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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4-07 15:53
 조회 :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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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우영의 시조집 『산행시초(山行詩秒)』
탈속과 해탈의 길, 山行/ 김 준
1.
『山行詩秒』는 윤우명 시인이 산에 오르면서 경험했던 느낌이나 생각, 깨달음 등을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촘촘히 담아 놓은 풍경화 같은 시조집이다.
삶(生)은 축복이자 기쁨이지만 때로는 고통스러운 짐이되고 슬픔이 된다. 이러한 삶의 그늘을 윤우영 시인은 山行을 통해서 승화시키려 한다. 그렇다면 왜 산행인가. 시인에게 있어서 산, 다시 말해 자연이란 티없이 맑고 깨끗한 어떤 것이며 세속에서 벗어난 무소유 그 자체를 의미한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자연을 닮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自然同化, 自然合一은 그에게 탈속의 길이자 해탈의 길이다.
2.
시인이 주로 오르는 산은 북한산과 도봉산이다. 북한산행 중에서도 僧伽寺 입구에 놓여 있는 108개의 돌계단 靑雲橋를 힘겹게 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백팔번뇌를 되새기며 한 계단 한 계단 도를 닦는 마음가짐으로 산행을 하고 있다. 산 전체가 하나의 웅대한 바위라는 바위라는 도봉산행 역시 쉽지 않다.
날씨는 춘삼월 계절은 엄동설한
萬丈峰 가는 길이 돌 바위 지천이라
제여곰
앙금앙금 오르니
길짐승 따로 없네.
-<산행시초 겨울13>첫째 수
위의 시조에서처럼 때때로 길짐승이라도 되는 양 오로지 힘겨운 산행에만 몰두하는 등산객들의 모습은 修道士 들의 苦行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시인은 힘겹기는 하되 정다운 산새 소리와 색색의 산꽃이 반기는 산행, 모든 감각이 깨어나 귀가 트이고 눈이 맑아지는 산행을 하고 있다. 기쁨과 고통이 함께 공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윤우영 시인의 산행이다.
'至賤인 돌 바위길 허벅지벅 오르'면서도 '아득히/암벽 타고 흐르는' 청량한 물소리를 듣는가 하면 (<산행시초 가을 1>), 수백 개의 돌 층계를 오른 후 취 잎새를 뜯으며 그향내에 취하기도 하고 (<산행시초 가을 11>),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또 닦아 내며'정상에 올라서서는 '한 줄기/ 산바람 맛'(<산행시초 겨울4>)을 온몸으로 느끼기도 하는 것, 바로 이러한 함겨우면서도 즐거운 산행의 과정을 이 시조집을 읽는 독자 역시 경험해 볼 수 있으리라.
3.
윤우영 시인은 산에서 淸淨과 自由, 그리고 無所有를 본다. 그에게는 유독 청정한 물살(<산행시초 봄 8>)과 자유로운 몸짓을 하는 송사리들(<산행시초 여름 1>)가 빈 손의 나뭇가지(<산행시초 겨울 2>)들이 눈에 뜨인다. 그가 마음 속에 그려보았던 것, 그가 다다르고 싶은 경지를 산 속 자연의 모습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 산 올라보면
안 가진 게 흉 아니다.
나무들 빈 손 들고
裸身으로 서 있으니
구태여
이 자리서 貧者富者
가릴 게 뭐 있겠나.
요 며칠 내린 비로
개울물 청 돋우고
구름이 詩를 쓰니
바람이 낭송하고
길섶에
冬芽草 몇 송이
바람에 춤추누나.
-<산행시초 겨울 2>전문
위의 작품을 보면 무소유 상태의 자연에서 깊은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부자와 가난한 자로 갈리어 다툼과 질시와 차별이 끊이지 않는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평화로움이 시를 쓰는 구름, 시를 낭송하는 바람, 바람에 춤추는 풀잎에게서 물씬 풍겨나온다. '안 가진 게 흉 아니다', 구태여 '貧者 副者 가릴 게 뭐 있겠나'하는 말은 시인이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자신을 타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와 같이 자연이 보여주는 평화의 경지에 다다르고 싶어한다. 그래서 때로는 자연과의 합일을 시도하고 때로는 명상으로 마음을 비우려 한다. 그의 산행은 步行, 瞑想, 그리고 自然同化가 어우러져야 완성되는 것이다.
4.
바윗돌을 베개 삼아 나무 아래 평화로이 누워 흰나비 무리와 어울리는<(산행시조 봄10>)한 폭의 情景은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하던 시인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때로는 '잎지는 微聲조차 뚜렷이 들려'와 '아마도/寂莫空山에/ 내 몸'을 맡겨 둔 것이 아닌가(<산행시초 가을 5>), 나는 이미 내가 아니라 산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행복한 환희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은 쉽게 흔히 오지 않는다. 보행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는 명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 명상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山寺이다.
시인이 오르는 산에는 반드시 山寺가 있고 庵子가 있다. 히말라야 산맥을 등정하는 산악인들처럼 산만을 보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 속의 절을 찾는다. 북한산의 一禪寺ㆍ僧伽寺, 도봉산의 天竺寺ㆍ龜峰寺ㆍ天眞寺ㆍ能園寺ㆍ道峰寺ㆍ望月寺ㆍ觀音庵ㆍ石窟庵ㆍ滿月庵 등이 그의 산행에 자리 잡고 있다.
一禪寺 境內에서
冥想錄 듣고 나서
마음을 텅 비우니
편안하기 짝이 없고
無所有
뜻 다시 새기며
오르던 길 되 걷는다.
-<산행시초 가을 8>일부
望月寺 건너 보며 하산길 재촉타가
우연히 滿月庵서 佛前에 예 올리니
어느새 바람이 내 罪 안고
멀리 멀리 달아나네.
-<산행시초 겨울13>일부
산에는 산사가 있고 산사에는 염불소리가 있다. 명상록을 외는 염불소리를 들으며 무소유의 뜻을 새기는 과정은 시인의 산행이 단순히 땀을 흘리는 步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산행 중 '숨차게 올라서서''石佛像'을 향해 '고개 숙여 합장'(<산행시초 여름14>)하는 일은 소중한 과정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비워지고 '바람이 내 罪 안고/ 멀리 멀리 달아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듯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청정한 물살에다' 마음을 '헹굼질' 하고팠던(<산행시초 봄 8>) 시인의 바람이 이러한 합장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아마도 시인은 속세의 汚眞을 씻고 자연과 합일을 이루려면 산사로 길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산사는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있기때문이다. '은은한 염불소리'는 '산개울 물소리와 協和音'(<산행시초 겨울6>)을 이루고, 極樂發願이 한창인 목탁 염불소리는 매미떼의 소란과 어우려져 <(산행시초 가을 2>) 산사는 이미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자연과 멀어지는 하산길은염불소리와도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산행시초 가을11>). 시인은 속세의 부정적인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정무구의 자연을 동경하며 산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과 동화되고픈 마음에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된 산사에 들려 어느 새 시인은 자연의 일부가 되고 세상의 짐은 내려지며 무소유의 깨달음에 이른다. 이처럼 그의 산행은 스스로 자연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5.
시조는 외형률로 인해 詩情이 마음껏 펼쳐지지 못하고 억압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윤우영 시인은 이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봐란 듯이 자유롭게 시조를 써내려 간다. 三章六句로 이루어지는 시조의 특성을 잘 살린 章과 句의 다채로운 運用은 눈이 부시다. 초장,중장,종장을 단순하게 각각 구별배행을 하는 것에서부터 중장만을 늘이거나 종장만을 늘이는가 하면, 초장과 중장은 옛시조의 배열을 따르되 종장을 3행으로 가르기도 한다. 또 각 장을 3행으로 나누어 배열하기도 하고 각 장을 어절별로 나누어 행을 바꾸기도 하면서 단시조나 연시조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이와 같은 운율의 다채로움은 그저
시험적 시도가 아니라 詩想과 맞아 떨어져 절묘한 아름다움을 창출한다는 데에 더욱 뜻깊다.
산행길
힘겨운데
머언
푸른 숲서
소쩍다
소쩍다
소쩍새
잦이 울고
철쭉꽃
自盡자리에
오랑캐꽃
웃고 섰다.
-<산행시초 봄 11>전문
언뜻 자유시처럼 보이는 위의 작품은 어절 단위로 행을 바꾸고, 초ㆍ중ㆍ종장의 배열 대신 하나의 句로 하나의 연을 구성한 단시조이다. 옛시조와 비교하자면 잦은 줄바꾸기가 일어난 것인데, 이와 같은 외형률의 구성은 봄의 단아한 정경을 한층 돋우어 빛내고 있다. 詩歌를 낭송할 때엔 한 호흡을 단위로 하는 음보를 기준으로 읽기 마련이다. 위의 작품을 낭송해 보면 첫구 '산행길'을 한 호흡으로 하고 잠시 쉬었다가 '힘겨운데'를 읽고 난 후엔, 좀 더 긴 호흡으로 쉬었다가 다음 연의 첫구 '머언'으로 들어가야 한다. 章別配行(초ㆍ중 ㆍ종장을 각각 한 행으로 하는 구성)보다 더 많은 '쉼(休止)'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 구절의 뜻처럼 힘겨운 산행길을 서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느낌을 주게 된다.
이렇게 천천히 행보할 때에는 만물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터인데, 이 작품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정갈하게 그려 놓았다.
이 외에도 구절의 뜻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운율 구성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가랑잎
바람을 달고
산비알 데구루루
...(중략)...
우연케
만난 아낙네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행시초 여름6> 둘째 수
먼저 <산행시초 겨울 5>를 보면 한 章을 '3/ 4/ 4ㆍ4'의 3행으로 배열한 경우인데 세 번째 행의 많은 字數가 앞의 짧은 두 행과 비교되어서, '데구루루' 구르는 풍경이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쾌하게 걷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 듯 선명하게 떠오르게 한다. 다음 <산행시초 여름 6>을 보면 초장과 중장은 4음보로 가득 찬 상태에서 종장을 3행으로 가른 경우이다. 가장 위에 있는 초장의 가득한 음절들은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퍼부울 듯한 검은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가운데 종장의 가득한 음절들은 주위를 둘러싼 봉우리들을 그려 놓는다.
그리고 종장의 첫구절 '봉우리'를 따로 우뚝 세워 놓고 그것을 휘도는 비 안개가 다음 줄에서 봉우리의 허리를 감고 있다. 이처럼 韻律과 字意가 조화를 이룬 한 편의 시를 낭송하고 감상하는 기쁨은 산행의 기쁨과 맛먹는다. 산행에서 기쁨을 얻은 윤우영 시인은 우리에게 그런 기쁨을 선사한다.
6.
『山行詩步』에서 절묘한 운율의 운용만큼이나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은 아름답고 정확한 표현들이다. '개울에/ 이는 포말이/ 나래 터는 학만 같다 (<산행시초 가을 8>)'고 한것이나, '간간이/ 바람 끝에/ 꽃잎처럼 片雪(<산행시초 겨울 16>)'라는 구절에서는 물거품과 쌓인 눈이 한층 격상된 아름다운 포오즈를 하고 있다. 또한 겨울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잔설이/ 목 풀리려먼/ 冬夜처럼 길겠네 (<산행시초 겨울 13>)'에, 성큼 다가운 봄기운은 '묏새가/ 나는 바람에/ 새봄 놀라 눈 뜬다(<산행시초 겨울15>)'에 잘 녹아 있다. 이 외에도 물속에 비친 하늘을 두고 '하늘이 잠긴 水心'이리고 표현한다든지 하산길에 맞게 된 비(雨)를 두고 '빗방울/ 등 두드리며/ 하산길 재촉한다 (<산행시초 여름 1>)'고 한 것, 낙엽이 쌓인 위로 내리는 가을비 소리를 '투두둑/ 낙엽비 듣는 소리 (<산행시초 가을 15>)' 라고 표현한 것 등과 같은 윤우영 시인만의 개성과 표현력이 돋보이는 구절들은 시조집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행과 명상과 자연동화로 이루어지는 산행에 때로는 외로움이 있다. 그래서 시인은'햇살과 동행(<산행시초 겨울 1>)' 하거나 '앞 산객의 발자국 (<산행시초 겨울 16>)'을 따라 오르거나 '그림자와 벗(<산행시초 여름 6>)'하며 산행을 한다. 산행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는 것은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며 초면의 산객조차 곧 친구로 받아들인다. 시인은 고독한 수련을 하려고 산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시름을 잊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청정무구한 자연과 어우러지는 낙원에 잠시라도 머물고 싶어 산행을 하는 것이다. 그가 산행을 청하면 나 역시 함께 동행하리라.
<시조문학 2003년 봄호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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