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잎클로버/이문자

지금 나는 파스칼의 ‘팡세’를 펼치고 있다. 책갈피에는 ‘네잎클로버’가 바스러지지 않은 채 꽂혀 있다.

사범학교 졸업 후 50년이 지난 초여름, 우리는 시내 호텔에서 제법 성대하게 동창회 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몰라볼세라, 저마다 가슴에 명찰을 달고 있었다. 명찰의 이름을 통하여 서로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얼싸 안고, 환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고 ... . 세월은 그렇게 무심히 흘러갔어도, 주름은 늘어났어도, 백발은 늘어났어도, 얼굴의 윤곽만은 남는 법. 군데군데서 서로 덕담도 나누고 있었다. 왜 다들 늙지 않았으랴만, 서로 덕담을 그렇게 나누고 있었다.

“넌 하나도 안 늙었어. 여전히 이쁘구나!”

재잘댐이 잦아들자, 초대가수들이 ‘만남’, ‘네잎클로버’, ‘옛 생각’, ‘고향의 봄’, 등을 연달아 불러 주었다. 다들 따라 불렀다. 나처럼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는 친구들도 많았다.

차례차례 테이블로 돌아가서 자리에 앉았다. 건너 건너편 테이블에 곱상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옛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 테이블로 갔다.

“정자 맞지?”

“너는 문자?”

정자는 들고 온 책을 펼쳐 보였다. 갈피에는 네잎클로버가 있었다. 그녀는 역시 그녀다웠다. 모임에 오기 전에 놀래줄 궁리를 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 때 함께 즐겨 읽던 파스칼의 ‘팡세’가 생각났고, 그 책을 펼쳐 보물(?)을 기어이 찾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문자야, 생각나니? 우리 사범학교 운동장 옆 숲속 ... . 으로 시작하여 기억을 환기시키고 있었다. 금세 시계바늘은 50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참말로 그랬다.

점심시간이면 둘은 ‘네잎클로버’ 노래를 부르며 그곳에서 네잎클로버를 찾곤 했다. 그때마다 행복을 꿈꾸곤 했다. 우리는 다가올 장래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는 꿈을 간직했다. 나와는 달리, 그녀는 책갈피 속에 그렇듯 네잎클로버를 간직했고, ‘행복’을 실천해 나갔다. 나는 사범학교 수석으로 입학했고, 그녀는 3등으로 입학했다. 그러했음에도 우리가 걸었던 길은 사뭇 달랐다. 내가 곧 바로 교직 생활을 시작한데 비해, 정자는 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의 길을 뒤로 미루고 상경했다. 꿈 많은 가시내는 서울대학에 다니는 오라버니를 따라 그렇게 서울로 갔다. 이화여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런 그녀가 시인에다 문학박사에다 교수에다 줄줄이 꿰찼다. 시집이며 시조집이며 에세이집이며 여러 장르의 책들도 엮었다. 그날 꿈을 이룬 그녀가 새로 낸 시조집이라며 예쁘게 사인까지 해서 건네주었다. 참으로 장하다.

아마도 그녀가 네잎클로버를 책갈피 속에 50년이나 간직할 수 있었기에 그러한 것들을 성취할 수가 있었으리라. 그날 ‘네잎클로버’는 바스러지지 않은 채 책갈피 속에 꽂혀 있었다. 그녀는 “생각나니? 그 때일?”하며 하나하나 추억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는 잃어버렸던 시간의 양떼를 차례차례 불러들이고 있었다. 아니, 향긋한 네잎클로버 꽃향기를 다시 피워내고 있었다. 둘 다 문학 소녀였더라도, 나는 나누어 가졌던 ‘팡세’와 ‘네잎클로버’를 잊어버렸지만, 그녀는 오롯이 갖고 있었다.

소중했던 우정도 책갈피 속에 그렇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소녀다운 아니, 그 분야에 대가다운 모습이었다. 이제는 칠순 나이가 되어 그녀도 나처럼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지만, 볼수록 품위가 있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을 닮아, 책갈피 속 네잎클로버도 퇴색은 되었으되, 향기는 더 진한 듯하였다.

그날 그녀는 그 네잎클로버를, 그것이 꽂혔던 ‘팡세’ 책 째로 나한테 선뜻 선물로 주었다. 덕담도 빠뜨리지 않았다.

“문자야, 이젠 너 차례야. 너는 우리의 히로인이었잖니?”

참으로 고마운 아이다. 나는 풀밭에서 네잎클로버를 찾다가 지쳐, 털썩 주저앉아, ‘네잎클로버’노래를 불렀다. 다시금 노래를 부르고 싶다. 다시 네잎클로버를 찾으러 나설 테다. 이번엔 글 스승을 찾아 나설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