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시> 


사르비아 꽃밭 앞에서/박병순



             



오뉴월 남방부터 벌겋게 피어나서

여름 내내 내 가슴을 사르고도 남아

구월도 꼬박 이 안에 불을 질러 타누나.



사르비아 넌 날 어쩌자는 것이냐

사르비아 넌 날 어쩌라는 것이냐

남 몰래 활활 타는 속을 더 어떻게 사르리아!



날마다 너를 찾아와 너를 바라보는 것은

때때로 너를 찾아 너를 그리는 것은

타자던 그 불꽃 속에 뛰어들고 싶어서다.



사르비아가 피어나듯이 우리 벌겋게 피어나서

사르비아가 타듯이 우리도 벌겋게 타다가

벌겋게 벌겋게 타다가 저승길도 벌겋게.





 



연(蓮)/ 성 효





연잎은 염천에도 푸른 빛 간직한다



발 담근 진흙벌에 곧추 세운 꽃대 하나



버려진 세상을 향해 붉은 낙관 찍는다.





 

 

홍시 / 이서원 





할 말이 있는 게다

더는 다 못했던 말



그 무슨 통곡같은

울음보다 더 진한 말



그 사연

하늘에 걸고

불꽃처럼

태우는 꽃.





  이 달의 초대시로 박병순의 <사르비아 꽃밭 앞에서>를 추천한다.

작품은 그 사람의 마음이자 거울이라는 말이 있는데 박병순처럼 그의 인

격과 순정과 체질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시인도 드물다.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그의 뛰노는 맥박소리와 숨결을 들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몸놀

림 하나하나까지도 자세히 엿볼 수가 있다.

  박병순은 남보다 많은 양의 작품을 쓰고 있다. 그만큼 그는 오로지 시

조 창작에만 전념하는 시인이다. 그의 작품 경향은 시조형식이 주는 엄

격한 구속에서 벗어나 마치 일기나 편지를 쓰듯이 편안하다. 여기 <사르

비아 꽃밭에서>라는 작품도 마치 다정한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듯

가벼운 마음으로 쓴 작품 중의 하나이다.

  첫째 수에서는 여름철부터 불을 지르듯 빨갛게 피기 시작한 사르비아 

꽃이 서늘한 구월이 되고도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피어 있다고 하였고

둘째 수에서는 남몰래 속으로 활활타고 있는 나를 그이상 더 어떻게 하

라고 너는 나를 유혹이라도 하듯이 벌겋게 타고 있느냐고 했으며 셋째 

수에서는 사르비아 꽃이 보고 싶어 찾아오는 이유가 나도 네 품속에 뛰

어 들어 너와 함께 불붙고 싶어사라고 했고 넷째 수에서는 사르비아 꽃

처럼 벌겋게 피어나서 사르비아 꽃처럼 벌겋게 인생을 보내다가 저승에

가서까지도 벌겋게 타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다.



<뽑는 글>

  성효의 <연(蓮)은 단형시조가 갖는 단아한 시형과 심오한 사상이 사려

깊게 나타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시의 내용이 되는 정서나 

사상이 형식과 잘 어우러져 있다. 어떤 응모작보다 시조 형식이 갖는 특

징을 잘 살려 완결된 서정의 미학으로 형상화하였다. 또한 평이하고도 

응축된 시어와 이를 통제하는 기법이 시형 속에서 표현되었다는 점도 장

점으로 꼽고 싶다. 종장의'버려진 세상을 향해 붉은 낙관 찍는다' 같은

표현은 누구나 싶게 발휘할 수 있는 상상력이 아니다. 시조의 품격이 어

떤 것인가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서원의 <홍시> 또한 단형 시조의 네 마디 호흡 단위(4음보)가 갖는

시조형식의 특징을 잘 살려 쓴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장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소재에 대한 해석이 통속적이고 상식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독

창적이고 참신한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져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는점

이다. 

  종장의 '그 사연/하늘에 걸고/불꽃처럼/태우는 꽃'은 시상의 내용이나 

기법도 좋은데다 시의 의미와 운율이나 이미지가 효과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표기 형식을 취하고 있어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김 준- 시조시인. 서울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