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회 기본 > 시조평론 > 정격과 파격, 그 논쟁의 불씨(2)/ 리강룡

정격과 파격, 그 논쟁의 불씨(2)

리 강 룡

지난 호에 이어서 정격과 파격의 논쟁에 대하여 논의를 계속하고자 한다. 지금 논쟁의 핵심 불씨는 구(句)의 구조이다. 이에 관한 논의는 1920년대에 벌써 학자들이 각자의 주장을 펼친 바 있고, 우리 협회에서도 오래 전에 설문을 받아 정리를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한 수의 시조가 6구, 8구, 또는 12구로 되어 있다는 다양한 주장이 지금은 대체로 ‘3장 6구 12음보격’에 방점을 찍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논쟁의 초점은 그 다음에 있다. 지금 작품을 보는 시인이나 비평자의 관점은 정격시조의 율을 음수율로 볼 것이냐, 음보율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그저 3장 완결시이면 시조라 할 것이냐의 차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음수율을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 엄격한 이는 종래의 3․4․3(4)․4․3․4․3(4)․4․3․5․4․3의 틀에서 벗어나면, 각 구에서 음절의 수가 위의 틀에서 조금이라도 뒤뚱거리면 파격, 내지는 시조가 아니라는 관점에 서 있는 것이다. 둘째로 음보율의 관점에 서 있는 쪽에서는 음수율에는 다소 벗어나더라도 기식(氣息)의 단위에 맞으면 시조로 보는 입장인데, 그 ‘기식의 단위’에 대해서도 관점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셋째는 한 수의 시조를 아예 장의 단위로 보고, 자유시의 호흡을 시조라는 틀 안에 수용하는 경우이다. 이들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이것이 시조의 새로움, 시조가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는 새로운 모색으로까지 보고 있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시조의 형태, 호흡은 과연 어떠하였던가.『교본역대시조전서(校本歷代時調全書)』에 수록된 3,335수의 시조 가운데 단형시조 2,759수의 형태 고찰에 대한 보고가 있다.(徐元燮,『時調文學硏究』) 이 통계에 의하면 초장은 3434가 651회, 3444가 647회, 중장은 반대로 3444가 648회로 가장 많고, 3434조(調)는 473회를 보이고 있다. 종장은 3543이 789회로 가장 많고, 3643조가 590회로 그 다음이다. 이 밖에 헤아릴 수 없는 형태의 자수(字數)가 자유자재로 하나의 구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가 황금률로 알고 있는 종장 첫 구 3음절도 드물기는 하지만 2자-7자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남 선생을 비롯한 초기 선각자들이 음수율에 기초한 시조 형태의 틀을 제시한 것은 정형시라면 일정한 틀이 있어야 할 것이란 관점에서, 위 통계에서 보는 바와 같은 각 음보마다 절대적 또는 비교 우세에 있는 음수들을 채택하여 하나의 틀을 제시하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이른바 정격시조의 형태에 관한 논의는 앞으로 협회 차원이든, 연구회나 동인회 차원이든, 그도 아니면 시조단 밖 학자들의 순수 연구 차원이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토론을 거치든지, 세미나를 열든지, 설문을 받든지 어떠한 형태를 빌더라도 결론을 도출해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지금처럼 가장 기본 문제인 시조의 형태를 두고 각자의 의견대로 작품을 재단하는 폐단은 이제 우리 시대를 끝으로 종식되었으면 한다. 문학상까지 받은 작품이 사상의 깊이, 시 정신의 치열함 등의 내용면은 차치하고 형태 때문에 ‘시조도 아님’의 딱지를 받는 판국이 계속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이것은 어쩌면 우리 시조단의 부끄러운 모습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깨질 것은 깨진 뒤에 비로소 변증법적 ‘합’의 모습이 나타나리라 생각하는 충정에서 언급해 보는 것이다.

4월호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바람은 노래하며 오늘을 건너고 있다

돌아볼 수 없는 길, 돌아올 수 없는 길

우리가/다 가고 난 뒤

기다릴 수도 없는 길

헝클어진 내 마음을 비껴가고 싶은 날

새들의 자유비행 그 속에서 살고 싶다

끝없이

부르다 죽을

노랫소리 드높이며

- 정공량,「인생․2」(1/3, 3/3)

인생은 연습 없이 본 무대에 올려지는 1회성의 연극이다. 다시는 돌릴 수 없는 순간들이 쌓여 인생이 된다. 시간은 정확무오하게 흘러가되 그 시간을 느끼는 사람들이 60대는 60km, 70대는 70km로 달려간다 한다. 시인도 이제 상당한 세월 앞에서 바람처럼 가는 길, ‘돌아볼 수도, 돌아올 수도 없는 길’이 인생길임을 알아차리고 ‘인생’이란 연작시를 쓰게 된 것 같다. 성경에도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시90:10)”라 쓰고 있듯이, 살다 보면 쌓이는 수많은 스트레스 앞에서 새들을 닮고 싶을 때가 있음을 공감한다. 그들처럼 무한 창공을 ‘자유 비행’하기도 하고 ‘끝없이 부르다 죽을 노랫소리 드높이며’ 걸릴 것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외침에도 공감한다. 인생이란 추상적 제재를 ‘바람, 노을, 새’ 등의 구체적인 제재를 통하여 시를 짜는 데 성공하고 있다.

유배 온 정서＊선생 먹물 배인 두루마기

우릴수록 깊어지는 정과정곡 탄주하며

꼿꼿이 허리를 세워 평화의 섬 문을 열고

수묵담채 원경에는 물과 하늘 가득하다

못 잊을 기억들이 해조처럼 헤매는 날

해금강 여차홍포길＊곰솔 따라 걷고 싶다.

- 김복근,「거제 생각」(2/4, 3/4)

정서는 고려 의종 때의 문신이다. 왕의 총애가 깊었던 만큼 배척 또한 많아서 유배의 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고향 동래에서 멀지 않은 거제로 유배되어 임금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결백을 읊은 것이 ‘정과정곡’이다. 이 작품은 고려가요 중 작자가 알려진 유일한 작품으로, 유배시의 효시로 국문학사상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인은 거제도 정서의 유배지를 찾아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소회를 읊고 거제 비경 한 폭을 떠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억새는 억새끼리, 멧새는 또 멧새끼리

사람에게 멀어질수록 틈새를 좁히는 산

하늘도 바다에 잠겨 물빛 뚝뚝 듣는다.

초록을 덧칠해도 웃자라지 않는 봉우리

모난 돌을 쓰다듬는 시간의 정 앞에서

바람도 배낭을 벗고 산마루를 넘는다.

- 임채성,「시간의 바퀴」(2/4, 4/4)

흔하디흔한 것이 기행시이다. 그러나 잘된 기행시를 찾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 있다. 통상적으로 기행시는 여행의 지역 내지 장소를 제목으로 여정에서의 감회를 읊게 된다. 시인은 관례를 거부하고 ‘시간의 바퀴’란 제목으로 남도 명산 두륜산을 읊고 있다. 백두대간이 숨 가쁘게 반도를 종주하여 마지막 그 발을 바다에 담그고 선 두륜산, 이름이 가리키는 대로 두륜산은 ‘둥근 머리 산’이다. 정상의 바위 생김세가 수레바퀴 모양인 데서 부쳐진 이름이다. 억갑 년을 두고 바람이 깎고 눈비가 다듬어 마침내 오늘의 멋진 모양의 바위가 이루어졌으리니 시인이 제목으로 세운 ‘시간의 바퀴’가 한 치의 가감 없이 딱 들어맞다. 필자도 두륜산에 올라본 경험이 있어 이 작품의 말미에서 ‘모난 돌을 쓰다듬는 시간의 정 앞에서, 바람도 배낭을 벗고 산마루를 넘는다.’는 가구(佳句)가 새삼 실감나게 다가온다.

백화점 대형 간판에 아찔하게 걸린 여자

날리는 치맛자락 몬로처럼 살짝 누르고

알약을 과다 복용했는지

헤실바실 웃고 있다.

죽고 싶어, 속삭이는 연분홍 입술이며

샤넬의 향수를 입은 유혹이 치명적이라

불륜도 무방하겠다, 꽃샘바람 들레는 날!

- 박해성,「입춘」전문

입춘과 꽃샘바람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그러나 찬바람은 쌩쌩 불어도 절기는 봄이다. 봄은 여자의 치마 끝에서부터 온다고 했던가. 바람 앞에 올라가는 치맛자락을 살짝 누르고 있는 몬로의 사진과 함께 그 입술의 짙은 화장에 시의 분위기, 시인의 분위기는 한결 달떠 있다.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았던 지난겨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리 오그리고 이 봄을 기다렸던가. 봄바람, 꽃샘바람은커녕 아직도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지만, 시인의 가슴은 이미 봄이다. 계절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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