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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9-24 09:05
 조회 :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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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시조문학. 2012. 가을호)
시상의 포착과 전개 양상
김 석 철
전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예술은 아름다움의 표현 및 창작이다. 문학은 언어로, 미술은 선과 색채로, 음악은 소리로, 춤은 율동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예술인 것이다. 그렇다. 시, 시조는 문학의 장르로 언어예술이다. 시는 그 형태에 따라 자유시와 정형시로 나누는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시조는 정형시이기에 정해진 틀이 있다. 따라서 그 틀은 율격을 이루면서 아름다움을 형성하게 되는데 틀에서 벗어난 작품은 시조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시조를 읽다가 보면 무엇보다도 율격의 생동감에서 오는 리듬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율격은 우리 민족의 선험적 관습 체계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러니 시조의 질서는 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레 민족성에 의해서 형성되는 질서인 것이다. 이제 시조는 우리의 자랑스런 브랜드 ‘한국시’이기에, 국민 누구나가 시조를 아끼고 사랑하여 생활화, 대중화, 세계화가 되도록 힘써 나가야 할 것이다. 이웃 일본에서는 자기 나라의 전통시 당카〔短歌〕의 전반부인 ‘5,7,5’의 3구 17음으로 이루어진 ‘하이쿠’를 국민시로 정하여,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전국민이 짓고 애송하며 크게 붐을 형성하여 오늘날 세계무대에까지 자주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시조는 한시와 가사, 민요와 함께하면서도 그들과 뚜렷한 변별력과 대응력을 지닌 장르인 것이다. 그러기에 시조가 자유시와도 변별력과 대응력을 지니지 못한다면 시조의 존재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문학성, 예술성이 3장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필자만의 기원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시조를 가까이 하려면 시조의 형태에 대한 이해는 물론 창작상의 여러 기법들도 숙지해야 할 일인데 이번 호에서는 우선 시조 창작의 기초가 되는 ‘시상의 포착과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럼 먼저 여름호(통권 제183호)의 앞부분 <소시집>란에 실린 김사균, 신길수 두 시인의 단시조 중에서 한 수씩만 골라 살펴보기로 한다.
어쩌다 맺힌 인연 하필이면 풀잎인고
목이 긴 비구니의 염주로나 꿰일 것을
햇살이 살침을 쏘아 바람으로 띄운다.
- 김사균, 「이슬」 전문
시조는 단시조(短時調)부문에 단시조(單時調)와 연시조가 있을 것인데, 김 시인은 꼭 단수(單首)만을 고집스럽게 쓰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번 여름호에 실린 단시조 30여 편을 선보이고 있는데 모두 함축과 절제의 미덕으로 승화된 서정의 꽃밭을 이루고 있는 느낌이었다. 위 작품에서도 보여주듯이 기교를 부리지 않는 소박성과 시상의 진솔한 표현이 김 시인의 개성임과 동시에 시적 성실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대하게 되는 ‘이슬’이라는 소재에서 포착한 김 시인의 시상은 새로움을 수반하고 있다. ‘이슬’에서 “목이 긴 비구니의 염주”를 유추해낸 것이다. 시적 대상을 단지 가시적 상태의 감각적 인식의 단계를 넘어 대상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생명력을 파악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슬’의 의미는 ‘허무함’이나 ‘덧없는 목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아닌가. “목이 긴 비구니의 염주로나 꿰일 것을/ 햇살이 살침을 쏘아 바람으로 띄운다.” 이렇게 탄생의 인연에 따라 운명이 정해지는 자연의 섭리에서 우리는 순리의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소곳 여민 손길 사랑으로 열리거니
인고의 삶마저도 여기서는 잠시 묻자
모정의 타오르는 정 길을 닦고 있구나.
- 신길수,「모정」 전문
신 시인은 36편의 단시조를 싣고 있다. 모두가 장별배행으로 3장 6구 12음보를 갖추고 있는 정격시조다. 대체로 인생의 참의미와 근원적 사랑을 노래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로 깊은 사유를 잘 정제하고 다듬어 긍정의 힘을 길어 올리고 있으며, 작품에 담긴 사상이나 철학이 중량감 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일상적 소재에서 포착한 시상의 전개가 점층적으로 이루어져 그 공감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모정은 누구에게나 한없이 깊고 높은 경지의 영역이다. 모정이야 말로 무조건적인 헌신과 희생의 고고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모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눈물겹고도 사랑스런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다음 <신작특집>란에는 신작시조 60여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 단시조 1편과 연시조 3편을 골라 보았다.
울리는
소리 끝에
여운을 잡아놓고
살아온
사연 구비
올올이 풀어헤쳐
몸으로
울음 토하는
불을 품은 한이여.
- 고현숙, 「징」 전문
이 시조는 각 장의 첫 음보와 둘째 음보를 한 행씩으로 배행하고, 나머지 셋째, 넷째 음보를 한 행으로 배행하여 리듬감과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시적대상에 대한 인식의 깊이가 느껴진다. 직설적인 감상의 배설이 아닌 대상에 몰입하여 형상화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한증 격조 있는 시적 성취를 이뤘다고 본다. 시인은 ‘징’의 울림소리에서 한국적 정한의 가락을 뽑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청각적 심상으로 시상을 열어가면서 주제의 심화를 위해서 점층적으로 긴장의 끈을 당기고 있다. 한(恨)의 멍울을 풀어내는 소리랄까. 특히 우리 민족은 한(恨)의 민족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삶의 애환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라는 게 다 그러려니 하고 그냥 참으며 살아간다. ‘징’은 그 울림이 장중한 느낌의 파장으로 퍼져나가는 우리 농악기의 하나다. 종장에서 보면 징소리는 몸으로 울음 토하며 불을 품은 한(恨)으로 울려 퍼지는 것이다.
그림자도 이제는 어깨를 비켜가나
어둠의 두려움이 이슬처럼 스러짐은
회색빛 하늘에 이미 늦노을 짙은 탓에.
물 맑던 그 옹달샘 진작에 가뭄 들고
숱 많던 갈대꽃은 어디로 져갔을까
오선지 진해질수록 다정한 불감증이.
꿈속같이 걸어온 산길 물길 돌아보면
언뜻 흘러간 구름 아쉬움 없으랴만
앞 뒷날 다시 헤아려 단봇짐 쌀 일이다.
이제 무슨 황금알 얻을 일 있을 건가
종착역 멀지 않은 막차가 다가온다.
고종명 바란다마는 고려장인들 어떠랴.
- 모상철, 「비망록」 전문
모상철 시인의 연시조다. 기-승-전-결의 4연 구성으로 시상의 전개가 질서정연하게 주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각 수가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와 긴밀한 관련을 맺어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은 모 시인의 기량이라 할 것이다. 인생을 관조하며 삶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나름대로 인생관이 가미된 시조다. “비망록”은 어쩌면 오랜 삶의 경험과 연륜에서 획득한 체념과 달관의 경지라고나 할까.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깊고 오랜 숲일수록 향기는 그윽하다
비오는 날 그곳에 가면 약탕기 끓어대는
반쯤은 내려놓은 삶 말씀들을 접한다.
얼떨결 접어든 책 빛바랜 갈피에서
추억을 박제한 듯 끼어있는 잎새 한 장
뉜가의 축하 메시지 따뜻함을 전하고.
호주머니 사정이 좀 가멸차지 않더라도
빈손에 들려지는 한 꾸러미 행복의 무게
가을 달 벌레소리도 그 속에 숨어있을.
따끈한 차 한 잔이 그리운 겨울저녁
노자 공자 백거이도 시문을 꺼내들고
나이를 먹는 것만큼 푸른 이끼 앉히고 있다.
- 박영식, 「보수동 책방 골목」 전문
현대시조의 특성 중에는 소재의 다양화를 꼽을 수 있다. 이렇게 평범한 소재라도 제 맛을 내는 기량을 발휘한 것은 박 시인의 개성임과 동시에 강점이라고 생각된다. 이야기가 있는 시조다. 책 속에 삶이 있고 지혜가 있다고 했다. 6.25전쟁 이후 가난한 시절엔 골목에까지 헌책방이 유행했었다. 요즘에야 대형 신간 서점들이 많이 생겨나 상상이 잘 안되겠지만, 당시만 해도 가난과 아픔 속에서 궁여지책으로 책을 내다 팔아 끼니를 때우는 시절이었기에 헌책을 사고파는 헌책방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헌책방에서는 가끔씩 희귀한 책들도 더러 나와 있었고, 또 헌책 속에는 갖가지 애환과 추억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첫째 수에서 “반쯤은 내려놓은 삶 말씀들을 접한다.” 둘째 수에서 “뉜가의 축하 메시지 따뜻함을 전하고.” 셋째 수에서 “가을 달 벌레소리도 그 속에 숨어있을.” 넷째 수에서 “나이를 먹는 것만큼 푸른 이끼 앉히고 있다.”라고 기술하여 시상의 전개가 비교적 안정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따스한 서민정서가 느껴지는 소박한 가작이다.
산이 누워 꿈꾸고
강이 쉬며 시를 읊다
고요한 하늘 내려와
살포시 두른 드레스
순결한 화음을 이룬
밤 호수의 무현금(無玄琴).
화폭의 푸른 살결
절묘한 먹의 농담(濃淡)
정겹게 짜 올리는
시공(時空)의 날줄 씨줄
떠돌던 어머니 달빛
곁에 와 앉으시네.
- 박헌오, 「밤의 호수에서」 전문
박 시인의 두 수 연시조다. 참신한 착상으로 고운 시어를 운용하고 있으며 그 표현도 새롭다. 특히 “강이 쉬며 시를 읊다”, “순결한 화음을 이룬/ 밤 호수의 무현금(無玄琴)”에선 자연의 내밀(內密)한 소리까지도 듣는 듯한 느낌이다. 또 시행도 “드레스”, “무현금(無玄琴)”, “살결”, “농담(濃淡)”, “씨줄” 등 명사로 종결하는 표기를 주로 하여 이 시조의 의미 내용을 한결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인의 내면의식을 개관적인 상관물인 호수를 통해 반영하여 정서화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무현금(無玄琴)”은 “무현금(無絃琴)”의 오식(誤植)이 아닌가 한다.
다음 <단시조 특집>란에는 단수(單首) 20여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 여섯 편을 골라 보았다. 단시조는 오래 전부터 ‘시조문학사’에서 편집방침으정하여 중점적으로 장려하고 있는 것으로 익히 알고 있기에, 필자도 주의 깊게 유념하여 살펴보고 있는데, 계간 『시조문학』에서 매호마다 지면의 ⅔정도를 단시조에 할애하고 있으며, 지난 여름호만 보더라도 전체 수록 시조 180여 편 중 <단시조>를 110여 편 이상이나 싣고 있었다. 가히 박수를 보낼 만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시조는 단시조가 우리 전통형식 본래의 모습이기 때문에 단시조를 우선적으로 장려해 나가는 일은 참 잘 하는 일이다. 사실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의 짧은 형식 속에 시상을 전개하고 함축하는 단시조는 고도의 언어 절제가 따르게 되는 예술인 것이다.
행여나
다칠세라
옹벽속에 심은 연서
속마음
알알이
터질듯이 영근 사랑
끝내는
어쩌지 못해
가슴 슬몃 여는가.
- 김경희, 「석류」 전문
김 시인은 나름대로 새로운 배행 및 구성법으로 생동감을 살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강조된 의미 속엔 전통 방식의 그리움과 정서가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정이입의 표현수법으로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으며 사랑의 정서를 부드러운 시어로 잘 대체해주고 있다. “끝내는/ 어쩌지 못해/ 가슴 슬몃 여는가.”라는 종장만을 별도 하나의 연으로 독립시킴으로써 주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기량도 보이고 있다.
생강꽃*은 터졌건만
이내 몸은 필둥말둥
돌아보니 지나온 길
저리 쌓여 꿈결인데
갈 길이
힘들거들랑
돌아 가끔 볼 일이다.
- 산강, 「산행 길」 전문
산행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생강꽃을 보고 착상한 작품이다. 아니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그 꽃의 향기에 이끌려 생강꽃을 돌아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생강꽃을 완상하며 결국 자아성찰의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생강나무꽃은 방향(芳香)이 좋아 생화로도 쓰이고 그 열매로는 기름을 짠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리 흔한 꽃은 아닌 것 같다. 구별배행 시조에서 종장의 첫 음보 3자를 한 행으로 제시하여 주제의 심화를 꾀하고 있다. 운율과 호흡이 안정되며 깊은 의미를 담은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는 참신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갈 길이/ 힘들거들랑/ 돌아 가끔 볼 일이다.” 음미해 볼수록 행간에 깊은 여운을 느끼게 하는 묘미가 있다.
발톱 잔뜩 세우고
사자 큰 입 벌린다
기름기 끈적끈적
악마 웃음 떨군다
안으로
놀부의 욕심
꺼먼 욕심 팅팅하다.
- 신강우, 「굴뚝」 전문
여기서의 ‘굴뚝’은 한적한 시골 초가집의 동양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낭만적인 굴뚝이 아니다. 오늘날 문명의 발달과 함께 생겨난 현대성의 산물인 공장의 굴뚝이나 대형선박의 굴뚝이 아닐까 생각된다. 시적 대상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그려내고 있다. 자유자재의 정신세계 속에 자신만이 가진 사유공간에서 재창조의 공정을 거쳐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비유와 상징, 함축으로 하나의 의미망을 구성하여 울림을 나타내 주고 있다. 시인은 이렇게 별것 아닌 일상의 사물일지라도 예리한 직관력과 통찰로써 함축적 의미를 뽑아내는 것이다. 굴뚝의 내포적인 의미와 상징성이 돋보인다. 문학(시, 시조)은 인간정신의 온도계일 뿐만 아니라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온도계 구실을 한다는 말이 실감되는 작품이다. 이렇게 어떤 사물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시인인 것이다.
가만히
귀 기울여
개울가에 앉아보니
해맞이
버들아지
반눈 뜨고 물 마시고
투명한
얼음 아래선
동자승의 독경소리.
- 이정자, 「해동 소리」 전문
한결같이 정격시조를 고수하며 시조연구에 힘쓰는 이 시인의 3장시조다. 시행의 배치가 9행으로 되어 있다. 3장을 3연으로 나누어 각 장의 첫 음보와 둘째 음보를 각각 한행으로 배행한 후 나머지 음보를 한 행으로 처리하는 방식인데 요즘에 여러 시조시인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 유행의 표기방식이다. 이로써 운율과 이미지, 의미의 강조와 그 상승효과가 더욱 확연하게 느껴진다. 자연의 이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순리 속에 돌아가고 있지만, 우리 인간의 힘으론 어쩔 수도 없는 자연현상이기에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해동하며 흐르는 얼음 아래의 물소리는 동자승의 독경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동자승의 독경소리”에 내포된 의미는 깊기만 하다. 한편 중장의 “버들아지”는 “버들개지”의 신조어 같은데 새로운 느낌이 드는 단어다.
말없이 둥글다 못해
원광을 그리어도
한 세상 둥근 이치
내 어이 몰랐으랴
어둠도
밝음도 아닌
저 무채색의 반야여.
- 이지연, 「달무리」 전문
스님이신 이 시인은 유독 달, 별에 관련된 작품들이 많다. 명상적 철학적 심안(心眼)으로 직관하고 있는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관찰과 직관을 통하여 더할 수 없이 원만하게 달무리를 그려내고 있다. 다분히 서정적 밀도를 느끼게 한다. 비유와 상징을 추구하는 시인의 의식 속에서 심원한 인식의 의미를 찾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달무리"에서 이 시인은 내면의 자신을 조용히 성찰하고 관조하며 반야(般若)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눈 뜨니,
또 오늘
이 하루가 있는 것을
잠결에,
다시 돌아 못 올 길을
나서다가
내 시조
終章을 못 맺은 채
그냥 두고 갈 뻔했네.
- 허일, 「하마터면」 전문
절묘한 착상은 시조의 고루함을 말끔히 씻어주는 구실을 한다. 정서적 질서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현대시조는 날로 심층구조의 다양성을 띠게 된다. 이 작품에서도 허 시인은 참신한 착상으로 시상을 농축시켜 개성을 창출하고 있다. 이 시조는 형태상 3장 구조를 지녔지만 내용상으론 초, 중장과 종장으로 나뉘는 2분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조에 있어서 행이나 연 가름은 시조의 최소한의 형식 장치 담보 외에 서정의 긴장을 최고의 상태로 올려놓는 정점의 구실을 한다. 시행의 배치문제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위의 시조를 보면 각 장을 3행씩의 배행으로 시각적 효과를 거두며, 각 장의 첫 음보를 한 행으로 제시함으로써 의미의 강조와 상승효과를 거두고 있다. 아울러 제목붙이기의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하마터면”은 품사로 부사인데 이렇게 부사를 작품의 제목으로 선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시조의 제목은 내용과 합치하여 상징적, 핵심적, 함축적 의미를 띠는 것이라고 볼 때 이 작품은 독자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허 시인의 시조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항상 깨어 있는 의식이 감동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을 감싸고 있는 긴장된 절제미 또한 한껏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다음 <여름시조단>에는 30여 편의 시조가 수록되었는데 그 중 2편만을 골라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워 그리워서 가는 줄기 아린 영혼
흙에서 태어나서 흙냄새 되씹으며
찬 겨울
마음 내어주고
농즙 오문 얇은 입술.
그리워 그리워서 추위 덮고 피는 영혼
쓴 것이 약이라고 잔뿌리도 진액 물고
볼따귀
때리는 꽃바람
두 눈빛이 뜨겁다.
- 조영희, 「씀바귀의 영혼」 전문
씀바귀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줄기와 잎에 흰 줄이 있고 쓴맛이 나며, 주로 애순과 뿌리는 봄에 데쳐서 나물로 먹는다. 씀바귀 뿌리를 데쳐서 무친 나물을 씀바귀나물이라고 하는데 쓴맛이면서도 입맛을 나게 하여 봄나물로 인기가 많은 편이다. 여러해살이인 씀바귀의 삶은 강인하다. 못 견디게 더워도 참아내고, 못 견디게 추운 겨울도 이겨내며 그 강단으로 쓰디쓴 녹즙을 만들어 뿌리에 저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워 그리워서 추위 덮고 피는 영혼”, “농즙 오문 얇은 입술.”, “두 눈빛이 뜨겁다.” 여기서의 그리움은 삶에의 그리움일 터이니 다분히 조 시인의 인생관이 깃든 작품이라고도 여겨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뜻 모를 문자 하나
풀어도 풀 길 없어
가슴에 묻어둔다
먼 훗날
그 언젠가는
알아질 수 있겠지.
- 함세린, 「너의 마음」 전문
함 시인의 단시조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여럿이 어울리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성이 있고 감정도 있다. 그러기에 사회생활을 영위하다보면 서로 의기 상통하여 즐거운 경우도 있겠지만, 때로는 본의 아니게 서로 뜻이 맞지 않거나 오해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도 있게 된다. 위 시조를 살펴보면 후자에 해당될 것으로 판단된다. 3장시조에서 각 장을 한 연으로 배치하고 시상을 기(초장)-서(중장)-결(종장)로 전개함으로써 비교적 쉽게 읽히면서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 훗날/ 그 언젠가는/알아질 수 있겠지.” 라고 하여 “세월이 약”이라는 속담의 의미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상으로 ‘시상의 포착과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대강 살펴보았지만 주마간산 격이 되고 말았다. 또한 거론하고 싶은 몇몇 작품들을 사정상 다루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만 그동안 계간평을 담당하면서 읽은 작품에서 전체적으로 미흡하다고 느낀 점 몇 가지를 요약하며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 부단한 언어의 조탁으로 고운 시어를 사용해야 한다.
둘째, 시조 특유의 비유와 상징으로 긴장과 이완의 특성을 살려야 한다.
셋째, 절정, 반전, 결말의 총체적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종장의 묘미를 살려 야 한다.
넷째, 다양한 소재의 활용으로 참신한 주제를 부각시켜야 한다.
다섯째, 반드시 현대성과 문학성, 예술성을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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