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 극장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다.

물론 택시를 타면 눈총을 받아서기도 하지만 걷는데서 남다른 희열도 느낀다.

여기 저기 가게도 기웃거려보고, 지나가는 차, 지나가는 사람도 구경하고, 마치 맞선이라도 보러가는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까지 걸어가는데, 가는 도중에 늘 들러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먹는 슈퍼가 있다.

극장에서 파는 커피는 너무 비싸고, 하지만 좋은 사람과는 한번쯤 호사를 누려 볼만은 하다.  그러나 이틀이 멀다하고 영화를 보러가니 그 커피 값은 사실 아깝다.

그도 그렇지만, 혼자서 걸으면서 종이컵의 온기를 느끼면 커피를 마시는 기분 또한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나만의 호사이다.

어느 날 자판기에 불이 안 켜져 있어 그냥 지나치려는데, 주인인 듯 중년 아저씨가 나온다.

“왜, 자판기 안돼요?”

“불이 안 켜져 있어서요.  커피 나오는가요?”

“네, 램프가 나갔는데 커피는 잘 나옵니다.”

서글서글 웃음을 머금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정겹다.

기껏 300원짜리 커피 손님에게도 저렇게 풍요로운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그가 부자 같다.

작은 슈퍼를 지키기에는 그의 그릇이 커보였지만, 그의 어느 곳에서도 오만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었을까?

분명 좋은 직장에 다니다가 퇴사를 하고 슈퍼를 차렸을 거야?

내 맘대로 그를 멋진 레벨위에 올려놓고 넉넉한 그의 마음과 같이 커피 향을 즐겼다.

어제, 자판기 앞에 가서 지갑을 열어보니 잔돈이 하나도 없다.

그럼 천 원짜리라도 있어야 하는데 난감하다.

잠시 망설이는데, 예의 그 아저씨 슈퍼 안에서 밖에서 서성이는 나를 보고 나오신다.

“왜 또 자판기 안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 잔돈이 없어서요.”

“그럼 뭘 망설이세요.  바꿔 드릴게요.”

“저~ 만 원짜리거든요.”

아무리 친절하다고 해도 300원 때문에 만원을 거스르는 것은 조금 미안했다.

그러자 그는 300원을 갖고 나와서는 직접 돈을 투입한다.

우물쭈물 만 원짜리를 꺼냈는데, 그는 커피를 꺼내라면서 아래 쪽 출구를 열어준다.

“됐어요.  그냥 드시고 다음에 잔돈 있을 때 주세요.”

“아니에요.  그럼 제가 외상 지는 거잖아요.”

“아~ 외상이군요.  그럼 장부책을 갖고 와야겠네... 하하하.. 사실 잔돈이 넉넉지 않아서 그러니 담에 주세요.”

“그럼 영화보고 오다가 들러서 드릴게요.”

얼떨결에 받아갖고 걸으면서, 지금 보러가는 영화는 그 어떤 재미없는 영화라 해도 재밌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따뜻한 커피가 식도를 타고 위까지 내려간다.

그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까지 같이 내려간다.

극장 입구에서 어김없이 커피는 바닥이 드러났고, 입구에 있는 편의점 쓰레기통으로 컵은 제 의무를 다하고 투신한다.

누가 보기엔 작은 구멍가게를 지키는 마음 좋은 아저씨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정말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을 즐기고 사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내가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죽지 못해, 마지못해 일하는 것은 얼마나 불행하고 그 자신을 망가뜨리는가.

오늘 따라 슈퍼아저씨가 재벌 회장님같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