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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4-09 16:35
꽃샘이 가시고 나면
 글쓴이 : 이규임
조회 : 3,738  
꽃샘이 가시고 나면

이규임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내린다. 보일 듯 말 듯한 가늘고 가는 세우다. 스란치맛자락을 조심조심 끄는 여인의 발걸음 같다. 이런 비를 봄비라고 하는 것인가.며칠 전까지도 봄은 먼 곳에 있는 줄 알았더니 목련꽃 봉오리가 솜털 사이로 실눈을 뜨고 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허둥대다가 라디오에서 전하는 꽃소식을 들으니, 제주도의 봄 풍경이 새삼 그리워 당장 달려가고 싶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어 책상 앞에 앉아 본다. 이런 날은 방안이 어둑한 때문인지 마음이 스산하다.겨우내 지루함을 달래느라,집안으로 봄을 끌어 들여 보고자 했다. 문갑 위에 수선화 몇 송이가 유리컵에서 곱게 피어 주었다. 침침한 방안에 암향이 그윽하다.

대청마루 아늑한 곳에 자리를 잡아,콩나물 시루를 앉혀 놓고 애기에 젖을 물리듯 하루에도 몇 번씩 조심스레 물을 준다. 그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조용한 집안에서 들으니 계곡에 잔설이 녹아 내리는 소리 갔다.그뿐이랴, 제 철보다 앞질러 꽃을 보고 싶은 욕심에 군자란 철쭉 동백등의 화분을 하이얀 미닫이 앞에 놓아두고 조심스레 가꾸었더니 일찍 꽃이 피었다.

창 밖에는 백설이 분분한데 우리 집 안방에는 봄이 가득하다. 이런 꽃들을 보면 나 혼자 보기가 아쉬워 친구들을 불러 자랑하고 싶다. 그리고 틈만 나면 꽃 곁으로 다가선다. 아마 내 손때 묻어 피운 꽃이라 애착이 가는 모양이다. 남자 같으면 이런 감흥에 술 한잔쯤 할 것이라 생각하다가 숙종 때 시인 이정보 어른의 시조가 떠올랐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네.”

요 며칠 동안 포근하던 날씨가 바람이 일더니 쌀쌀하다.겨우내 입었던 외투를 벗어 놓았더니 좀 성급한 듯하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선득선득 품속으로 파고든다. 꽃샘추위다. 이런 추위를 설 늙으니 얼어죽는다 하더니 과연 을씨년스럽고 춥다.

꽃샘이란 경첩이 지난 후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다가 다시 추어지는 추위를 말한다. 짓궂은 누군가의 말인 듯하나 오는 봄을 시새움한 동장군이 심술을 부려 다시 겨울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잠시 추위가 계속된다고 하니 재미있는 설화다.
“바람이 눈을 모라 산창을 부딪히니 찬 기운 새어들어 잠든 매화를 침노한다. 아모리 얼
리려 한들 봄뜻이야 어찌 알겠는가.” 가객 안민영의 매화사에 있듯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인간이 어찌 알겠는가.

수십 년 전 지나간 옛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내가 방학 때 조모님 댁에 내려가면 늘 바느질하는 침모가 있었다. 그 아줌마는 아미를 다듬어 반반한 얼굴에 우수가 깃든 매력적인 삼십대 여인이었다. 그의 남편은 방랑벽이 있어 집을 나가면 몇 년에 한 번 돌아오기도 어려운 터라 자식 하나 테리고 생계 막연해서 우리 집에서 침선을 하는 것이라 했다. 상냥한 말씨에 우스갯소리도 곧잘 하고 옛이야기도 구수하게 들려주어 모두의 심심파적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훈훈한 방안에 있으면서도 까칠한 얼굴에 밤낯 으스스하다며 화롯불에 손을 늘 쪼이곤 했다.어느 날 조모님은 화롯불 위에 눌러 놓았던 불 돌을 두툼한 헌 겁에 싸서 아줌마에게 주며 허리춤에 넣어라 했다. 누군가가 이유를 물으니 조모님 하는 말이 “꽃샘 추위에 설 늙은이 얼어죽는다 하지만 꽃샘 추위에 생과부 가슴앓이도 생긴다" 고 한다 그때 나는 그뜻을 헤아리지 못했으나 나이를 먹고보니 젊은 생과부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조증(躁症) 환자는 성급하고 서두르며 초조한 증세를 가져 조울증이라고도 한다.왈, 봄을 조증환자라고까지 비유함은 꽃이 필 무렵 기후가 매우 고르지 못하고, 비 혹은 눈바람까지 쌀쌀해서 신경질적이라고 하는 말인 듯하다. 사람보고도 봄을 탄다고 말하며 봄을 타서 밥을 안 먹는다는 둥, 이상한 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성급히 봄을 가꾸려던 나도 조증환자가 아니었나 반성도 해본다.

세월은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했듯, 오는 봄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아무리 동장군이 심술을 부려도 한 서린 여인이 가슴앓이에 야위어가도 봄을 탄생시키는 자연의 몸부림 속에 꽃샘 추위가 가시고 나면, 봄은 왕자처럼 다가오리라.그리하여 이 금수강에 백화만발하여 꽃 축재가 벌어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성급한 나를 위해 방안에서 이른 봄을 보여 주었던 화분의 꽃들. 순리대로 돌아가야 할 자연의 섭리도 외면한 채,비도 바람도 못 맞아 후줄근하게 지처버린 꽃분들이 가엾다. 이제라도 자연의 은총 속에 비바람도 스치고 태양도 쏘이고 거름도 듬뿍이 주어야 하겠다. 그리하여 다가올 내년 봄을 위해 자연속에서 가꾸어 주어야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이미 꽃이 저버린 화분들을 하나, 둘 밖으로 내놓는다.

(1992.2. KBS 시와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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