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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2-11 20:24
 조회 :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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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선상에서 :아름다운 일몰을 바라보며
- 이정자
살아오면서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한 두 가지 뿐이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나하면 또 잊혀지지 않는 일이 그 얼마나 될까. 지난 것은 이제 그만 접어두고, 이제부터 곱고 아름다운 추억을 새롭게 만들리라.
이번 러시아 북유럽 여행은 12일 간의 알찬여행이었다. 러시아에서는 국내선 비행기로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그로 이동하여 시간이 절약되었고, 핀란드에서 스웨덴으로, 오슬로에서 코펜하겐으로, 스톡홀름에서 탈린으로 갈 때 호화유람선을 이용하여 선상에서 편안하게 3일을 지냈으니 시간을 절약한 셈이다. 망망대해를 선상에서 바라보며 백야도 만끽할 수 있어 좋았다. 해는 22시 45분에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그 후도 12시가 넘도록 바다는 서쪽 하늘에 붉은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완전히 어두운 시간은 2-3시간 정도일까 싶다. 해는 새벽 4시에 완전히 솟았다. 새벽 2시 30분에도 날은 밝은 편이었다. 이 시각은 위도에 따라 또 시간(날짜)이 지남에 따라 백야현상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몰을 본 시간과 일출을 본 시간차는 꼭 1주간이다. 곧 일몰은 6월 23일 투르크(핀란드)에서 스톡홀름(스웨덴)으로 갈 때이고 일출은 30일 스톡홀름에서 탈린(에스토니아)으로 갈 때 본 것이다.
이 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물론 자연환경이 주는 만년설, 피요르드, 호수......등과 각 도시마다에서 본 그 나라 역사, 문화, 건축도 새롭고 훌륭했지만, 무엇보다도 망망대해를 가르는 선상에서 일몰을 바라볼 때의 그 순간과 그 때의 사람들, 그리고 그 엄숙했던 분위기이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그 시간에(물론 8층 디스코텍에서는 밤새도록 시끄러웠다)나는 10층 Conference Center에서 글을 쓰기도 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던 그 시간들이다.
사람은 어떻게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을까? 저 일몰하는 순간처럼-. 일몰은 찬란하고 장엄했다. 서쪽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되어 온통 붉은 빛으로 곱고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일몰을 보기 위해 하나 둘 서서히 사람들이 카페 창문 쪽을 향해 가득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서쪽 바다를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가만히 그냥 모두가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22시 45분 드디어 해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수평선 그 너머로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은 한참 동안 엄숙, 적막, 상념 그 자체였다. 그 일몰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각자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각자의 생각은 모르지만 그 순간은 너무 숙연했다. 대자연을 향한 죽음에의 엄숙함일까. 환호보다 진하고 거룩한 침묵의 순간이었다. 일출 때의 환호보다 일몰 때의 침묵은 엄숙하고 거룩했다.
인생의 일몰도 저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눈을 감는 그 순간 말이다. 먼저 떠난 몇 분의 죽음이 생각났다. 어느 죽음이 슬프지 않으랴마는 비명에 가신 분들이나 젊어서 가신 분들은 많은 이들을 슬프고도 마음 아프게 한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만 지금은 인명도 재인이라 한다. 곧 자기 자신에 달려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은 의술이 발달하여 수명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좋은 의술에도 일찍 죽는 사람도 있으니 인명은 재천이란 말이 헛되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어떻든 죽음은 누구에게나 어느 때든 다가온다.
나의 아버지는 아흔넷(94세)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가신 후 23년을 더 사신 것이다. 20여일 몸져누우셨고, 약 5일간 장손(長孫)으로 하여금 밤에 잠자리를 지키게 하셨다. 그리고 오전 8시 30분-9시경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가셨다. 아버지께서 누워계실 때 나는 몇 가지 부탁을 드렸다. 첫째, “아버지, 제가 있을 때 꼭 가셔야 해요.” 둘째, “아버지 돌아가신 후 저 무섭게 하지 마세요.”(이 말은 돌아가신 분들이 정을 떼기 위해서 무섭게 한다고 어릴 때부터 들어왔기에, 또 사실 큰 오빠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밤이면 무서웠기 때문에) 셋째, 아버지 은덕으로 우리 모두 잘되게 해주세요.(조상의 은덕이란 말이 있듯이) 했다. 아버지는 “너희 덕택에 호강했다” 하셨다. 이 말은 아버지께서 여행을 좋아하셔서 방학 때면 꼭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많이 했다. 79년도 해수욕을 우리 가족끼리만 간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우리끼리만 간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장손(큰 오빠의 아들)이 모셨고 이웃에 사셨기 때문에 자주 오시거나 내가 가기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내 부탁을 다 들어준 셈이다. 돌아가시는 날 나는 학교를 가면서 아버지께 들렸다. 방안에 들어서는데 아버지께서 손을 저으며 저항하는 표정이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아버지 ...”하자 아버지는 안온해지셨다. 나는 모두에게 삐삐를 했다(핸드폰이 나오기 전) 의사에게도 연락했다. 질부(姪婦)는 잠간 나간 사이었다.
늘 그랬듯이 아버지 손과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 드렸다. 출근길에서 모두가 모였다. 아버지는 거짓말처럼 평안해지셨다. 한 잠 동안 모두가 서 있다가 우리는 모두 출근길에 다시 나섰다. 내가 가면서 “아버지 저 학교에 갑니다.” 답이 없어서 다시 옆으로 가서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 학교 갔다 올께요.” 해도 눈을 맞추지 않으셨다. 그래도 나는 학교에 갔다. 강의실로 가서 출석을 부르는데 조교가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그 때 이미...... 눈을 뜬 채 가셨구나.” 그것도 경험이다. ‘하기야 그렇게 사랑했던 작은오빠의 아들이 유학 중이니(뉴욕에 거주) 그 손자를 못 봐서 눈을 뜨고 가셨구나.’ 눈을 안 맞출 때는 이미 활동이 중지된 것을 몰랐다. 그리고 내가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 손을 저으며 저항하던 그 표정은 저승사자가 데려가려할 때 “지금은 아니다. 조금 기다려라. 내 딸이 아직 안 왔다. 내 딸이 있을 때 가야 된다.” 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들어서자 안온해지신 것이다. 그리고 자손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가셨고......
우리는 모두 함께 아버지 장례를 잘 치루었다. 4촌 오빠들도 집안의 마지막 어른이신 아버지의 장례를 잘 하게 해 주셨다. 고향의 선산으로 올라갈 때는 꽃상여로 갔다. 그렇게 예쁜 꽃상여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대리석으로 멋있게 묘를 장식하면서 엄마와 합장을 했다. 4촌 오빠들이 주선한 것이다.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1년 후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월하 이태극 선생님이시다.
둘째, 셋째 부탁도 아버지는 들어주셨다. 나는 영적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함께 육체의 아버지이신 나의 아버지께 항상 감사한다. 자손들이 모두 제 길을 잘 가고, 내가 건강하게 이렇게 학문과 문학의 길을 걷고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
일몰의 순간을 바라보며 남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 나는 내 주위를 뒤돌아보며 돌아가신 나의 부모와 두 오빠를 생각하며 나의 임종도 상상해 보았다. 일몰은 노을이 있기에 아름답다. 아름다움이 있기에 눈길을 멈추게 하고. 그리고 그 눈길 속에는 엄숙함이 있었다. 우리의 인생도 저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
나도 아버지처럼만 평생 책을 가까이 하며 맑은 정신으로 건강하게 살다가 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일몰이기를......
(2011,이대동창문인 수필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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