 나간 그는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에 소쿠리에는 짐들이 잔뜩 쌓여 이고 형산강을 건너 있었다.
강을 중간쯤 건넜을까. 바구니 속에 있던 남편의 신발 한 짝이 물에 빠졌다.
그녀는 신발을 찾아 물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옷이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이고, 물에 젖은 담배를 와 피와요?”
“괜찮다”며 웃었다.’

꿈이었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침이 밝았다. 그녀의 집으로 남편과 함께 근무하던 이 모 대위 부인이 찾아왔다.
부인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이를 업고 제일육군병원에 면회를 가라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혼자 아이를 업고 병원을 찾았다. 남편의 이름을 댔다. 정문에 서 있던 보초병이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그녀를 들여보냈다.
한참을 병실을 헤매고 다니는데, 이 대위가 그녀를 찾았다.

“아이는 나를 주고, 저기 한번 들어가 보세요.”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남편이 자는 듯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잠시 기억을 잃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가슴에 손을 올려 보았다.
차가운 한기가 손끝을 타고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정말 가셨구나.’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뽀뽀를 해 준게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경북 영천에서 군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오던 길에 차량이 전복됐다고 했다.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10년 치 연금과 다섯 살 아들, 세 살 딸, 3개월 된
배 속의 아기가 전부였다.

○ 은인, 육영수 여사

1972년 5월 24일, 대구 수성구 파동에서 안목단 할머니의 자활공장이 문을 열었다. 공장 설립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육영수 여사(검은색 작은 손가방을 든 사람)와 안 할머니가 악수하고 있다. 안목단 씨 제공
1971년 그녀는 육영수 여사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전쟁 미망인’들의 자활을 위한 봉제 공장을 짓고 싶다고 적었다.
당시 그녀의 이름 앞에는 ‘대한민국전몰군경미망인회 경북지회장’이라는
직함이 붙어 있었다.
당시에는 도와 달라며 울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한 번 도와주고 말 것이 아니라, 전몰자 부인들에게 기술 교육을 시켜서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병원을 나서며 그녀는 생각했다.


편지에 감동한 육 여사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그녀를 도왔다.
대구시에서는 공동묘지였던 수성구 파동의 땅을 내놓았고, 2군 사령부와
50사단에서 용지 정지 작업을 도와줬다.

1972년 봉제공장 준공식이 열렸고 육 여사는 그녀를 바로 자기 옆에 앉혔다.
120만 원이란 거금도 손수 건네주었다.
녀는 같은 아픔을 나눠 가진 전몰자 부인들과 함께 일했다.
그들과 함께 군인들이 입는 팬티와 군복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30명도 채 안 된 직원도 이제는 300여 명에 이르고, 연매출도
110억 원대가 된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군 장병이 입는 팬티가 바로 그녀의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그녀는 공장의 수익을 복지사업에 썼다. 자기처럼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학생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1988년 목련장학회를 설립했고, 이 외에도 각종 복지 사업을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이제 형산강변에서 나물을 캐던 소녀는 할머니가 되었다. 공장이 커진 만큼
주름살도 깊어졌지만, 그녀가 바랐던 것들을 모두 다 이루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속에 응어리 하나가 남아 있었다. 바로 공부였다.
그녀는 2005년부터 다시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달 29일, 대학교 신입생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절망하고 포기하지 마. 뭐든지 다 하면 된다 카이.”

지난달 28, 29일 이틀에 걸쳐 영남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안 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할머니는 젊은 사람 못지않은 열정으로 똘똘 뭉쳐
계셨습니다.
“늦은 나이에 왜 굳이 대학에 진학하셨나요?”
"내 파란 만장한 삶을 쓰고 싶었다 .”

“굳이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쓸 수 있다” 고 말씀 드리자
“한 번 시도해 봤는데, 아무래도 많이 모자라더라”라고 답하셨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할머니, 박사학위 받으시는 날 한 번 더 인터뷰할 수 있도록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대구=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월정오병두 12-03-05 21:15
 
감동의 연속입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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