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
 |
2,734
|
 |
2,789 |
 |
5,069 |
 |
3,106,806 |
 |
|
|
|
|
|
|
|
작성일 : 03-05-16 17:13
 조회 : 2,252
|
나의 하루/ 5월 16일(금)
서재를 정리하다 보니 한국문학전집이 보이고 그 중 수필집이 있어 몇 장 넘겨보니, 수필가 전숙희 씨의 "나의 하루"가 있다.
전숙희 씨는 시인 모윤숙 9년 , 노천명 2년 이화여전 문과 후배로 그분들과 함께 암울하던 해방을 전후한 시대에 한국문학을 빛낸 여류 수필가다.
여성이기 때문에 정 한 시간에 일어나 가정과 직장 일을 함께 하면서 "구태여 이 해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자극이 내게 있기를 하는 것뿐이다."라고 하며 거기에 이런 소원을 더하고 있다.
"실컷 자고, 일어나고 싶은 때 일어나, 먹고 싶은 때 먹고, 또 일하고 싶은 때 의욕이 생길 때만 하고, 자고 싶어지면 자고…. 이렇게 일정한 궤도나 규약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나는 오늘 새벽 4시경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정년하고 자식들 다 여의고 아내와 단 둘이서 사는 가족 축소완료기의 삶이라서, TV를 보다가 졸리면 자고, 깨면 아무 때나 일어난다. 먹고 싶으면 냉장고를 열어 과일 등을 먹는다. 내가 먹는 것은 과일로 포장된 아내의 정성이었다.
그리곤 인터넷에 올려놓은 내 작품의 독자가 그 동안 몇인가 그 조회 수를 확인한다. 그리고 나의 홈피(http://member.kll.co.kr/ilman031)에 들어가 자취를 남기고 간 고마운 분들에게 답장을 쓰거나, 혹은 그분들의 홈피를 찾아가 그분들의 삶의 조각들을 살펴 보기도 한다. 그러다 피곤하면 자기도 한다.
오늘은 날이 밝기 무섭게 낚시를 가야겠다. 매년 초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대개 새벽부터 9시까지 낚시터에 가는 것이 나의 일과다.
아침이야 돌아와서 먹거나 아니면 나면으로 때워도 되지 않는가. 경제적인 면에서의 아내의 부탁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당신이 돈 버는 것'이라는 것이다. 공무원 연급 수급 자로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돈은 적으면 불편하고, 많으면 교만해 지는 법이니 크게 욕심 낼 것이 아니다.
정년하고 용감하게 퇴직금을 헐어 세계를 두루 다녀본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 나라는 아세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잘 살고 있는, 이웃 나라가 부러워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6학년 7반인 내 나이가 낚시를 할 때인 것처럼, 요즈음은 산란기니까 수초 가에서 대어(大漁)를 노릴 때다.
어둠이 막 가실 무렵에 아무도 없는 일산 이산포 수로 수초 가에 앉아 있다. 어제보다 물이 더 불어 있고, 오늘을 위해 어제 밑 밥을 잔뜩 주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예감이 좋다.
거기다가 낚싯대는 한 칸 반대와 두 칸 대에다가 바늘은 5호. 어제 완벽하게 찌를 맞추어 놓았으니 기대해볼 만하다.
낚시를 던져 놓고 라디오를 켜고 이 소식 저 소식 듣다 보니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난다. 큰 건전지를 등에 업은 라디오를 아주 크게 틀어 놓고, 치매와 중풍에 이 둘째 아들의 집에서 외롭게 노년을 사시다 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미루다가 금년 한식에 성묘도 못한 우리 아버지 어머니 때문인가.
중풍에 치매 더해 아내마저 잃으시고
금주(禁酒)와 금연(禁煙)으로 불효자 무관심에
라디오 오직 하나가 아버지 친구이더니.
아들의 부름마저 거두어 가신 후에
당신의 나이 넘어 살아온 이 자식도
이제는 라디오와 함께 꿈나라를 찾습니다
-라디오
직장에 있으면 신문을 읽지 않거나 TV를 보지 않았어도 동료들이 떠드는 소리만 듣고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물정을 알게 되지만, 집에 있고 보니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도 주로 나같은 또래여서 크게 말하면 정보에, 작게 말하면 소식에 어둡다. 그래서 늙으면 아내보다 자식들보다 라디오는 내 친구가 되나 보다.
오늘은 낚시꾼으로서 행복한 날이다. 어쩌면 월척일지도 모르는 참붕어 한 마리를 싣고 집을 향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번 것이 월척이라면 오늘 낚싯군으로서의 나는 여섯 번째 즐거움을 갖게 되는 날이 된다.
참붕어는 10년을 자라야 30.3cm로 크고, 낚시를 10여 년 하여도 잡을 둥 말 둥 한 참붕어가 월척이다. 일본산 떡붕어나 잉어, 바닷고기는 우리 낚시 세계에서는 알아주지 않는다.
엄지손가락이 입에 들랑날랑 하면 월척이라지만, 비늘로 판별하는 방법도 있다. 비늘 하나를 자세히 보면 나무처럼 나이테가 있다. 겨울은 자라지 못하니 그 비늘의 나이테가 열이면 월척이라 하는 것이다.
집으로 오가는 길이 교행이 불가능한 농로(農路)라 멀리 오는 차가 있어 한참이나 길 옆에 차를 대고 비껴 주었는데 감사하다 손 하나 들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운전자가 있다. 나는 한없이 클랙슨을 눌러댔다. 이렇게 무례한 사람을 만날 경우, 나는 유골호인(有骨好人)이 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상대가 나보다 큰 사람에게는 삼간다. 나는 비겁한 사람 측에 속하는 사람은 아닌가.
오늘은 치과에 가는 날이다. 병원 한 번 가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노인 나라에 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가장 자주 찾아갈 수 밖에 없는 곳이 치과다.
아는 사람 찾아가 봐야 빚처럼 신세를 지거나, 아니면 별로 싸게 하여 주는 것도 아닌데도 먼 곳을 찾아가야 하는 데다가, 요금과 자기의 권위를 결부시키는 사람이 있어 오히려 더 부를 경우 깎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여 마음 편하게 동네 치과에 간다.
머리를 곱게 빨고 이빨을 깨끗이 닦고 가는 길이다. 치과의사가 여의사이기 때문이다. 일류 대학 졸업한 엘리트 박사의 그 보드러운 손길이 입술에 닿는 것이나, 간호부와 속은 대는 젊은 여인들의 이야기는 비록 눈을 꼬옥 감고 듣는 것이지만 향긋하게 느껴지는 매우 즐거운 일이다.
다음에 올 날을 예약을 하던 간호부가 서류와 나를 번가라 보더니 웃으면서 말한다.
"너무 젊으셔서 혼동했어요. 한 5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며칠 전 전철을 타고 노인좌석에 앉아 오는데 내 앞에 선 노인이 나를 보고 하는 행동이 양보를 요구하는 몸짓이어서, 자리를 양보할까 말까 망설이던 일이 있었다. 얼마 후 함께 앉게 되자 그분께 나이를 물었더니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염색을 하였다는 것. 항상 나이를 잊고 산다는 것. 언제나 마음 속에 산이 있고 강이 있고 그리고 컴퓨터와 카메라와 캠코더와 함께 글을 쓰며 산다는 것이 나를 젊게 하였나 보다.
병원 문을 막 나서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 빨리 와요. 붕어가 죽을 것 같애. 벌써 다섯 번이나 밖으로 뛰어 나왔어요."
가서는 처음 월척으로 잡은 참붕어 어탁한 액자 위에 그 놈을 놓고 놈의 크기를 견주어 사진을 찍어 둔 다음 방생하는 것이 준척 이상을 잡았을 때의 나의 버릇이다.
물에 사는 놈이 뭍에 올라와 공짜로 독사진도 찍혀보고, 만물의 영장이 보는 인터넷의 주인공이 되다가 재생의 기쁨을 맛본다는 것은 호강이 아닌가. 참붕어야, 너로 보아서는 성공한 삶이 아니더냐? 그러니 그때까지 너는 꼭 살아 있어야만 한다.
돌아오는 길에 생태 중 대태 2마리를 5천원에 사가지고 왔다. 노점 생선 장사를 하는 이 예쁜 여인이 생선을 썰지 않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다.
싱싱한 것을 어느곳보다 싸게 팔기 때문에 나도 네 사람 다음에야 살 수 있었다. 이 여인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좋은 물건을 싸게 팔면 단골을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다.
오늘 저녁은 이빨도 고쳤으니 먹고 싶던 술안주 해서 생태국을 실컷 먹겠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 혹시나 잡아온 고기가 죽으면 어쩌나 해서, 서둘러 재어보고 사진도 찍고 방생하고 오는 길이다. 그 크기는 그림처럼 28.3cm로 2cm 부족한 준척이었다.
오후에는 며칠 후에 떠날 울릉도 독도에 관한 자료를 찾으며 보낼 생각이다.
"실컷 자고 일어나고 싶은 때 일어나, 먹고 싶은 때 먹고 또 일하고 싶은 때나 의욕이 생길 때만 하고, 자고 싶어지면 자고…." 내가 전숙희 수필가가 원하는 삶'에다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자극'까지 지니며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니, 이는 남자로 태어나서일까. 시절을 잘 타고 난 까닭일까. 준비없는 노년을 외롭게 살다 가신 우리 아버지가 몸으로 가르쳐주신 준비된 노년을 살고 있어서일까.
|
|
Total 5,10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