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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09-04 20:52
 조회 : 1,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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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위 진록(수필가)
2003년 8월 15일 저녁 8시, 서울 독립문이 있는 언저리 구(舊) 서대문 형무소 자
리 광장에서 한 음악회가 열렸다.
나 자신은 해방 직후 서대문 형무소 정문이 보이는 곳까지 가 본 일이 있으나 그
후, 60년 가까이 다시 가 볼 기회가 없었던 탓으로 그 자리가 어떻게 변하였는지
상상할 수 없다.
사람들은 서대문 형무소를 ‘유서(儒書) 깊은 곳’이라고 말하지만 ‘유서’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서대문 형무소의 과거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 너무
나 어둡고, 칙칙하고, 아프고, 한스럽다. 일본 통치 하에서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
립 운동가들이 갇혀, 혹독한 고문에 신음하고, 피를 흘리고, 혹은 형무소 내(內
),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1945년, 한국이 일제 치하에서 풀려난 후에도 서대문 형무소는 사상범, 정치범
등 이른바 양심수들의 수난의 현장이었다. 물론 일반 범법자도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대 한국 범죄사의 축도(縮圖)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으나 서대문 형무
소는 민족의 한이 맺혀있는 곳이다.
그 자리에서 열린 음악회, 야외이고 공연의 여건이 결코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
고 수천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이 날 연주된 음악은, 김규환의 교성곡 ‘조국’
. 서울시 교향악단, 서울 필하모닉 오페라합창단, 서울시 합창단이 협연하였다.
작곡가 김규환은 팔순에 접어 드는 원로 작곡가이다. 동요, 가곡, 합창곡을 통해
서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기억하고 있다. 감동을 이끄는 멜로디는 김규
환의 음악의 뛰어난 특성이며, 그래서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어왔다.
그리고 이 날, 연주된 교성곡 ‘조국’은 이 노(老) 작곡가가 1953년부터 2003년
에 걸쳐, 실로 반세기 동안 심혈을 쏟은 작품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과 고난을 점철하며 희망찬 조국의 미래를 노
래한 작품이다. 뜨거운 가슴이 아니고서는 지어낼 수 없는 음악이다.
나에게는 ‘잃어버린 노래’라는 수필집이 있다. 1993년에 발간된 이 수필집에는
60여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 ‘잃어버린 노래’라는 제목의 수필이
들어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나는 수필집이 나올 때마다, 그곳에 수록되어
있는 수필의 제목 하나를 뽑아서 책의 제목으로 삼곤 하였다. 60여 편의 제목 중
에서 마음에 드는 제목을 골라 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짤막짤
막한 글이지만, 거의 모두가 상당한 기간 마음속에 품고 키워온 글들이다. 말하자
면 산고(産苦)를 겪음으로써 햇빛을 본 글이고, 그 제목 억시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정해진 것이다. 갓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거나 다를 게 없다. 고작 해야 수
필의 제목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나 글을 쓴 사람으로서는 제목 하
나하나에 애착이 있고 사연이 있는 법이다
‘잃어버린 노래’에도 오래된 사연이 있다.
1948년, 우리 민족이 역사상 처음으로 참가한 런던 올림픽대회에 선수들을 파견하
면서 그들의 장도를 축하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정부가 전국적으로 ‘올림픽의 노
래’를 공모한 일이 있다. 이 때, 1등에 당선된 것이 바로 교성곡 ‘조국’을 작
곡한 젊은 날의 김규환이었다.
이 ‘올림픽의 노래’는 KBS 가창(歌唱)지도 시간을 통해 매일같이 전국에 방송되
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색은 빛난다,
무대는 열린다.
승리의 월계관 쓰는 자 누구냐.
오, 아름다운 나라, 아름다운 사람.
그대의 이름을 높이 걸고서
평화의 왕좌에 어서 오르라.’
산뜻하면서도 당당한 행진곡풍 곡조 속에 향긋한 서정적인 아름다운 멜로디가 흐
르는 이 노래를 나는 무척 좋아하였다. 그 때, 내 나이 갓 스물, 이미 KBS 아나운
서로 일하던 나는 요새 말로 이 노래에 뿅 갔던 모양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어쩌다가 소리 높이 노래할 때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1948년 이후, 이 노래를 들어 본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1950년에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아온 탓으로 이 ‘올림픽의 노래’가 한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아 왔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52년 헹싱키, 56년 멜버른, 60년
로마대회를 거쳐 세월이 흐르면서 김규한의 ‘올림픽의 노래’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나라에서 공모하여 나라에서 제정한 ‘올림픽의 노래’가 그렇게도 맥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하고 생각해 본 것이다. 국민이 그렇게 사랑한 아름다운 노래가
삽시간에 자취를 감춘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김규환은 해방 후, 남으로 탈출해 온 북한 출신이다. 김규환은 학벌의 배경이 없
다. 음악계를 휘어잡고 있는 이른바 , 보스들에게 아첨할 줄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곡이나 편곡에 있어서 그의 실력은 월등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물론 나 자신의 추측이다. 그러나 한국 음악계에는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하는 풍토가 엄연히 존재하였고, 그런 풍토가 노래 한 곡쯤 깔아뭉개는 것은 그렇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의 수필 ‘잃어버린 노래’는 그런 풍토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판이었고 분노였
다. L.A에서의 ‘잃어버린 노래’ 출판기념 때, 이미 글의 내용을 아는 작곡가로
부터 항공편으로 ‘올림픽 노래’의 악보가 우송되어 왔다. 출판기념회에 모인 사
람들이 함께 불러보면 어떻겠느냐는 짤막한 메모가 악보에 붙어있었다. 작곡가의
말대로 이날 밤, 참석자에게 악보가 배포되어 모두가 ‘올림픽의 노래’를 불렀다
.
서대문 형무소자리에서 교성곡 ‘조국’이 연주되던 날, 나는 작곡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축하합니다. 드디어 오늘이라면서요?” 하고 물었다.
“아이구, 난 누구라구? 그렇지않아도 현장에 나가려던 참인데… “
“선배님, 성공을 빕니다.”
“고마워요.”
작곡가 김규환은 나의 평양사범학교 1년 선배다. 학교 브라스밴드에서 같이 관악
기를 다루었다. 그런 관계로 내가 한국을 떠난 후에도 변함없는 우정이 오갔다.
서울에서 나의 수필집 출판기념회가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와서 조용히 기다리곤
하였다.
수필집 ‘낙타의 속눈썹’ 출판기념회 때였다. 모임이 끝날 무렵, 묵직한 큰 봉투
를 나에게 건네면서, “이거 내 교성곡 ‘조국’의 악보인데 한 번 읽어 봐요.”
하는 것이었다.
전 7장으로 구성된 교성곡 ‘조국’은 1953년에서 1982년까지 30년에 걸쳐서 5장
까지가 완성되었고, 6장과 7장은 최근에 완성되었으니까, 그 때, 내가 받은 것은
1장부터 5장까지의 총보(總譜)였다.
이런 사연이 있었던 만큼 교성곡 ‘조국’의 초연이 대성공이었다는 소식을 들었
을 때의 기쁨은 형용키 어려웠다. 음악잡지인 ‘음악춘추’ 10월호에서 음악평론
가, 이상만은 우선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에 언급하면서, “우리 뇌리 속에 못
박힌 애국가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작곡한 ‘한국 환상곡’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
다”고 지적하고, “우리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베르디의 ‘이탈리아 찬
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과 같은 애국적 찬가에서 감동을 받는 것은 대
중성은 물론, 작곡의 완벽성에도 기인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김규
환의 ‘조국’은 모든 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라고 논평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김규환의 생명은 아름다운 멜로디에 있다. 교성곡 ‘조국’의 생
명력도 여기에 기인한다. 김규환은 이제 국민적 호응을 받는, 대(大) 작곡가임이
확인되었다.”고 말하였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또 읽으면서 “선배님 축하합니다, 선배님 자랑스럽습니다.
” 하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반가운 소식은 또 있었다. 김규환의 교성곡 ‘조국’이 2004년 8월 15일,
이번에는 내부수리가 끝난 세종문화회관에서 작곡가가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연주
된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순간 나는, “반드시 간다. 서울로 가서 교성곡 ‘조국’을 듣는
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고 말았다. 가서, 멀리서 많은 청중 속에서 아름다운 음
악을 들으며 지휘대에 선 노 작곡가의 굽은 등을 보면서 그 때, 이 늙은 얼굴이
눈물로 얼마나 구겨질지는 모르나 가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나는 이미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골프를 중단하였다. 노자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외식도 줄여야 하고 개스 값도 절약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맞이하는 2004년은 내 생애에 더없이 소중한 순간순간을 체험하게 하
는 그런 해가 되리라 믿는다.“
* 이 글은 2004년, L.A의 신문, <코리언뉴스> 신년 특집호에 실린 글임.
그들만의 약속이었습니다.
위의 글을 쓰신 위 진록 선생은 조국을 떠 난지 56년이 흘러 “조국”의 의미는 더욱 새로울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2004년 8월 15일, 광복절에 교성곡 “조국”은 연주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교 1년 선후배 사이인, 80의 두 노신사는 말로 하지 않은 마음으로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2004년 가을, 그 해 “조국”은 연주되지 않았으나, 위 진록 선생의 출판기념회에 김 규환 선생은 “님이 오시는지”, “남촌”등을 후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피아노 삼중주를 지휘해 주시던 모습이 또한, 그들의 마음의 약속이었습니다.
비록, 우리나라 교향악단은 아니지만, 오라토리오 “조국”을 극찬한, 덕양 어울림 극장의 총 감독 이상만 선생의 주선으로 타타르스탄 교향악단의 연주로 “조국”은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실로, 50년에 걸쳐 완성된 “조국”은 어떻게 우리 곁에 다가 올까?
김 규환 선생은 그의 가곡, “님이 오시는지”에서,
“물망초 꿈 꾸는 강가를 돌아
달 빛 먼 길 님이 오시는지,….”
2006년 9월 28일 덕양 어울림 극장에는 그들의 “님”이 오십니다.
“조국”에 부쳐
50년을 돌고 돌아
고운 님 오십니다
활활 타는 가슴은
변치 않는 약속으로
조국은
7천만의 명제
잃을 수 없는 그 노래
이 글을 쓰는 필자는 두 분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위 선생님과는 동기이고, 김 선생님의 1년 후배의 아들입니다. 두 분의 변함 없는 우정과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계신 “나라사랑”을 옆에서 보아왔습니다. 미국 LA에 사시는 위 진록 선생님은 “조국”의 공연을 보시려 2006년 9월 하순에 서울에 오십니다.
“조국”은 두 분의 우정입니다. 약속입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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