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전혜린 에세이에서


"햇빛에 가득한 하루는 행복하기에 충분하다.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걷는다는 일,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나는 행복하다.
괴로워 하는 일, 죽는 일도 다 인생에 의해서 자비롭게
특대를 받고 있는 우선권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러운 무엇일 것 같다.
괴로워할 시간도 자살할 자유도 없는 사람은 햇빛과 한송이 꽃에
충족한 환희를 맛보고 살아 나간다.
하루하루가 마치 보너스처럼 고맙게 느껴진다.
또 하루 무사히 살아 넘겼구나 하고 잠들기 전에 생각할때
몹시 감사하고 싶은 - 우주에, 신에 - 마음이 우러난다.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Photographer Mario Novak
Caption Lotus Heart


이것은 32살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자살로 세상을 마감한 전혜린(1934∼1965)님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중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녀의 말처럼 밝은 햇빛이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하루를 보낸 적이 언제였는지...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야 하는 것일까?
시계 초침소리는 적막한 밤의 공간을 조각내며 어둠속을 하염없이 맴돌고 있다. 어느새 눈
이 감긴다. 나의 의지는 시계의 초침을 거꾸로 돌려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되돌아 가고 있
었다. 라디오에서는 귀에 익은 슈베르트의 선율이 밤의 정적을 가르며 흘러 나오고 있었다.


★ 미완성... 그 아름다운 고독


교향곡의 고전적인 형식미는 하이든에 의해 구축되었지만 왠지 그의 교향곡에서는 드라마틱한
감동의 선율이 발견되지 않는다. 모짜르트의 교향곡은 맑고 투명한 천상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심각한 비장감을 느끼진 못한다. 베토벤은 어떠한가? 그의 교향곡은 그 영웅적인 악상으로 인해
뜨거운 감동을 받긴 하지만 매번 듣기엔 약간의 심적인 부담을 느끼게 된다. 베토벤의 음악을 이
어받은 낭만파 음악의 기수 프란쯔 슈베르트... 그는 베토벤과 같이 모두 9개의 교향곡을 남기고
있다. 그의 교향곡을 살펴보면 고전파 교향곡에 비해 눈에 띄게 선율적이며 평면적인 흐름의 악
상을 담고 있어 낭만파 음악의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한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8번 B minor - 미완성>은 그 아름다운 멜로디와 신선한 악상 전개로 인해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곡이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낭만적 정서가 느
껴지는 멜로디와 독특한 화성을 담아내고 있는 이 작품은 그의 음악세계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슈베르트 본인은 이 위대한 교향곡의 연주를 들어보지도 못한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곡의 악보는 슈베르트가 운명한지 37년 뒤인 1865년 발견되었으며 같은 해 오
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되었다.

'미완성 - Unfinished'이라는 별칭이 더 인상적인 작품은 슈베르트 나이 25세때 작곡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향곡은 4악장으로 구성되는데 이 작품은 단지 2악장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완성'이라는 부제가 붙게 되었다. 슈베르트가 무슨 연유로 인해 2악장에서 곡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곡에 더 이상의 악장을 첨가했다면 그 감동의 크기는 반
으로 줄어 들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완성되지 못한 곡임에도 하나의 교향곡으로써 전혀 부족한 점
을 느끼지 못할만큼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 지하의 세계에서 솟아 오르듯이...


<미완성 교향곡>은 슈베르트의 독특한 정서가 담겨있는 매혹적인 작품이다.
특히 제1악장 첫머리의 선율은 명 지휘자 바인가르트너가 말했듯이 '마치 지하의 세계에서 솟아
오르듯이...' 지극히 침울하게 시작되지만 곡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의 그 아름다운 악상은 뜨거운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이어지는 제2악장의 로맨틱한 시정 또한 무척 아름답다. 슈베르트는 단 두
개의 악장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모두 담아내고 있다.

제1악장 Allegro moderato- B minor

신비감을 느끼게 하는 첼로와 콘트라바스의 연주로 조용하게 시작된다. 이 주제 동기는 제2악장에
서도 나타나는데, 이처럼 하나의 동기를 적극적으로 구사하면서 곡 전체를 하나로 엮는 독특한 악
상의 전개는 무척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런 점이 슈베르트의 천재적인 창작 능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섬세한 보잉에 의한 바이올린 연주와 영롱한 음색의 목관 연주에 애수어린 주제선율이 실리
면서 로맨틱한 악상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파곳과 호른의 짧은 연주 뒤에 차분한 렌틀러풍의 주제
가 첼로로 연주되며, 콘트라바스와 바이올린 파트가 우아한 멜로디를 노래한다. 1악장에 나타나는
3개의 아름다운 주제선율은 색채가 뚜렷한 악기를 구사하므로써 더욱 매혹적이다.
이 주제 선율을 바탕으로 화려하게 전개되는 코다부분은 낭만적인 여운을 남기면서 끝마치게 된다.

제2악장 Andante con moto- E major


가요풍의 악장으로 유려하면서도 소박하고 친밀감이 느껴지는 주제로 시작된다.
슈베르트의 음악에서는 서민적인 소박함이 많이 느껴진다. 첼로파트의 대위법적인 선율이 인상적인데
그 아름다운 멜로디는 슈베르트의 맑고 투명한 영혼의 울림과도 같다. 바이올린에 이어지는 클라리넷
의 아름답고 애절한 주제가 아름답다. 주제가 극적으로 전개되는 코다부분에서 악상이 다시 고조된다.
인상적인 현악파트의 피치카토를 거쳐 팀파니의 트레몰로를 뒤로 하며 조용히 곡을 마친다.

★ '완성되지 못한 자'와 '완성된 자'의 고독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소설 중에는 <말테의 수기>라는 작품이 있다. <파리의 인상>,
<죽음>,<시와 고독>,<유년시절의 추억>,<사랑>,<신-God>,<베니스 여행>,<탕아의 전설>등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대도시 파리에 내던져진 유약한 소년의 고독하고 불안한 삶의 모습을 섬세한 터치
로 그려내고 있다. 한 때는 이 소설의 주인공 말테에게서 너무도 인간적인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감, 소년기의 불안한 심리를 음악적인 모티브로 엮어 나가는 그 섬세한 감각은 당시
슈벨트 음악에 심취했던 나의 감성세계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The Calypso Connection


'완성되지 못한 자'의 고독은 현실세계를 경험해 보지 못한 막연한 불안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완성된 자'에게는 그런 고독이 없는 것일까? 말러 <교향곡 제3번> 칼럼에서 소개한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그의 저서 <완성된 자의 고독>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으면서도 나 자신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내 눈이 내게 너무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는 것과 본 것,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자리잡을 수 있다면 나는 나를 보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자신의 실존적 가치를 모른채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완성되지 못한 '나'라는 존재는 사실 고독이 뭔지도 모르면서 고독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음악을 전공하던 어느 선배가 신촌의 어느 뒷골목 허름한 술집에서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음악을 함에 있어서
 "고독의 의미를 알게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음악이 완성된다..."
그러나 나는 완벽(?)한 느낌이 드는 '완성'이라는 단어보다는 무엇인가 더 추구할 수 있는 '미완성'이란
단어를 더 좋아한다.

전혜린, 릴케, 슈베르트, 니체... 그들 모두 완성된 삶을 살지 못했지만 그들의 예술에서 완성된 자의
고독을 발견한다. 물론 헛점투성이인 내 인생 역시 미완성으로 마쳐질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오늘따라 완벽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fin) FEB.25.2000


Calla Lily - Seabeck, Washington


<미완성 교향곡> 1악장 / 푸르트뱅글러 지휘, 베를린 필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