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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2-27 14:59
강영우 박사를 보내며 :석은옥씨의 고백
 글쓴이 : (사)시진회
조회 : 2,044  

 
 
석은옥씨의 고백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
그의 뒤에는 한평생 그의 지팡이가 되어준
 
아내 석은옥씨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석은옥씨가 직접 말하는 감동 인생.
 
최고 엘리트였던 내가 앞 못보는 남자와 결혼,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온 감동 인생 사연
 
이제 우리 부부는 인생 육십을 넘겼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의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그 후 자원봉사자로 1,
누나로 6, 약혼녀로 3,
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

처음엔 고개를 젓던 사람들도 이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찬사 뒤에는 우리 부부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강영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나는 걸스카우트 신입회원으로 그를 돕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하느님께서 내게,
저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맹인 중학생이 10년 후 나의 신랑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다면 나는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때 그는 맹학교 중등부 1학년생이었고, 나는 여대생이었다
가난과 실명의 고통에 찌든 모습을 상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학생은 외모만 봐서는 전혀 맹인 같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 학생만 힐금힐금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을 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다녀오겠다
 
그 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숙대 영문과 1학년 석은옥이에요라며
나를 소개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 때인 15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맹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
안내도 해주는 일을 1년 정도 봉사하다 보니 정이 들어,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양친이 안 계신 동생이 생기니 누나로서 할 일이 정말 많았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가야 했고
 
빨래,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이었다.
 
누나 동생으로 6,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물론 아가페사랑이다.

당시엔 맹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주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그와 만난 지 5 년째 되던 해,
 
그동안 혼자만 생각해온 유학 계획을 그에게 털어 놓았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는지, 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결혼을 해서도 시각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 할텐데 더 늦기 전에 유학을 다녀와야겠다는 말에 결국
그도 동의했다.

나는 19679,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정이 든 그와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내가 떠난 뒤 동생 영우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대학 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 대필 해 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교육과에 10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19683, 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박박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 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내주었다.
 
정상인들과 같이 공부하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되었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1968
1222,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남은 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헌신하려고
준비해왔는데 그를
반려자로 맞으면 맹인 동생을 이해해 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우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친구들은 더 심했다.
어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관상을 보면 팔자가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느님이 해도 너무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으면 뭐하니?"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226,
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은 편이었고,
모두 판사, 의사, 약사, 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되어 있을 때
연하인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하객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19728, 우리 부부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LA
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유학의
결격 사유에 속했다. 
 
정규 유학생이 될 때까지
몇년 동안 겪은  마음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LA에 도착해 여러 해 동안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
 
양부모님을
만나 일주일을 보내고 피츠버그에는 개강 전날
도착했다. 당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하루는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강의가 끝난 지
30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온 힘을 다해 강의실로 뛰어가 보니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하고 부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며 화를 버럭 냈다."
 
섭섭한 마음에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미국에 와서 처음 한 부부싸움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은 보행훈련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혼자 강의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미루던 차에 결단의 기회가 된 것이다.
 
맹인 아빠에게 젖먹이 아기를 맡기고 도서관에 자료 심부름을
갈 때면 혹시 불이라도 날까 불안했지만 그의 눈이 되고 지팡이가
되는것이 먼저였다.

몸이 아플 겨를도 없이 매일 동분서주하는 고달프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수업료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이 만료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병원 청소원으로 겨우 취업이 되었는데 이민국에서 노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민하던 어느 날, 캠퍼스 근처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한 맹인 여성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다가가 한국에서 유학 온 맹인 학생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을 걸었다. 과부가 과부사정을 안다고,
우리 사정을 이해할 것 같아서 초면에 우리 형편을 털어놓았다.
 
그 부부는 우리에게 자기 집 3층을 내줄 테니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대신 식사 후 설거지를 해주고, 두 내외가 외출할 때 어린
두 자녀를 돌봐달라고 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가족의 생계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집에 살면서 매일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해도
행복하기만 했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박사가 될 남편을 내조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주관 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또 두 살 된 진석이도 네 살, 다섯 살이던 그 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둘째 아이 진영이가 생겨 더욱 감사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절대 좌절하거나 울지 않았다
 
맹인이기 때문에 넘어야 할 물리적, 심리적, 법적, 제도적 장벽을
넘을 때마다 오히려 성취감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

1976
425, 남편이 드디어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당국의 배려로 박사복을 입은 남편을 총장 앞으로
안내하면서
 
 “마음껏 사랑하고 즐긴 것은 결코 잊히지 않으며,
 자신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생각났다.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때로는 희생을 요하는 힘겨운 내조를
할 때도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취를 나의 성취로, 그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학사복을 입었지만, 남편이 받은 박사학위가
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느껴져 더 행복했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편은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직자로 8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맹인이 어떻게 눈뜬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논문지도를 할 수 있겠느냐며, 어디에서도 남편을 채용하지
않았다.
 
무직자인 박사 남편, 아직 어린 진석이, 갓 태어난 진영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형편이었다.

장학금으로 지급되던 생활비가 졸업과 동시에 끊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성공의
조건으로 바꿔주실 테니 인내하며 좀더 기다려봐요.
 
부디 아무 걱정 말고 연구에 몰두하고 직장 찾는 노력이나
계속하세요.”

하루는 나의 격려가 통했는지 남편이 면접을 다녀오더니 취직이
되었다고 했다. 기적이었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1
3일 첫 출근을 하게 되어 서둘러 인디애나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인디애나에 도착해 남편의 첫 출근과 함께 나는 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흘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동안 무사고 운전으로 남편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조하는 기쁨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보람이 엔도르핀을 나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대
 
남편이 인디애나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12년 가까이 되던 1987
9, 유학을 떠난 지 16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 언론은
 
우리나라 최초 장님 박사 탄생’, ‘한국 최초 맹인
박사 금의환향 등의 제목으로 남편의 귀국을 대서특필했다.
 
그때 그 기사를 본 연세대 윤형섭 교수가 <조선일보>에 평균점수라는
제하의 칼럼을 썼다.
 
그 뒤에는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며 부인의
희생적인 사랑과
내조가 있었으며 이는 한국 여성의 점수를 올려주었다는 것이다.

1983
65일은 남편이 최초로 국제무대에 등단한 날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로터리 세계대회에서 그가 연설을
한 것이다.
 
16000명의 세계 민간 지도자가 모인 단상으로 남편을 안내하는데,
연설자도 아닌 내가 극도로 긴장해 떨기까지 했다.
 
그는 수많은 군중의 시선을 볼 수 없어서인지, 긴장하지
않고 연설했다 그리고 남편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민자로 정착한지 사 반세기 만에 남편은 연방정부 최고
공직자가 되었다.
 
대통령 직속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의 지팡이가 되어 부시 대통령 앞으로 그를 안내할 때 느낀
감회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불쌍한 맹인 중학생을 안내하기 시작한 지 40,
이젠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안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강점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하나의
팀으로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이민자로 미국 땅에 와서 교육자의 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교육인명사전에 올라 역사 속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지난 2003529, 내 생일에 아들 며느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축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남편이 말했다.
 
아들, 며느리 네 명의 박사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니
 
당신 정말 행복하겠소.”
진영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잖아요.”
그렇다. 한집에 다섯 명의 박사가 있는 것이다.
 
그의 지팡이가 되어 헌신적인 아내로, 두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며느리들까지 본 어머니로 살아온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처럼 선명한 비전으로 내 인생을 인도해 신앙 안에서 명문가를
만드는 동반자가 되어준 남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월정오병두 12-03-05 21:18
 
창안하심속에 강령하시길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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