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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4-17 10:04
 조회 :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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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의 자유로 도달하는 시적 발견 ▶
조윤아(문학박사.서울여대 강사)
1.
비에 젖은 사물은 비가 내리기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내비친다.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시간대에 자세를 취하고 있어도, 그 사물은 비에 젖기 시작하면 메말랐을 때와는 전혀 다른 형상으로 탈바꿈한다. 대체로 비가 내리는 날 유독 쉽게 감상에 빠져드는 이유 중 하나는 너무나 익숙해져버려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사물들이 새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우리를 일상성이나 상투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시적 상상력이란 바로 이 비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 독자들이 늘 익숙하게 마주 대하는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시적 상상력이다. 시인에게 관찰력이라든가 창의력을 요구하는 것은 시적 상상력에 대한 요구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만일 시인이 일반 독자들과 다를 것도 엇이 구태의연한 발상으로 시를 짓는다면 그것은 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시적 상상력만이 유한한 이 세계를 무한하게 만들 수 있으며, 날마다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누리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다.
2.
이 글은 우선, 지난 봄호 신작특집에 실린 작품 중 몇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시적 상상력이 이루어낸 모호성이나 애매성이 시작품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내일을 안고 오늘을 보낸다는 것
빠른 시간 궤도 속을 쳇바퀴 구름일까?
멈추라,
멈추어라고 붙들고 선 밧줄 하나
밤이면 밤을 베고, 낮이면 낮을 깎아
일그러진 종탑의 닳아버린 그루터기
손갈퀴
날카로움으로 다듬고 다듬는다.
가야할 길 걸어온 길 건너야 할 돌서더릿 길
철조망 헤젓다가 맨 마루 앉은 시야
먼 종루
흔들거리며 나침반의 빛이 될까.
- 김순금의 <종루>전문
위의 작품은 아마도 시인이 언젠가 보았던 '종루'를 떠올리며 지은 시조일 것이다. 시인은 종루를 단순히 묘사해 놓거나, 여행객들이 지나가면서 한두 번 웅얼거린 상투적인 교훈을 늘어 놓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이 작품에 담아 놓은 메시지가 한 번에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수의 '내일을 안고 오늘을 보낸다는 것/빠른 시간 궤도 속에 쳇바퀴 구름일까'라는 구절은 익히 자주 볼 수 있었던 구절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으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지만, 때로는 바쁘게 돌아가는 반복되는 삶에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이 구절만 보았을 때 이 작품은 구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절 구절 진행될수록 시인이 보여주는 세계는 매력적이다. 이 작품이 처음 주목을 끄는 부분은 종장 첫구 '멈추라'이다. '빠른 시간 궤도 속에'다람쥐 쳇바퀴(시인은 다람쥐가 아니라 '구름'이라고 했다. 떠돌다가 지나간 흔적을 알아보기도 힘든 '구름'이라 하여 삶의 허망함이 더욱 강조되었다) 돌듯 살고 있는 이 삶을, 물 흐르듯이 흘러가 버린 이 삶을 잠시 멈추게 하고 싶은 충동을 집약해서 '멈추라'고 명령한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우리가 모두 해보고 싶었던 말을 시인이 속 시원하게 대신 해주고 있다. 다음 구절의 '밧줄'은 아마도 타종하는 데에 스이는 당목(撞木)을 매달아 놓은 줄을 가리키는 듯한데, 시인은 그것을 붙잡을 수 없는 세월을 붙들기 위해 잡고 있는 '밧줄 하나'로 상상한다. 이 시구로 인해 나약한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 번 하면서 안타가움을 느끼게 된다.
둘째 수는 첫째 수보다 좀 더 가까이 '종루'에 다가간다. '종루'를 완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을 했던 목수의 정성을 '밤이면 밤을 베고, 낮이면 낮을 깍아'라는 표현으로 압축해 놓았다. 그렇게 해서 완성해 놓은 종루는 이제 '일그러지'지고 '닳아버'렸다. 첫째 수에서 제시했던 물살처럼 빠른 세월은 낡은 종루 통해 구체적인 형상을 입는다. 다음 이어지는 종장 첫수 '손갈퀴'역시 첫째수의 '멈추라'만큼 강렬하다. 아마도 시적 화자 자신의 '손갈퀴'일 터인데,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표현이다. 그 손갈퀴의 '날카로움으로 다듬고 다듬는'것은 무엇일까.'일그러진 종탑의 닳아버린 그루터기'인지, 아니면 모난 마음인지, 삶 그 자체인지 독자의 상상에 맡길 일이다.
마지막 수를 보면 시적 화자는 철조망이 쳐져 있는 어떤 곳의 돌계단을 하염없이 걷다가 어느 곳'맨 마루'에 앉아 저만치 있는 종루를 보고 있었던 듯하다. 가장 먼저 읽게 되는 작품의 평범한 제목'종루'에서 시작했으나 마지막수의 '먼 종루'에 이르는 동안 그가 마음껏 펼쳐 놓은 상상의 나래를 좇다 보면 타인의 삶을 관찰하거나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 귀중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다음은 제목이 평범하지 않는 작품을 살펴 보려고 한다. 그럴 때에 갖게 되는 작품에 대한 기대는 클 수밖에 없는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제목을 제시해 놓고 정작 본 작품에 들어가서는 상투적인 어구로 채워 놓은 경우가 허다하다. 이 때 독자의 실망은 배가 되기 마련이다. 아래 인용한 시조는 그런 위험성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허공에 수를 놓던
종달이는 소식 없고
검푸른 산자락에
두렁 길도 어데 간지
옛 생각
잊을 수 없어
서성이다 떠난다.
뒤란의 한 모퉁이
저당 잡힌 양심들로
점점이 문들어진
그리웠던 산과 들녘
상흔(傷痕)의
그 언저리에
내 설 땅은 어딘가?
- 김옥동의 <저당(抵當) 잡힌 햇살>둘째, 세째 수
'저당 잡힌 햇살'이 시선을 끄는 작품의 제목이다. 맑고 밝은 '햇살'에 잘 사용되지 않는 수식어구 '저당 잡힌'을 사용함으로써 암울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리고는 첫째 수와 둘째 수에서 '햇살'이 사라진 공간의 쓸쓸한 정경을 보여준다. '종달이'도 떠나가고 산조차 빛을 잃어 '검푸른 산자락'이며,'두렁 길'도 보이지 않는다. 그 적막한 공간에서 시적 화자는 '옛 생각 잊을 수' 없어/서서이다 떠난다.'그 생각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알수 없지만, '잊을 수 없어' 서성거렸다면 아마도 잊고 싶지 않은 정다운 추억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마지막 수에 와서 '저당 잡힌 햇살'은 '저당 잡힌 양심들'이라는 시구로 대체된다. 양심을 저당 잡혔다면 도의적이거나 인륜적이어야 하는 일들이 순리대로 돌아가지 않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점점이 문들어진''산과 들녘'이란 날이 어두워 사물이 경계가 분명치 않음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상흔'이 가득한 이 땅에'내 설 땅은 어딘가'하고 자문하는 마지막 시구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양심을 저버린 사람들 때문에 온전한 모습을 잃어버린 고향 혹은 고국 산천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 구체적으로 어떤 일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시적 화자가 괴로워하는 그 상흔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저당 잡힌 햇살','저당 잡힌 양심'이라는 주요 시구로 독자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불의, 혹은 가까운 이웃의 배반 등을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한 번 읽고 쉽게 간파되는 작품이 모두 우수한 작품은 아니다. 그와 같은 작품은 아주 성공적이거나 아니면 그 반대인 경우이다. 아주 성공적인 경우는 그 감동이 쉽게 사라지지 않아 두고두고 반복해서 읽히고 불려지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읽은 사람 자신도 읽었는지조차 기억해낼 수 없다. 시란 시인의 자기 성찰을 동반하면서 동시에 독자의 자기 성찰을 유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상투성과 구태성으로 인해 작품의 존재조차 인식되지 못한다면 그 시는 제 역할을 다 해내고 있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3.
그렇다면 쉽게 간파될 수 없게, 모호하게 시를 지어야만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모호성과 애매성은 시인이나 독자가 자유롭게 상상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터전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지, 남다르게 보이기 위해서 뜻모를 어구들을 나열해 놓아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다음 살펴 볼 작품들은 모호성이나 애매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에 담겨 있는 메시지가 분명하면서도 지나쳐버릴 수 있는 일상을 시적 안목으로 건져올려 빛을 발하게 한 작품들이다.
도시 아파트 단지 내
귀퉁이의 자투리 땅
한 뼘의 고향을 애써
가꿔 논 할머니 있어
시간이 갈피마다에
잃은 빛 물들여 준다.
짐승보다 외론 시간
바람에 날리자는데
잊은 얼굴 묵은 얘긴
노을 빛에 걸어 두고
가꾼 맘 오색 무지개
메아리에 두고 있다.
-전석종의<자투리 땅>전문
언젠가 보았던, 아니 오늘도 어디에선가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고난이도의 상상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차근차근 섬세하게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놓은 것처럼 시를 지어 놓았다. 껑충하게 아파트 건물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그 건물들 귀퉁이, 그런 땅이 그곳에 있었는지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조그마한 자투리 땅에 한 할머니가 꾸부정하게 앉아 일을 하고 있다. 이미 씨앗에서 싹을 틔운 줄기들이 연초록빛을 띠며 나란히 올라와 있고,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 저녁 노을이 하늘 가득하다. 이렇게 시각적인 이미지가 확연하게 떠오르는 작품이다.
시인의 상상력이 활발하게 발휘된 곳은 마지막 수'짐승보다외론 시간','잊은 얼굴 묵은 얘기'부분이다. 자투리땅에 자라나는 새싹이며 열매를 보면서, 때로는 그곳에 머물러 있는 할머니를 보면서, 시인은 노인의 외로운 삶을 상상한다. 더 나아가 그 노인게게 있었을 젊은 날의 사연들을 상상한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서 나온 상상이다. 눈부신 시적 수사나 세계를 압축해 놓은 함의 따위는 없어도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상상력이 독자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이제 아파트 단지 내 자투리땅을 보면서 우리는 그냥 지나쳐 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시적 상상력으로 말미암아 그만큼 자아의 세계는 더 크고 다양해진 것이다.
이처럼 아파트 단지 내 잘 가꾸어진 텃밭을 보았던 사소한 경험 하나가 시인에게 상상력의 원동력이 되었다면, 시인이 경험하는 남다른 사건은 그야말로 소중한 시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다음 살펴 볼 작품은 '이장(移裝)'이라는 독특한 경험을 토대로 죽음에 대한 주제의식이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역시 앞서 살펴보았던 작품과 마찬가지로 감상하는데에 어려움이 없고 메시지가 분명한 작품이다.
할미꽃 조막손 흔들던
양지쪽 봉긋한 무덤
징용간 그 피붙이 기다리다 눈먼 세월
가을비 사그락대도
행여 긴가 귀 세운다.
동구 밖 할퀴고 오는
검은 갓길 바람에
먼 선영 끝자락에 어깨 비벼 이사하던 날
또드락 똑딱 또드락 또딱
열려진 봉분 속에선
다듬질 소리 들린다.
흘러간 샛강 저편
이젠 아무도 건널 수 없어
육탈(肉脫) 옮기는 결에 무엇을 더 지고 가랴
무채색 영겁의 시간.
환한 하늘 열릴까.
-최오균의<뉘엿한 꽃철 지나 이장(移裝)하던 날> 전문
지난 세월에 있었던 안타까운 모정이 되살아나느 한편, 죽음이 갈라놓은 이승과 저승의 괴리감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둘째 수의 '또드락 똑딱 또드락 똑딱/열려진 봉분 속에선/다듬질 소리 들린다'는 구절에 이르면 저승의 한 모습을 엿본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징용간 그 피붙이'를 기다리면서 그 마음을 삭히느라 내려놓지 않았던 여인의 다듬이질 소리가 저승 그곳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아 슬픔을 자아낸다.'아무도 건널 수 없는''육탈(肉脫)의 세계를 넘겨짚어 보면서 누구든 언젠가 가야만 하는 '무채색 영겁이 시간'이 지배하는 그 세계를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4.
지금까지 지난 호 신작특집란에 실렸던 몇 작품 중에서 시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모호성의 특징을 지닌 작품과 사실성의 특징을 지닌 작품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적 상상력의 자유로움이다. 그 자유로움에서 새로운 시적 발견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시적 발견은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논제외 연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언급하지 못했던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꼽아 본다. 김광수의 <눈길에서>.김순금의 <불혹의 강>, 김양수의 <아버지 계신 나라에서 온 눈.2>, 김종렬 <어머니의 빨래>, 김종태의 <대덕산 매자골>, 김차복의 <목련(木蓮) 아래>, 이봉수의 <봄소식>, 이흥우의 <가시>, 한병윤의 <겨울바람>, 홍병선의 <가을산> 등에 담겨 있는 시적 상상력에 대한 이해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 시조문학 2002.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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