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에 꽃향에 취하여 아득하니 쓰러지게 하여라
                                                       최 길하

KBS교향악단 초청 연주회에 갔었네.

갓 깨어난 풀 여치의 속 날개 같은
속살 아른거리는 연두색 드레스를 쓸며
미모의 아나운서가 올라와
토란잎 새벽이슬 모아 굴리는 청아한 목소리로

‘아카시아 꽃향기가
코끝을 알싸하게 스치는
계절의 여왕 5월의 저녁입니다.’
‘우리 살아가는 일도
이 교향악처럼 아름답게 빚으며
하모니를 이루자’고 빨주노초파남보
리듬 있는 색깔로 인사를 하고
무대 옆으로 가 落雁圖처럼 사뿐히 내려앉네.

그러니까 내가 어릴적,
우리 어머니가 베틀에 앉아 베를 짤 때
저 하프처럼 씨줄을 뽑아 내리고
현악기를 켜듯, 북에 실꾸리를 실어
‘딸깍딸깍’ 뱃길을 내듯 날줄을 드리고
‘찰까닥찰까닥’ 섬섬한 능라 필륙을 엮어 짜던
그 그림자 같은 모습 생각나네.

그 때가 아마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
휘영청 달은 밝아
풀벌레 소리가 강물을 이루니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답던지.

그래, 한 시절은 참 잠깐이야,
인생이나 풀벌레가 한 철을 울고 가는 이 무대,
저 연주가들처럼
풀벌레들도 온 넋을 다해 흔들어 우는 것이지.

어머니는 그 필륙으로 아버지의 옷을 지어 입히시고
풀벌레들의 교향악을 들으셨을까?
풀을 풀어 메기고 다듬으며
알싸한 세월의 향기를 맡으셨을까?

한번은 아버지가 나들이 갔다 돌아오셔서
두루마기를 벗어 횃대에 척 걸어 놓았는데
불을 끄고 잠이 설풋 한데, 옷에서 여치소리가 나는 거야,
길가 풀섶에서 묻어 온 것이지.
삼베나 모시가 다 풀이 아니었던가,
옷에도 풀벌레 소리가 가득 베어 있어서
그 두루마기에 묻어 온 여치는 그 소리를 들은 것이지,
우리 귀로는 들을 수 없는 觀世音을...

베나 모시옷을 입으면
빛과 바람도 술렁술렁 드나들고
개미며 베짱이 귀뚜라미도
소매며 바지 사이로 스멀스멀 들락날락
KBS교향악단 한 팔만 배쯤 되는 심포니였지.

음악회는 끝나고
돌아오는 길,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슴속의 무대에선
하이든이 흐르고,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 날 그 땐 지금 가고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꽃향에 꽃향에 취하여
아득하니 꽃구름 속에 쓰러지게 하여라
나비처럼 쓰러지게 하여라’
자욱한 음악의 향기
송화 가루 날리는 아름다운 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