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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6-11 10:24
 조회 : 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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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2012. 여름호)
시조의 매력을 찾아서
김 석 철
(전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창간 반세기를 훌쩍 넘긴 계간『시조문학』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금년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우수문예지 발간지원사업의 수혜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따라서 지난 봄호엔「100인 신작특집」을 마련하기도 하였는데, 시조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정말 반갑고도 경사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연유로 봄호는 편집 분량도 많아 무려 370여 쪽에 이르고 있었으며, 또 거론하고 싶은 작품도 많았으나 지면 관계상 부득이 제한적으로 선별하는 수밖에 없었음을 밝혀둔다.
문학의 아름다움은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통해 형상화된다. 시조작품의 아름다움도 마찬가지여서 감상을 하다보면 형식적 특성인 생동감에서 오는 매력도 있고, 내용상의 특성인 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도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매력들이 독자를 즐겁게 해주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봄호에 실린 작품을 중심으로 편의상 편집순서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봄호의 앞부분 <소시집>란에는 박종대 시인의 연작시조「목어로 오르는 칠산바다 황금조기 왕눈이의 메시지49」를 선보이고 있었다. 박 시인은 “시작메모”에서 “우리 그리움들이여, 우리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서 만나는 둥 마는 둥 하지 말고, 한번 무릎 맞대고 만나 보면 어떤가. 그 깨끗한 눈망울 똑떨어지게 보고 싶단 말이야. 임자는 내 눈망울 보고 싶지도 않은가. 평시조만으로의 서사는 어려울까? 제목으로, 대화로, 몽타주 등으로 헤쳐 나가 보려 했으나 역시 그렇다. 편집 관계로 부득이 배행이 모조리 다 일률적으로 3행 배행이 돼 버릴 것 같다. 다음 단행본에서는 마땅히 제 모습대로 바로잡아질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열림마당》
녀석 눈 무섭게 크네 왜 봐 임마 눈 부릅뜨고
예끼 내동댕이 갑판 위에 맥없이 팍!
그 순간 모양에서 나온 나 육신이여 이승이여
- 박종대, 「모양에서 나오다」 전문
《닫힘마당》
큰 눈을 가진 모양 속에 자리잡았다 싶었는데
숨소리 울음 소리 칠산바다 황금조기떼 그림자
포근히 감싸 오는 「없음」이여 어무니!
- 박종대, 「모양에 들어가다」 전문
박 시인의 연작시조는 모두 49수로 작품 하나하나에 그 번호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번호가 없는 첫 수와 맨 끝 수만을 뽑아본 것이다. 위의 “시작메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 원고는 행의 배치를 운율과 의미, 시각적 효과 등을 고려하여 다양하게 표기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작심을 하고 창작한 역작임이 분명하다. 재미와 해학과 위트가 느껴지는 보기 드문 서사적 구조의 시조다. 종래의 고정관념을 뛰어 넘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것이다. 시조가 상상력에 호소하는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의 화자가 1인칭에서 전지적 관찰자 시점까지 자유롭게 넘나들어 상상의 폭을 넓혀 주고 있으며, 등장인물도 “사람” 외에 “도깨비”, “마고할머니” 등이 등장하여 해학적인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끌어 간다. “그리움의 워크샵”을 여는가 하면, “천상 천하 도깨비대회”도 개최하며 마지막엔 대회주제가「눈맞추기놀이」를 부르고서《닫힘마당》으로 마무리한다. 그렇다! 우리는 깨끗하고 순수한 눈망울이 그립다. 오며가며 그냥 스쳐 지나는 눈이 아닌 똑떨어지게 마주 보며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순수한 눈망울이 그리운 것이다.
사방이 어둠에 잠겨 저승처럼 막막한 밤
땅덩이 몽땅 갈아 새 누리를 빚을 듯이
천둥은 맷돌 돌리고 번개는 칼춤 춘다.
번쩍이는 번개보다 더 강렬한 갈망을
뜨고도 바로 못 보는 사시를 바로 잡나
섬뜩한 도끼날 섬광 소름 오싹 돋는다.
길 잃고 허둥대다 역리에 함몰된 반도
흔들리며 서성이는 바람의 그림자여
어디쯤 새벽이 오나 온 산하가 들썩인다.
- 김광수, 「아닌 밤중에」전문
“아닌 밤중에 홍두께”란 말이 연상되기도 한다. 천둥 번개 치는 광란의 밤을 비유하여 대단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호소력 있는 작품이 아니겠는가. 현실에 안주하여 무사안일에 빠져있는, 아니 눈뜨고도 바로 못보는 어리석은 작자들에게 내리는 철퇴라고도 생각된다. “길 잃고 허둥대다 역리에 함몰된 반도/ 흔들리며 서성이는 바람의 그림자여/ 어디쯤 새벽이 오나 온 산하가 들썩인다.” 메타언어의 그 깊은 매력이 실감된다.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나이테 사리던 밤
서설이 내리더니
기왓골도 달동네도
순백으로 하나 되고
가없는 축복의 아침
푸른 해가 솟는다.
- 김사균, 「원단(元旦)」 전문
시조는 단수가 제격이라고 했던가. 김 시인은 한결같이 단수만을 즐겨 쓰고 있다. 시조다운 태깔을 잘 지키는 가운데 서정적 가락을 자연스럽게 표출해내고 있다. 3장 6구 12음보를 갈고 닦으며 눈부신 보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나간 날들을 뒤로하고 새롭게 맞는 원단, 원단은 시작이고 희망이다. 온 천지를 순백으로 덮은 서설의 아침은 그야말로 창조의 아침이요, 가없는 축복의 아침인 것이다. 김 시인은 푸른 해가 솟는 아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푸른 해”는 시작과 희망의 시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긍정의 마음밭에 시각적 심상을 빌어 새아침의 경건함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고향 집에 도착하면 언제나 밤이었다
단 한 번 환한 대낮에 찾아오지 못한 죄
지친 몸 뒤척이다가 날 밝으면 돌아섰다.
밤늦도록 엄니 품을 머뭇대던 푸른 날
그마저 갈 수 있다면 눈물도 성하겠네
어머니 길 떠나시고 폭설이 회오리치네.
- 김영재, 「설날」 전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설”이란 말은 순수고유어로서 “새해 첫날”을 의미하며 요즘에 와서 “설날”은 “민속의 날”이라고 하여 우리나라 제일의 명절로 삼고 있다. 설날엔 객지에 나간 가족들까지 모두 모여 집안 어른을 모시고 설맞이를 하며 즐거움을 나눈다. 설 명절에나 고향을 찾게 된 시의 화자는 그나마 바쁘다는 핑계로 항상 늦은 시간에 왔다가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아쉬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수 종장에서 당시 삶의 고단함이 나타나 있으며, 둘째 수에선 떠나신 어머니에 대한 후회스러움과 애통함이 그려져 있다. 정철의 “훈민가” 중 “자효(子孝)”라는 시조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외진 들녘 한뼘 땅에
풀잎 하나 피어나서
하늘 향해 손짓하면
깃발처럼 화답하고
구릉(丘陵)을
휘돌던 바람도
여기 와서 멈춘다.
- 김월한, 「풀잎 한가닥의 손짓」전문
하찮은 풀잎 한가닥이지만 시인이 의미를 부여하면 대단한 상관물이 되기도 한다. 시인의 눈은 발견의 눈이요, 깨달음의 눈이라고 했던가. 구릉을 휘돌던 바람도 풀잎이 손짓하면 깃발처럼 화답하고 풀잎 하나에 멈춘다고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사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의 이미지를 빌어 형상화된 듯 가시권 밖의 세계를 보는 느낌이기도 하다. 어쩌면 시의 화자가 우주의 진리와 내통하는 달관의 경지가 아닐까. 시인의 섬세하고도 예민한 감정과 풍부한 상상력이 독자를 즐겁게 해준다.
더러는 외로움도
더러는 즐거움도
한때나마 겪고 있던
소중한 마음이라
수유도
영원으로 가는
잊지 못할 생각이다.
- 김 준, 「나의 부스러기」 전문
시조의 제목은 내용과 합치하여 상징적, 함축적, 핵심적 의미를 띤다고 했다. 이 작품에서 제목붙이기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시조에는 삶의 진지한 의식을 언어로 환치하는 묘미가 있다. 삶은 축복이라고 했고, 문학은 삶의 구원이란 말도 있다. 희로애락의 순간순간이 그야말로 소중하고도 귀한 삶이 아니겠는가. 단시조이지만 시인이 겨냥한 세계는 영원까지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지니고 있다. 순리를 따르는 안목 속에 보편적 가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며, 호흡의 절제와 자연스런 율격을 체득케 하는 시조다. 종장을 보면 “수유도/ 영원으로 가는/ 잊지 못할 생각이다.”라고 했다. “부스러기”를 단지 “부스러기”로만 보아선 안 될 일이다. 부스러기가 모이고 모여 전체를 이룬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때로는 산다는 게
숨 쉬는 놀이여라
어쩌면 주소 없는
저 바람 그것인 것
그것은 꿈을 태우는
파도이며 꿈인 것을.
- 대 우, 「산다는 것은」 전문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답을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이 “삶”의 화두를 놓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대우 큰 스님께서는 산다는 게 어쩌면 “숨 쉬는 놀이”, “저 바람 그것인 것”, “파도이며 꿈인 것을”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 우리 보통 사람으로선 산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고, 절대로 하찮은 일이 아니다. 헌데 큰 스님께서는 깨달음의 경지가 얼마나 깊으신지 짐작조차 못할 일이다. 시상은 결국 영감에서 오거나 혹은 사려 깊은 사고나 상상력에서 오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불가의 선(禪)적 깨달음인 “색(色)은 곧 공(空)이요, 공(空)은 곧 색(色)이다”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쯤 되면 풀지 못할 화두도 없을 것이며 용서 못할 죄악도 없을 것이다.
천년을 생명처럼 소금꽃을 피워 올려
샹그릴라 그 너머로 오체투지 몸 받치는
고통의 그림자 펴서 생의 북을 만들고,
죽음을 넘고 넘어 환생으로 걸어가는
천길 단애(斷崖) 마방들의 말방울 소리 맞춰
연화생(蓮花生) 그 길을 따라 구름 위를 걸어가고,
남루한 한 생을 버티기 위하여
설산처럼 떠있는 이승을 벗기 위해
내밀면 잡힐 것 같은 하늘 위를 걷는다.
- 박영우, 「절해(絶海), 차마고도」 전문
필자는 아직 차마고도를 직접 가 본적이 없지만 매스컴에서 소개하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을 대하고 보니 그 기억이 눈앞에 선하다. “소금꽃”, “오체투지”, “천길단애”, “연화생” 등 시어의 상징적 의미는 주제의 심화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시상의 포착과 그 전개를 살펴볼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詩學)에서 말했던 시의 3단 구성법처럼 기-서-결의 점층적 구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수 연시조에서 각 수 종장을 발췌하여 하나로 이어보니, 언뜻 또 한 수의 새로운 시조가 될 법도 했다. “고통의 그림자 펴서 생의 북을 만들고,/ 연화생 그 길을 따라 구름 위를 걸어가고,/ 내밀면 잡힐 것 같은 하늘 위를 걷는다.”
땅거미 가든 오든 그들에겐 때가 없다
의지는 줄 서는 것 먹는 것이 전부다
바닥에 인간 띠 엮는 무의지 퍼레이드.
(중략)
어느 땐 아흐레 한번쯤도 없는 시주
독경은 뼈만 남아도 맥이 뛰는 반야심경
역사엔 눈치만 많은 부처님이 사신다.
- 서순석, 「역전(驛前) 와불」 부분
세 수 연시조 중에서 둘째수를 생략한 것이다. 시나 시조는 내공을 쌓는 일도 중요하지만,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작품은 시대적 환경이 그 배경이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배경지식은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노숙자”라는 직업은 현대의 부산물이다. 복잡한 현대생활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노숙자로 전락하는 이들의 심정이 어떠할까? 머무를 곳조차 없어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오가는 곳이나 역전에 나와 앉아 한 끼 식사라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바라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작품의 끝수를 보면 “어느 땐 아흐레 한번쯤도 없는 시주/ 독경은 뼈만 남아도 맥이 뛰는 반야심경/ 역사엔 눈치만 많은 부처님이 사신다.” 라고 했다. 이 절박한 상황 앞에 대책 없는 무의지의 노숙자들은 오늘도 역전에서 와불(臥佛)이 되어 삶을 연장하고 있는 것이다. 와불! 시어는 언어의 너머에 깊이 드리워져 있는 또 다른 의미의 세계를 거느리고 있다고 한 말이 상기된다.
머루 익는 산길
꿈도
탐스럽다
되잡히는 그 정취
그 사람에 취하고 싶다
그러이 지나는 정이
하얀 서리 끼더라.
사랑이 머루알 익듯
그러이 익는 날
스미듯
놀라워서
끝내 시들한 세월
눈 감고
회억에 찬 날
불러대고 싶구나.
- 신길수, 「꿈 지난 자리에서」 전문
지난 과거는 아름답게 느껴지기 마련인가. 달콤한 머루알처럼 꿈도 탐스러웠던 세월에 사랑을 나누고 정을 쌓았던 일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신 시인은 아름다웠던 지난날의 회상을 통하여 영혼이 성숙된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꿰뚫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무시로 삶 속에서 그리움과 조우하게 되지만, 이 그리움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 깔린 원초적이고 본성적인 정서이기에 누구라도 이 그리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신 시인은 이렇게 그리움과 남모르는 연애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눈 감고/ 회억에 찬 날/ 불러대고 싶구나.” 시인은 체험과 상상력, 그리고 사유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 작품을 쓰게 한다. 독자들의 가슴 한 켠에 간직된 그리움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이끌어내고 있다.
살포시 지핀 것이
꽃물보다 아픈 것이
딱 한번 애원하고
매달린 손끝인데
아득히 멀어간 인연
명치끝이 붉어라.
- 양명천, 「상사화」 전문
우레 소리 내려친 날 눈을 번쩍 떴습니다
천길 땅 속 묻힌 정을 물고 오른 한나절
서촉(西蜀)간 님의 혼불을
밝혀 들고 섰습니다.
웃음 물고 비벼대다 찌든 시름 벗은 자리
어쩌다 보고프면 갸웃갸웃 머리 돌려
꽃술에 벌 나비 불러 놓고
님이신가 봅니다.
손잡고 걷던 길은 바람 속에 간 데 없고
아롱진 눈망울에 일어서는 귀촉도(歸蜀道)
여읜 님 그리고 그리다
뻐개든 벌건 가슴.
- 최춘보, 「상사화」 전문
두 시인이 같은 제목의 작품을 동시에 발표하고 있어, 비교하면서 감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상사화는 여러해살이풀로서 산과 들에서 나는데 여름에 연붉은 자줏빛의 깔때기 모양으로 된 여섯잎꽃이 피는데, 꽃이 필 때에는 잎은 이미 말라서 꽃과 잎이 서로 보지 못한다고 하여 ‘상사화’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애틋한 사랑의 사연이다.
이 “상사화”의 간절한 사랑을 양 시인은 한 문장의 영탄법으로, 최 시인은 구어체 문장으로 읊어 내고 있다. 양 시인은 “아득히/ 멀어간 인연/ 명치끝이 붉어라.”라고 했고, 최 시인은 “여읜 님 그리고 그리다/ 뻐개든 벌건 가슴.”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두 시인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듯 다분히 공감을 주고 있다.
왕비의 이빨조차 썩지 않는 불멸의 땅
옛 백제의 천안시 서북구 헹겡이벌
고려국 마지막 유민(流民) 멈춰선 듯 돌비 하나
(중략) 둘째 수, 셋째 수
한때는 임금님도 머물다간 큰 절집
정권은 부패했고 나라는 도탄이다
어쩌다 백성들 원성 여기까지 사무쳤나
대웅전도 아미타불도 다 벗어던졌다
없는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버림받은 자
홀로 서 들판에 우뚝, 그들 보러 나왔구나
살육과 화염에도 타지 않는 민중의 혼
위례에서 곰나루 흙비 오는 길을 따라
오늘도 망이, 망소이 그 함성을 듣겠네
- 유재영, 「봉선홍경사갈비(奉先弘慶寺碣碑)」 부분
시조는 얼, 말, 글이 빚은 예술이 아니던가. 여섯 수 연시조로 3장의 정형을 지키고 있는 작품인데 편의상 둘째 수와 셋째 수를 생략한 것이다. 이 작품의 각주(脚註)를 보면, “망이, 망소이란, 고려무인집권 시대에 굶주린 백성들을 모아 망이, 망소이가 일으켰던 민란의 하나. 그들에 의해 봉선홍경사갈비가 있던 홍경사가 불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한 시대 역사의 증인으로 서있던 봉선홍경사갈비는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현실에 대한 참여라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참여이며 정의에 대한 진단이 아니겠는가. 감정의 절제로 정서적 질서화를 꾀하고 있으며,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시인의 의식이 발현되고 있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소박성과 시상의 진솔한 표현이 유 시인의 개성임과 동시에 시적 성실성으로 보이며, 연시조 여섯 수까지 이끌어간 시적 호흡과 그 기량이 부럽기만 하다. 좋은 시조란 순수한 미의식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리듬과 깊은 사상성, 그리고 참신한 이미지가 감동적으로 공감을 주는 시조라고 할 때 이에 이의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들레 홀씨 되어
바람타고 날아가서
지구촌 곳곳마다
튼실하게 뿌리내려
김매는
마음결 따라
화사하게 피어라.
- 이정자, 「시조야, 시조야」 전문
이 시인은 시조의 정격을 지켜가는 시조 파수꾼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는 시조의 세계화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제목에서도 반복법 돈호법으로 강조의 효과를 거두며 쉽게 읽히어 화자의 간절한 시조사랑의 정신을 짐작할 수가 있다. 시조란 이름을 달고 파격의 작품이 판을 치는 요즈음 이와 같이 시조를 아끼고 사랑하며 시조 인구 저변확대에 전력을 투구하는 시조시인이 건재하는 한 우리 시조의 앞날은 창창하다는 확신이 든다. “김매는/ 마음결 따라/ 화사하게 피어라.” 이 틀 속에 깃든 목소리가 높고도 큰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시조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시조의 기본형 정립이 선행되어야 하고, 다음으로 시조인구의 저변 확대는 물론 범정부 차원의 번역, 출간, 홍보 등 부대사업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찬란한 밤하늘의
수를 놓는 불꽃놀이
백억 광년 그 너머로
던져 버린 화두건만
한 찰나
교신하는 메시지
너와나 한 점 빛이여.
- 이지연, 「별똥별」 전문
일찍이 성춘복 시인께서는 “이지연 스님의 화두는 분명히 마음의 그림으로써 은일(隱逸)의 세계에 닿아있다.”라고 말한바가 있다. 그리고 또 “대상과의 합일(合一)의 시도에서 명징(明澄)이나 표백의 정신적 작업으로 시의 순수성을 건져 올리고 있다.”고도 했다. 한편 이 시인은 십여 년 전 제4시집 머리글에서 ‘시’는 곧 ‘선(禪)’으로 통하는 그윽한 길이라고 믿고 햇살과 바람과 물소리가 가득한 절집 뜰에서 끊임없이 시상에 잠기면서 자연인으로 또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 걸로 기억하고 있다. 별똥별! “한 찰나/ 교신하는 메시지/ 너와나 한 점 빛이여.” 속세의 일들과 인연을 끊은 수행자의 맑은 영혼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시상은 불교의 선(禪)적, 초월적 경지가 아니겠는가. 참선을 통하여 얻어지는 청정무구한 체험이라고 판단된다. 대상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넓이가 시상의 깊이와 넓이를 결정한다고 볼 때 속인인 우리로서는 쉬이 범접하기 어려운 차원 높은 정신세계인 것이다.
우적(雨滴)으로 실눈을 뜬
아득한 고향 두메
햇살이 깃을 사려
봄 내내 품한 둥지
하나 둘 부화하는 꽃을
바람결이 다독이네.
- 장지성, 「사과 꽃」 전문
간결하면서도 함축성 있는 단시조다. 좋은 시조는 고민을 풀어 주고 아픔도 치유해 준다고 했던가. 예리한 직관이 간명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솜씨가 있고, 우리말의 음악성과 회화성을 잘 살려내고 있다. 작품 속 분위기와 정서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햇살이 깃을 사려/ 봄 내내 품한 둥지” 이처럼 한 어절, 한 구가 다 곱고도 부드러운 시어로 짜여있다. 또 취사된 시어들이며 어울린 이미지들이 테마를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그야말로 아득한 고향 두메에 하나 둘 부화하는 사과 꽃을 포근한 바람결이 다독이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의 형상화가 눈에 선하다. 섬세한 아름다움이 감각적으로 피어나고 있는 형국이다.
신(神)불이
지핀 불길에
타고 있는 저 바다
해 뜨면
굵은 소금
날 흐리면 가는 소금
간이 밴
한 사발 설법
가 삭으면
천
일
염
- 조경순, 「경(經)」 전문
“경(經)”을 이렇게도 표현해 낼 수 있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그 이미지화가 예사롭지 않다. 시조의 행과 연은 그 자체가 시적 효과를 위한 미적 장치인데 시행의 표기도 이채롭다. “경(經)”은 “경(經)”이기에 한낱 “경(經)”으로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조 시인은 “경(經)”에서의 정서적 반응을 형상화함에 있어 적절하게 대처했다고 본다. 시인은 자기 주위의 사물을 일상적인 눈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다. 소설은 대상 즉 세계를 인간의 행위에서 파악하지만, 시는 존재론적으로 파악한다고 했다. 그러기에 시인은 사물의 존재론적 의미를 밝히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 시인은 이 작품에서 경험적 사실묘사의 수준을 벗어나 독립된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이렇게 시인의 시선에 포착된 사물은 생명을 얻게 되고, 그 존재 의미가 더욱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또 시조의 가장 중요한 장치인 메타포를 실감하게 하는 작품으로 절묘한 착상 또한 현대시조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스윽슥
칼을 간다
지긋이 눈을 감고
캄캄히
칼이 울어
섬뜩, 숨 질리다
뚝 뚝 뚝
피 듣는 시구(詩句)
귀척도여 우는가.
- 허 일, 「시혼(詩魂)」 전문
“ 뚝 뚝 뚝/ 피 듣는 시구(詩句)/ 귀척도여 우는가.” 이 얼마나 간절한 시혼(詩魂)인가. 정제와 절제, 응축의 매력이 있다. 스윽슥 칼을 갈고, 칼이 울어 섬뜩, 숨 질리는 경지! 동원된 표현과 시어들이 투철한 시정신을 담고 있으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음도 느낄 수 있다. 허 시인이 표현하는 이미지는 시인의 내면의 혼의 상징이다. 아울러 깊고도 조용한 응시의 자세는 허 시인의 독특한 시조 보법이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동인순례>란의 ‘한국시조문학진흥회’ 편에서는 지면관계상 한편만을 골라 보았다.
바람아 뭐가 급해 이리 급히 넘자느냐
선자령 이곳에선 잠시 쉼이 어떠하리
강릉골 푸르른 바다 쪽빛 하늘 창연하다.
송천(松川)길 오른 걸음 오십천(五十川) 가자는데
아흔 아홉 대관령 길 쉬엄쉬엄 가자꾸나
등성이 상고대 눈꽃 저리도 눈부시다.
첩첩한 산자락에 소복이 쌓인 눈은
희어서 서러운 우리네 옷차림새
무명의 소맷자락에 눈물 자죽 배였구나.
나그네 발길 잡는 백두대간 영마루 위
구름도 굽어보는 한 맺힌 역사 위에
백두는 예서 몇 리며 금강은 어느 묀가.
- 심응문, 「선자령(仙子嶺)」 전문
심 시인의 작품을 읽다보면 “글은 곧 그 사람이다”란 말이 공감이 된다. 평소의 밝은 인품이 짐작되는 것이다.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는 시인은 우리 민족의 한을 노래하며, 회화성과 음악성을 절묘하게 배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조는 보고 느끼며 깨달은 생각을 몸으로 쓴 작품인 것이다. 여기서 심 시인은 내면의식을 객관적 상관물인 자연을 통해 반영하고 또 삶을 성찰하며 깨우침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과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조화로운 시상이다. 구어체 문장에다 자연을 소재로 실음으로서 독자들과 친화감을 이끌어 내며, 특히 고유의 정한과 어우러져 감동을 줄뿐만 아니라 일정한 품격을 유지해 주고 있다고 본다.
이상으로 지난 봄호에서 대강 시조의 매력을 찾아보았다. 우리 시조는 전통시요 겨레시이며, 한국시이기에 마땅히 모든 국민들이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어야만 한다. 시조는 이제 문학의 한 장르로서 그 위상을 제대로 정립해가고 있다. 시조의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꾀하며, 현대의 참신하고도 다양한 제재 채택으로 주제를 심화시켜야 한다. 시조가 민족문학의 고유한 시형식으로 이제 ‘읽는 시조’에서 ‘생각하는 시조’로 변모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번에도 지면관계상 좋은 작품들을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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