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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6-15 13:58
 조회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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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따라 속리산 단독 산행기
<2003.6.9~10/법주사-비로산장-세심정-중사자암-문장대-천황봉-상고암-세심정-법주사
*1. 말티고개를 넘어서
*2. 속리산 유감
*3. 문장대 오르는 길
*4. 문장대에서 5km의 천황봉 주능선에서
*5. 천황봉에서
1. 말티고개를 넘어서
말티고개는 속리산 법주사를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 꼭 넘어야 하는 고개다. 이 고개는 본디 엷을 薄(박), 돌 石(석), 박석(薄石)고개라 하였다. 그러던 것을 옛날 세조 대왕이 고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법주사를 찾아 올 때 박석고개에 이르니, 고개가 너무 가팔라서 임금이 타고 오던 연(輦)으로는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어서 말로 바꾸어 타고 넘었다. 이로부터 말 馬(마) 고개 峙(티:치의 옛말) 말티(馬峙) 고개라 하게 된 것이다.
속리산의 관문이라는 해발 800m로 길이 430m의 열두 구비 말티고개를 넘어 세조가 다시 연(輦)을 타고 가고 있는데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 밑을 지나가게 되었다. 왕이 이를 보고 "연(輦)이 걸린다."고 말하자, 신기하게도 이 소나무는 가지를 번쩍 들어서 왕의 연이 무사하게 지나가게 하였다. 세조가 이를 기특히 여겨 벼슬을 내리니, 이가 오늘날의 수령이 600년이요, 그 높이가 16m, 둘레가 4.5m나 된다는 천연기념물103호인 정이품소나무다. 옛날 높은 벼슬아치가 살았다는 솟을대문이 생각이 난다. 행랑의 지붕보다 문이 높이 솟아 있어, 가마 타고 그대로 들어갈 수 있는 솟을대문 말이다.
상가지구에서 속리산 산행지도가 있는 등산 스카프를 사고 법주사를 향하다 보니, 항아리에 솔잎을 띄운 동동주가 내 발목을 잡는다. 여인보다 더 사랑하는 술이 아니던가.
법주사 매표소에 이르는 길은 대가람(大伽藍)답게 백년 이상이 넘는 소나무, 단풍나무, 떡갈나무들의 나무숲 터널이었다.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이 있는 일주문까지 오리나 되어서 오리숲이라 하는 곳이다. 숲 옆 시내 따라 조각공원과 학습원에는 많은 단체 학생들이 먼지를 내며 가고 있었다.
입장료는 3,200이지만 만65세 이상 노인은 무료다. 어린이는 커서 다음에 입장료를 낼 사람이라서 안 받거나 할인해 주듯이, 나 같은 노인은 머지 않아 죽을 사람이니 받지 않는 것이지- 하였지만 신분증 하나로 무료 통과한다는 것은 당장은 즐거운 일이다.
2. 속리산 유감
법주사를 두루 들러 본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서둘러 산행 길에 오르기 시작한 시간은 3시로 남들이 하산하는 시간이다. 나는 거꾸로 홀로 속리산 속을 향하고 있다.
속리산은 우리 나라 8경 중에 하나로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에 위치한다. 8개 봉(천황봉,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과 8개 대(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가 8개의 석문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은 9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九峰山)이라고 하다가 신라 때부터 속리산(俗離山)이라 불러왔다. 신라의 성현 최치원은 속리산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山非離俗 俗離山(산비리속 속리산)
- 崔致遠
도리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높은 산은 세속과 떨어지지 않는데
세속은
산과 떨어져서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 사네
-일만 시조역
한문으로 俗離山(속린산)을 번역하면 俗(속)은 山(산)을 離(리)한다가 된다. 그러니까 세속이 산을 떠났다는 뜻이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속과 떨어져 있는 산이란 말과 다르다는 이야기에 나도 공감한다. 그러나 결국은 산이나 세속이 서로 떨어져 있다는 뜻에는 뿌리를 같이 하고 있지 않은가.
속리산의 어원을 이렇게 푸는 전설도 있다. 신라 때 진표율사가 이 산에 도착하였더니
들에서 논밭을 갈고 있던 모든 소가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농부들도 이에 감격하여 속세를 버리고 머리를 깎고 스님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세속을 버렸다 해서 속리산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속리산이 있어 법주사가 있고, 법주사가 있어 속리산은 더욱 명산이 되었다.
이정표를 보니 법주사부터 문장대는 5.9km, 천황봉은 5.8km이다.
서울을 떠나올 때 계획은 청주에서 화북으로 가서 '높은다리'로 해서 천황봉으로 오르려 했는데, 청주에서 화북까지는 교통편이 1일 6회뿐이다. 10시 넘어 청주에 도착하였는데 화북 행은 12시 30분까지 기다려야 한다. 할 수 없이 교통이 편한 법주사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차 길은 1시간 10여분이나 오르는 아스팔트길인데, 상수도 보호지역이라고 길과 계곡 사이에 높게 쳐놓은 철조망이 보기 싫게 계속 막아서 가고 있다.
이곳이 국립공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미관을 고려하여 높이를 낮출 수는 없는 것인가. 가다 보니, 옛날에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깃든 '목욕소'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것도 철조망 속이다. 거기는 전망대 모양으로 디귿 자로 계곡 쪽으로 약간 들어가게 만들어 관광객이 한 번은 굽어보고 가게 했어야 할 자리였다.
속리산은 유난히 새소리가 많았다. '휘휘휘 휘휘-'하고 나도 휘파람 새 소리 따라 하니 소리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 요놈이 따라오다가 '휘휘휘 휘휘- '크게 울더니 숲 사이로 날아간다. 숲 사이에 있다 하여 새라 하였는가.
철조망이 막 그치는 곳에 물 흐르는 소리 요란하고 그 바로 앞에 높이 보이는 곳이 세심정(洗心亭)이었다.
세심정은 오른쪽 산길을 따라 비로산장으로 해서 천황봉이나 문장대를 가는 길이요, 차도를 따라 복천암까지 가서 중사자암으로 해서 문장대로 가는 갈림길이다.
그러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세심(洗心)이라는 말과는 달리 여기는 세심휴게소이어서 파라솔과 의자가 식사나 막걸리를 걸치고 가라는 상혼(商魂)만이 무성한 곳이다. 안타깝게도 세심(洗心)이란 이름이, 속리(俗離)란 이름을 무색하게 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 여인들이 있다. 천주님 때문에 시집 못간(?) 수녀와, 부처님 때문에 시집 못가고(?) 출가한비구니, 신도들이다.
종교 때문에 하루도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는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만남도 있구나.
여기서 400m를 오른 지점에 25년 전에 가족과 함께 하였던 그 이름도 아름다운 비로산장(毘盧山莊)이 나를 반갑게 맞는다.
1965년에 김태환, 이상금 두 부부가 세워서 40여년 동안 운영해 오는 속리산에서는 빼놓고 말할 수 없는 한 부분이 된 산장이다.
지금은 출가하여 그때 그만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우리 세 아이들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시절이었다.
옛날에 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의 일자 건물의 방문 앞 조그만 툇마루에서 바둑을 두던 두 딸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 가족을 두고 나 혼자 문장대에 올랐던 까마득한 잊었던 옛날이 되살아온다.
'수정아, 수정아, 잘 가-'하던 이 산장 주인의 딸의 부르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지금 그 딸은 서울에서 살고 있고, 그 언니 되는 곱살하게 늙고 있는 이 집 큰딸이 늙으신 친정 부모의 산장 일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 집을 지켜주는 업 같은 큰 바위에는 넝쿨이 무성하고 바위 앞 긴 일자 집의 처마 밑 벽에는 이제는 80이 훨씬 넘은 친정 할아버지가 붓글씨로 써놓았다는 액자들이 산장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그 사이 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 하늘을 가리고 있고, 계류를 두고 양쪽에 평상이나 의자 등의 모습이 내 마음을 붙들어서, 등산 초입에 있는 산장이지만 이곳에서 산 중의 하루 밤을 지내기로 하였다.
이 비로산장에서 제일 좋은 위치에 있는 전망대 같은 마루가 곁들인 방에서 홀로 뒹굴다가, 아름다운 산장 여주인이 차려준 산채나물 백반과 여기 특유의 불노주를 마시며, 나방이 뜰 끓고, 이 집의 업이라는 두꺼비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가는 산장에서, 잊어버린 옛날을 안주인과 나눈다는 것은 즐거운 낭만이었다.
3. 문장대 오르는 길
산꾼이 산에서 자고 남보다 더 일찍 출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5시도 되기 전에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조심 비상식으로 준비한 선식(仙食)이라는 미수가루를 물에 타 먹고, 보온통에 물을 채우고 비로산장을 나섰다. 길가엔 뱀딸기가 빨갛게 익어 있는 첫여름 새벽이었다.
여기서 곧장 경업대로 오르는 길은 옛날에 가본 길이므로 세심정까지 다시 내려가서 복천암쪽 길을 택하였다.
이른 아침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혼자 가고 있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다. 새냇물 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낯선 길을 거닌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산새가 우는 산길이어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세심정 쯤에서 수석(壽石)이라 생각되는 돌 하나를 주워 가지고 한동안 망설였다.
크기 한 뼘 정도의 이 놈은 과연 가져갈 가치가 있는 돌인가 해서이다.
아무리 속리산 산행을 기념 하는 수석이라 해도 정상까지 지고 오르내려야 해서다. 눈썹 무게 만한 것이라도 버려야 하는 산행 길에 이 돌은 2kg이나 되었다.
그러나 수수천년 동안 속리산 금강골 흐르는 물에서 부닥치고 뒹굴면서 약한 곳이나 모난 곳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조금도 흠이 없이 연마된 것이다.
이 돌은 비석 같은 몸뚱이에다가 물형 무늬가 있고 좌골도 깊숙히 패어있다. 가져 가면 이 또한 마누라의 잔소리가 되지나 않을지-.
복천암 막 못 미쳐 다리 하나가 있는데 '이 뭣고 다리(是心마橋)'다. 한자를 순서대로 읽으면 이(是), 마음(心), 무엇(마), 다리(橋)니 절 앞에 있는 다리 이름으로 장난삼아 지었을 리도 없고, 화두(話頭)로 지은 이름 같다. 불자들이 말하는 선문답처럼-.
↑갔다가 ↓오고
→로 갔다 ←로 가고
?하다가 !하고
!하다가 ?하더라.
이 뭣고
묻는 이들아
뭣고가 뭣고지 뭣고
-이 뭣고
복천암에 다다르니 정진 중이어서 출입금지란다. 이럴 때 더 들어가 보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문앞까지만 가서 사진 한 장 찍는 것이야 어떠랴.
복천암은 법주사 암자 중 가장 큰 암자로 그 위치가 속리산의 배꼽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말티재를 넘어온 세조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신미대사등가 함께 사흘을 묵으면서 법회를 하고 갔다는 곳이다.
세조가 피부병을 앓게 된 이유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린 왕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을 때다.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형수 현덕왕후가 현몽하여서 세조 얼굴을 향하여 침을 뱉었는데, 침이 튄 그 자리에 피부병이 생겼다는 것이다.
용휴게소에 이르니 뜸뿍새가 울고 있다. 끄르르르- 하는 새소리 같지 않은 소리도 들려온다. 이제부터는 차길이 끝난 오름길이다.
1시간이나 천천히 올라왔는가 하는 지점에 문장대1.3km, 중사자암 이정표가 있다. 어디로 간다? 이럴 때 물어 볼 것이 있다. 흐르는 땀을 막으려고 머리에 두르고 온 구겨지지 않는 아까 산 지도 등산 스카프다.
중사자암에 이르니 등산로에 빗겨 있는 절이라선가.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삐뚤어진 층 계 옆 축대 밑에 연분홍 모란꽃이 하늘하늘 피어있었다.
절마당 끝에는 커다란 마당바위가 있고 그 끝에서 속세를 바라보고 비석 하나 서 있다.풍우에 글이 모두 마모된 비신이 사자모양 얼굴의 거북 등을 타고 서있다. 그래서 절 이름이 중사자암인가 보다. 그렇다면 소나 대사자암은 어디에 있는가.
화장실 뒤로 오솔길이 있어 가보니 지름길이었다. 혹시나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가 하며 노심초사하다보니 한참만에 냉천골류게소가 막아선다. 가개 전체를 푸른 포장으로 빙둘러 놓은 곳이 보기에 흉하다. 외국인과 함께 왔다면 얼마나 챙피했을까.
그래도 자연보호한다고 '흡연금지. 50만원 과태료'를 써붙였다.
돌길을 오르보니 두꺼비 한 마리가 물끄러미 힘겨운 나의 등반을 지켜 보고 있었다.
새소리 계류소리
바람소리 따라서
내 어머니의 역마살의
벼르던 속리산 길
나는요
산 속에 갇힌 행복한 포로입니다.
문장대와 정상휴게소가 보이는 위치에서 나의 카메라는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옛날에는 이곳이 정상인 줄 알고 그냥 내려가던 곳이다.
문장대 정상휴게소 주인의 좋은 인심 만나 거기서 자란 신선초, 곤달리. 당귀잎, 참나물로 쌈을 싸 걸죽한 동동주에 안주해 먹은 후 문장대에 올랐다.
문장대를 옛날에는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라 하던 것을 세조 임금이 목욕소에서 목욕하고 이곳 감로수를 마시며 치병할 때 문무시종과 날마다 이 대상에 올라 시를 읽었다하여 문장대(文藏臺)라 칭하게 되었다 하는데,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누구든지 이곳을 세 번 올라오면 극락에 갈 수 있다니, 나는 오늘이 3번째이니 극락은 맡아놓은 당상이로구나.
문장대는 10여년 아내와 함께 왔을 때보다 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정상을 향한 길은 오르고 내리는 통로가 구별된 멋진 철쇠다리로 바뀌어 있었다.
평일의 오전이라선가 나 혼자뿐이구나 하는데, 나도 있다고 청설모 한 마리가 겁없이 1m 이내로 접근한다. 그때는 몰랐었는데 '아하, 청설모가 무얼 얻어 먹으려고 내 주위를 맴돌았었구나' 뒤늦게야 깨달았다.
정상은 모두가 바위로 50여명이 머무를 수 있는 곳으로, 물이 고일 수 있게 움푹움푹 패여 있는 것이 수석에서 알아주는 호수석 같다.
저 멀리 왼쪽으로부터 우뚝 선 것이 오늘의 목적지 속리산의 정상인 1058.4m 천황봉이고, 그 다음이 비로봉, 약간 커다란 봉우리가 문수봉이고, 내가 가야할 능선이었다.
4. 문장대에서 5km의 천황봉 주능선에서
앞 서 간 사람도 없었고 뒤에 오는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나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과, 내 아내의 역마살뿐이다.
남자라는 것, 74kg의 내 덩치, 171cm의 내 키, 고희를 앞둔 내 나이는 심심산천에서 혼자라는데 아무런 두려움을 없게 하였다. 오히려 한없는 나와의 속삭임으로 정다운 이와 함께 하였을 때보다 더 좋았다.
아침에 떠나온 세심정에서 여기 문장대까지는 3.3km이고, 다음 목적지 신선대까지는 1.1km, 천황봉까지는 3.4km이지만 능선길로 이제부터는 탐승길이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다.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이다가 내리막길이고 그리고 능선 길이다.
사람이 골짜기에 있으면 人+谷= 俗인데, 사람이 산에 있으면 人+山=仙 신선이 되니, 골짜기를 버리고 문장대에서 신선대를 향하는 길에 있으니 나도 신선이 아닌가.
신선대 가는 길 같은 절경과 절승을 대할 때마다, 내가 젊어서부터 사진을 찍어온 것이 오늘 같은 날을 위함 같아 행복하다.
다시 또 올 수 없다고 느껴지는 이렇게 아름다운 신선대가는 길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갑자기 내 앞을 막아서 빤히 나를 내려다 보는 것은 신선대휴게소였다. 이상하게도 속리산의 휴게소는 거의가 다 찾아가는 명승지의 길목을 막아서고 있다. 명승지가 먼저가 아니라 휴게소가 먼저다. 여기를 찾는 외국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를 바라볼까.
신선대휴게소 의자 옆에서 본 신선대의 모습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모습이 도포 입고 두건 쓴 옛선비 모습을 대하는 것 같다.
신 선대를 지나니 아깝게도 올라온 길을 버리고 내림길이 시작되는데 지금까지의 돌길을 버린 흙길로 오솔길 양옆에 산죽이 연속된다.
분명히 길은 길인데 도저히 서서는 그냥 지나갈 수 없는 그래서 앉은 자세로 포복하듯이 지날 수 있는 석문을 간신히 벗어났더니 거기가 바로 해발 1003m라는 입석대다.
전설에 의하면 임경업장군이 속리산에서 독보대사(獨步大師)를 모시고 7년 동안 무술연마를 하다가 도력의 힘으로 세웠다는 바위다.
전설이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지만 옛사람들의 지나친 과장이 오히려 보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속리산에서 느끼게 되는 좋지 않은 경험 또 한 가지는, 이정표가 있을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카메라를 메고 촬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다니면서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터인데 입석대에 이르고 보니 문수봉, 청법대를 지나친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로봉을 지나쳐 버렸다.
이것이 청법대인가.
여기가 문수봉인가
이름이 있음 직한 이 바위는?
가서 사진까지 찍고 온 사람으로서 사진 찍은 순서로 어렴풋이 유추해 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5. 천황봉 가는 길
'→천황봉1.1km, →법주사4.6km' 이정표를 조금 지나서 천왕봉에서 온다는 무거운 짐을 진 산꾼을 만났다.
5월 19일 지리산 천왕봉을 출발하여 8월 초 진부령까지 목표로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다는 40대 초반의 한병석씨다. 등산 가방에 링게르 모양의 파이프가 있길레 그게 무어냐고 물었더니, 등산에서 제일 중요한 6kg의 물주머니 줄로 필요할 때는 언제나 늘어진 파이프를 통해 물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텐트를 지고 미수가루를 비상식으로 하고, 핸드폰은 자체 충전을 하고 있었다.
커피와 술과 문장대 휴게소에서 얻어온 산나물을 주니 반색을 한다. 컴 관계 일을 하다가 백두대간 종주를 위해 직장까지 그만 두었다길레 얼마나 가지고 떠나 왔냐고 살짝 물으니 30만원이란다. 바쁠 것도 없고 해서 하루 10km씩만 간다고 했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밤은 어디쯤 가서 어느 산속에다 텐트를 치고 자고 있을까? 그는 지리산 천왕봉으로 해서 속리산 천황봉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드디어 천황봉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침에 떠나온 문장대는 이제는 먼 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천황봉에서 그대로 직진하여 4시간 정도 걸으면 원래 계획하였던 장작각폭포, 금란정을 지나 상오리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나 청주행 버스를 타려면 거기서 택시를 불러 타고 간다해도 하루 밤을 유하여야 할 시간이기 때문에 세심정으로 다시 원점 회귀 산행을 할 수밖에 없다.
천황봉에서 상고암 쪽으로 가다보면 배석대(拜石臺)가 있다는데 표지판이 없어 지나치고 말았다. 신라 진평왕 때 덕만공주(뒤에 선덕여왕)과 법승(法昇)왕자가 이곳에 올라와 경주 쪽을 향하여 매일 아침 나라의 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위하여 절을 올릴 때였다. 이를 본 바위가 함께 절을 하다 바위가 되어서 절 拜(배) 돌 石(석) 배석대(拜石臺)가 되었다는 바위라던데-.
'→법주사 4.6km/←0.2km상고암' 이정표에서 피곤하여 그냥 갈까 하다가 하다가 언제 다시 오랴 하고 상고암(上庫庵)을 들렀다.
절 이름에 고간 庫(고) 자가 이상해서 알아보니 옛날 법주사를 지을 때의 자재 창고였던 곳이 후에 암자가 된 것으로 중고(中庫), 하고(下庫)가 더 있었으나 70년대에 없어지고 상고암(上庫庵)만 남은 것이다.
상고암은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법주사에 딸린 신라 성덕왕 19년에 창건한 암자로 여기서는 법주사의 모든 것이 한 눈에 보인다.
인적이 드문 탓인가. 극락전 법당 문을 열고 합장 인사하는 분이 있다.
갑자기 아내 생각이 났다. 산을 좋아하면서도 나의 산에 대한 한없는 욕심을 따르기에는 이제는 힘이 부쳐서 집에 두고 온 아내가 생각난다.
아내가 불자라서 불전을 놓고 가고 싶다고 일만원을 드리고 왔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아내에게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 중에 나를 기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좋게 하는 말이겠지만 아내 편에서 보면 부정적인 사람에 속한다는 말이다.
젊어서는 병든 아버지를 둘째 며느리인 아내에게 맡기고도, 집안에서 남편 몫과 아내 몫의 일을 분명히 가르며 살았다.
술을 목숨을 걸고 마시고 다니면서, 등산에 낚시에 사진에 비디오에 햄에다가 역마살까지 가추어 내 위주로 살아온 사람이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항상 떠돌았고, 늙어서는 문학을 합네- 하고 언제나 컴퓨터 앞에 살지마는 이름 없는 무명 작가라, 글로 인한 소득 하나 없이 글만 쓰듯이 그렇게 돈만 쓰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걸 속죄하기에는 일만원이란 턱없이 부족한 불전이지만 어쩌랴 나의 호가 일만(一萬)인 것을-.
절 입구를 자세히 보니 커다란 거북이 한 마리가 그 앞에 마애불상을 우러르고 있다. 마애불상도 다섯 분이나 모신 암벽이었다.
산을 올라갈 때에는 힘이 들어서 천천히-요, 내려올 때는 피곤해서 또 천천히-다.
그러나, 천천히 가는 것이 멀리 간다는 속담처럼 삼환석문에 이르렀다.
속리산에는 8봉, 8대가 있듯이 8석문이 있다. 석문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것이 상환암인데 섭섭하게도 이런 간판이 있다.
"참배객 이외에는 출입을 금합니다."
이럴 때 선남선녀 못된 우리는 섭하다. 우리가 함께가 되지 못한 것보다 산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찾이하고 자기들끼리만 독점하는 듯해서 억울해서다.
참선 중이거나 선원이어서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우리나라 명산 대찰을 찾아 기도 드리며 다닐 때, 이곳에 와서 기도하다가 기쁨을 가지고 돌아가서 임금 上(상) 기쁠 歡(환) 상환사(上歡庵)라고 알고 있는 곳인데-.
요번엔 오기로 올라갔지만 행여나 들킬세라 사진 찍고 물을 담고 줄행랑을 쳐 쫓기듯이 내려왔다. 뒤에서 주지 스님이 지팡이를 들고 달려오는 듯했다.
아침에 수석을 주웠던 세심정에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벼르다가 온 속리산과 나와의 이별을 이제는 고할 때다. 더 가야할 산이 있고, 더 만나야 할 한국의 산하가 있고, 더 늙기 전에 가 보아야 할 나라들이 있기에 아무래도 속리산과의 인연이 요번이 마지막인 것 같다.
이 돌로나마 때때로 나의 오늘을 찾으며 이 돌의 고향을 자주 생각해 볼까 보다.
갔다 와서도
다시 또 찾아가서도
언제나 바위처럼
산과 함께 살고 싶어
산처럼
바위를 곁에 두고 싶어
산 길에 뒹구는
돌맹이 하나
수석이라 주워 왔더니
오석(烏石)이 아니라 한다.
경석(景石)도 아니라 한다.
물형(物形)도
석질(石質)도 없는
나 같은 평범한 돌멩이라 한다.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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