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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9-15 13:11
 조회 : 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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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표현과 주제의식의 심화
김 석 철 (전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시조는 이 나라 민족시의 종가요 종손이라고 했다. 따라서 시조는 모든 시가의 모체요, 근원인 것이다. 시조는 우리 민족문학의 고유한 형식으로 현대문학의 엄연한 한 장르가 되었으며, 과거의 “읽는 시조”와는 달리 “생각하는 시조”로 변모한 것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시는 시조가 아니지만 시조는 시(詩)이기에 시의 본질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시와 시조는 그 틀이 확연히 다른 것으로, 시조가 시보다 더 운율적이라는 것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율격에 어긋나는 시조는 시조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이번 호의 계간평은 필자가 강원도의 원주 <토지문화관>의 혜택을 입어 한달 간 집필실에 들어와 지내면서 쓰게 되니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계간 『시조문학』여름호(통권 179호)에도 150여 편의 창작 시조가 수록되어 있는데, 편의상 이미 ‘해설’이나 ‘평설’이 곁들여진 부분과, 기타의 꼭지를 제외하고, 책의 편집순서에 따라 <소시집>, <신작특집>, <단시조단>, <여름시조단>, <동인순례> 란 등에 발표된 시조만을 가려 뽑아 거론하되, 가능한 한 최근에 거론한 바가 있는 시인의 작품은 배제하기로 하니 양해를 바란다. 따라서 이미 본지에서도「시조의 형식과 내용 문제」, 「시조의 다양한 무늬와 깊이」, 「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등은 언급한 바가 있으므로 이번 호에는 「참신한 표현과 주제의식의 심화」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그러면 먼저 <소시집>의 작품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안으로 뒤척인다 뿌리 반쯤 뽑힌 생명
주름살에 가려진 반쯤만 남은 웃음
길 잃은 뜨거운 기도 한해살이 목을 뺀다
숙명의 긴 사슬에 온몸이 묶이어도
가까운 장송곡 가슴으로 밀어낸다
언덕에 울음으로 타는 희미한 촛불 하나.
- 신강우, 「일년초」 전문
신강우 시인의 연시조 10편중에서 한 편을 골라 보았다. 이 작품은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함께 깊은 사유와 통찰이 있었음을 인지할 수가 있다. ‘일년초’의 숙명을 노래한 작품으로 첫수에선 ‘뜨거운 기도 한해살이 목을 뺀다’라고 하였고, 둘째 수에선 ‘희미한 촛불 하나‘로 환치하여 남은 삶에도 최선을 다하는 한해살이풀의 의지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아울러 또 이 작품에 함유된 사상은 유한한 생명체의 무상함을 암시하기도 한다.
신 시인은 시작메모에서 시어에 대한 면이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어떤 이는 ‘시는 언어의 그림이다’라고 했고, 어떤 이는 ‘시는 언어로 짓는 영혼의 집’이라고 말한 바도 있지만, 그 만큼 시에 있어서의 언어는 중요하다는 말이다. 표현의 참신성을 살리는데 핵심을 이루는 게 시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지시적 기능과 정서적 기능의 두 측면이 있지만, 시조의 언어는 정서적인 언어로서 산문과는 달리 비유와 상징, 함축, 암시 등을 함유하는 감수성의 언어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항상 좋은 시어를 만들기 위해 언어를 매만지고 다듬어서 새로운 시어로 빚어내는 언어조탁의 공정을 거치기도 한다. 시조가 언어예술이기에 순도 높은 시어의 사용은 필수적이다. 더구나 문맥의 컨텍스트에 꼭 맞는 시어를 사용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은 항상 참신한 시어, 아름다운 시어, 개성적인 시어 발굴에 부지런을 떨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신작특집>란의 작품을 살펴보도록 한다.
1
인생이란 한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는데
여러 번 태어나고 여러 번 죽다보니
십구 줄 곡예길 위에 삶의 지혜 깊어간다.
2.
몽고를 무찔렀다 왜구도 무찔렀다
모두가 선봉장 되려 아군끼리 돌팔매질
핵탄두 눈앞에 두고 펼쳐지는 자충수.
3
일본 사람들은 이기는 것이 예의이고
영국 유단자들은 지는 것도 예의인데
한국의 젊은 기사들 다수확이 예의라나.
4.
혓바닥은 한계 없이 진실도 거짓으로
발걸음도 정도없이 암행과 미행으로
수담(手談)은 일수불퇴의 올곧은 인생행로.
5.
끝없는 세상길에 요람을 찾아본다
안개에 가리워져 갈 길은 묘연한데
훈수만 따르다보니 동강나버린 한반도.
- 문태길, 「바둑판 위에서 그려 보는 한반도」 전문
문태길 시인의 다섯 수 연작시조다. 다섯 수까지 시상을 이끌어가는 힘이 넘쳐 있다. 현실 감각을 통해 쓴 작품으로 사소한 일상사를 재치 있게 잘 포착하였다고 본다. 바둑판으로 우리의 현실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핵탄두 앞에서도 좌충우돌하고 있는 게 한반도의 서글픈 현실이다. 바둑판은 생사가 겹쳐지는 전쟁의 세계다. 바둑을 두다가 보면 좌충우돌도 있고, 자충수를 범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문 시인의 시작노트에는 “대결이 반복되는 흑백판도 위에서 참된 길을 찾아본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대적 교훈을 대변해 주는 시조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시인들은 그 시대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보편적 정서 반응을 통합하기도 하고, 또 조정해 나가기도 해야 한다. 그 시대, 그 사회에 참여하여 잘잘못을 고민하고 노래하는 건 시인의 당연한 책임이요 의무다.
돌아보면 볕이 들던 살뜰한 쪽 있습니다
한밤중 또렷하게 빛나는 때 있습니다
무섭게 튀어 오르던 진흙 강물 어제 같아도
푸르게 위로만 곧은 평면의 하늘 한 폭
어딘가 접혀 있을 마음 계단 오릅니다
짱짱한 볕에 마르며 마냥 누워봅니다.
- 엄미경, 「볕」 전문
엄미경 시인의 작품으로 현실에 대한 깊은 응시 속에 시상을 이끌어내는 기량이 돋보이는 시조다. 엄 시인은 순수 직관을 통해 기존의 생각과 개념의 틀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어 그 만의 개성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사실 세상은 어지럽고 한계를 넘은 현실이지만 순리만은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시련이 지나면 안락이 오고 슬픔이 지나면 기쁨이 오듯이, 흐린 날이 지나면 볕들 날도 오기 마련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기쁨을 느끼는 한 ‘때’는 있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소나기가 퍼붓는다 해도 어디 한 ‘쪽’은 볕이 들기도 할 것이다. 이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긍정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전체적으로 표현이 구어체이면서도 생략과 비약을 아우른 솜씨에서 응축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시조에서 이렇게 각 연과 장의 이미지의 거리가 멀 때 그 시가 누리는 세계는 넓기 마련이다.
채석강은 큰 바위다
즈믄 해의 묵언이다
간단없이 파도가 와서
제 손끝을 헐고 가도
그렇다, 다 안다는 듯
무심으로 앉아 있다.
지금은 바다 바라
한 바위로 자리해도
한 때는 커다란 가람
그 물결도 붉었거니
다스려 정정(正定)한 불심
층층으로 책을 쌓다.
오늘도 바람 분다
사바가 출렁인다
욕망이 바다위에
물마루로 솟구쳐도
해탈한 등신불처럼
가부좌의 길을 간다.
- 유휘상, 「채석강(採石江」 전문
유휘상 시인의 연시조다. 아는 바와 같이 채석강은 ‘변산8경’ 중의 하나로 기이한 바위와 함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강이 아니고 바닷가의 절벽으로 마치 수천 권의 책을 쌓아 올린 것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 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을 붙잡는 곳이기도 하다. 시적 발상이 진지하고 동원된 어휘들이 선(禪)적 이미지를 함유하고 있다고 본다. 이 작품은 단순한 경물 묘사에 그치지 않고 쉬이 범접 못할 정신의 위의 거느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 수의 시조가 기-서 결의 구성으로 점층적인 시상을 전개하여 주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사실 무량한 존재의 조물주 앞에서 우리 인간은 무력하기만 하다. 그러나 시인이 있어 우리의 삶은 살만한 세상인 것이다. 이 작품은 자연물에 불심을 불어넣어 독자로 하여금 마냥 정일(靜逸)과 평화로움에 젖어들게 하는 묘미가 있다. 하찮은 물상일지라도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새롭게 탄생시킴으로써 더 깊고 더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게 시인의 몫이다. 시는 마음의 거울을 닦는 방편이라고 했던가.
이 땅에 뿌리 내려
온 들녘을 확 덮치는
마디마디 푸른 핏줄
우리네 희망 같은
이 봄날
흙을 뚫고서
그렇게 다시 돋으리.
- 홍오선, 「쑥」 전문
홍오선 시인의 단시조다. 홍 시인의 인생관이 가미된 작품으로 쉽게 읽히면서도 그 의미가 깊다. 쑥은 우리의 건국신화에도 그 이름이 나오지만 생명력이 강하며 약초로도 널리 쓰인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 쑥은 번식력이 강하여 척박한 땅 어디라도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그 맛은 쓰지만 약이 되는 다년생 풀이다. 홍 시인은 요즘 이 쑥처럼 질긴 근성으로 시조의 근본을 치열함 속에서 찾으려는 것 같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체 하지만 실은 시치미를 뚝 떼고 속 깊은 뜻은 숨겨둔 채 비유와 상징으로 감싸고 있는 시조다. 어쩌면 작자 자신이 결연한 자세로 재기의 결연한 의지를 다짐하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다음은 <단시조단>에서 세 분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버들잎
젖은 머리칼 바람에 구부려 털고
너울너울 큰 물방울 울렁이는
연잎 우산
넘치는 둠벙을 가르며 미끄러지는 때까우.
- 김일연, 「소낙비 막 그치고」
김일연 시인의 단시조다. 참신한 착상을 보이고 있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이미지가 선명하다. 창작은 곧 실험이기에 시정신의 확장은 물론 표현기법의 다양화를 모색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작품에선 일반적 형식적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움을 발견한다. 시행을 다양한 방식으로 바꾸고 또 결합하면서 시조의 형식적 특성을 다양하게 변모시키고 있다. 김 시인에 있어 행과 연의 배치는 또 다른 여백의 깊이를 창출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본다. 시상을 ‘버들잎-연잎 우산-때까우’로 전개하면서 이미지의 형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소낙비, 둠벙, 때까우’ 등의 방언 사용에 있어서도 개성이 엿보인다. 특히 ‘둠벙’은 경상도 방언이고 ‘때까우’는 충청도 방언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말을 같은 행에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고 있으며, 특히 종장에선 그 댓구적 표현과 함께 정적인 배경에서 갑자기 넘치는 둠벙을 가르는 때까우의 모습이 이 시조의 제목 설정에도 조금은 일조를 했다고 본다.
먼 바람 감긴 가지 아리도록 시린 날들
잔 별빛 내린 자리 어룽어룽 무늬 지면
아득히 배냇짓하듯 어린 꿈들 피어난다.
- 김재황, 「춘매」 전문
김재황 시인의 깔끔한 단시조다. 노련한 언어미감을 주는 작품으로 긴 겨울을 견디고 봄날에 새로 돋는 새순만큼이나 신선하고 감동적이다. 순도 높은 서정이 파릇하고 투명한 기운으로 막 퍼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꾸준한 자기 견인과 자기 심화를 이룬 적공 노련과가 아니겠는가. ‘아리도록’, ‘어룽어룽’ , '배냇짓‘과 같은 순수한 우리말 노고운 시어를 알맞게 부려서 시적효과를 높이고 있다. 맑고 투명한 미적 공간 속에 춘매의 이미지가 꽃처럼 피어나고 있음을 본다.
경제가 휘청거려 너나없이 힘들다는,
그 경제가 슬그머니 주머니 속 숨어 산다
헐렁한 공간에 잡힌 졸아 든 간이 하나.
- 이승은, 「콩알」 전문
시조의 묘수는 누구도 창조해 낸 적이 없는 수사를 창조해 내는 데 있다. 작품을 읽고 난 후 강렬하고 절실한 그 무엇이 느껴졌다면 그 시조는 좋은 시조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절제된 언어로 상상력을 숨겨둠으로써 약간은 독자들을 낯설게 한다. 상징과 언어의 축약 앞에 조금은 당황해지기도 한다. 경제가 슬그머니 주머니 속에 숨어 살 듯, 행간엔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평범함의 비범성을 성공시키고 있는 한 보기가 될 것이다. 이 시인은 하찮은 일상의 사물에서 함축적 의미를 이끌어내고 있어 사물을 대하는 이 시인의 정신적 깊이를 가늠해 보게 한다. 시인이 시적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개성의 차별성이 나타남을 느낄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써온 유사한 소재의 시조들과 차별화된 어떤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조에서도 보듯 종장의 결구는 대단히 중요하다. 종장의 구성은 대개 ‘소음보-대음보-평음보-소음보’로 짜여진다. 이처럼 반전과 절정, 결말의 총체적 융합으로 핵심을 이루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여름시조단>에서도 세 분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서산이 매 가까우니 일손 또한 너그럽다
주머니를 마저 털면 나눔 또한 더 가볍다
번민도 잊고 떠나는
그림 수첩 한 장이다.
바람 떠든 강변에 나목의 책을 덮다
생애 지도 붉게 긋는 벌거벗은 회포 몇
그대가 찾아온 해후
들꽃 피어 누운 날.
- 노창수, 「퇴임 생각」 전문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앞둔 시인의 마음은 한결 가볍고 너그럽기만 하다. 추억만을 간직하고 연구도 가르침도 덮고, 또 제2의 삶을 시작하려는 꿈을 상상해 본다. 차분하게 안정된 시상으로 주제의 심화를 이루고 있다. 내면을 다지는 성찰과 사유가 녹아 있다. 어쩌면 시인의 길은 자기 구원에 이르고자 나선 나그네 길일지도 모른다. 둘째 수에서는 마지막 종장을 명사형으로 종결하여 강한 의미를 느끼게 하는데 이 또한 효율적인 표현수법이 아니겠는가.
몸들이 서롤 안고 굽이굽이 누워 있다
이날에 오기까지 몸부림은 얼마더냐
무던히 뒤척대고야 일견 숨을 고른다.
때로는 하늘 높이 빙설을 이고 서서
쌘 구름도 산안개도 발치 아래 즈르밟고
아서라 포효를 하며 한껏 몸을 젖힌다.
- 산 강, 「능선(稜線)」
시조에서 삶의 진지한 의식을 언어로 환치하는 묘미가 있다. 시는 직관적 상상력에 의한 현실의 재창조라고 했다. 첫째 수에선 무던히도 몸부림치며 어렵게 살아왔던 질곡의 삶을, 둘째 수에선 갖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의연하게 대처해 나가는 군센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주제의 심화를 위한 참신한 표현이 군데군데 번뜩이고 있으며 시어의 부림에도 고심을 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특히 둘째 수 중장 끝의 ‘즈르밟고’란 시어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서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시의 구절에 익숙하다 보니 ‘위에서 내리 눌러 밟다’는 의미로 ‘즈려밟다’가 바른 표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으로 ‘지르밟다’가 바른말이라고 한다. ‘즈려밟다’는 ‘지르밟다’의 평안북도 방언이라는 견해가 있으니 말이다. 산강 시인은 시어 선택에 있어서도 그렇게 세심하게 배려를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야무지게 용을 쓰다
새 세상을 열겠구나
사흘만에 깨어진 꿈
정도령 낙이 되어
차령산 산마루 밟고
바람으로 달리데.
- 장 청, 「정안 김옥균 생가터에」 전문
김옥균은 조선의 문신이며 구한말의 정치혁명가였다. 급진 개화파로서 1884년엔 갑신정변을 주도했으나 3일 만에 실패하였는데, 그의 생가터가 충남 정안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가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된 이후 줄곧 개혁과 개화를 위해 온 힘을 다 바쳤으나 그만한 대우를 못 받고 떠난 인물이다. 우리나라 개화사상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건 분명하나 당시 권력의 실세들에게 지지를 못 받아 억울하게 희생되고 말았으니, 이제는 한낱 바람으로 만나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시인은 이렇게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의 증인을 떠올리게도 하고 또 만나 보게도 한다.
다음은 <동인순례>편으로 ‘영남시조문학회’의 작품 중에서 지면관계상 세 편만을 골라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 때는 구름으로 휘청휘청 산을 넘고
더러는 바람으로 열 두 강을 누빈 목숨
마침내 빈 겨울 바다 부서지는 물보라여.
- 김남환, 「겨울 노래」 전문
쉽게 읽히지만 주제의 심화를 기하고 있는 탄탄한 작품이다. 가락과 울림이 있는 서정적 시조로서 삶에 대한 통찰이랄까 지나온 삶의 질곡을 건너 마침내 이른 정신적 세계가 아니겠는가. 화려하거나 운치가 넘치는 건 아니지만 더없이 맑고 신선한 이미지로 인생론적 사유가 시적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유를 잘 정제하여 이미지를 선명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각 장의 행간에서도 여백의 미를 감지하게 하는 즐거움이 있다. 시조는 단시조라야 이렇게 제 멋과 맛이 난다.
1. 그때는
낙강(洛江)은 달을 품어
은하수는 높았고
아린 정 흰 옷자락
기워 이은 옷소매에
빈 술잔
반 넋두리로
고향 하늘 지켰거니.
2. 오늘은
살구꽃 피던 마을
취객들은 가고 없고
강물은 노을에 젖어
쇠북 소리 은은한데
하늘 빛
흐르던 수평
눈물 고인 향수의 늪.
3. 내일은
칠백 리 굽이굽이
산도 들도 둘러놓고
한 세월 엮어온 사연
달빛 풀어 노래하며,
푸른 솔
흰 구름 아래
학을 띄워 춤을 출까.
- 김양수, 「낙강(洛江)에 달을 밝혀」 전문
세 수 연작으로 비교적 호흡이 긴 작품이지만 시상이 ‘과거-현재-미래’의 시제에 따라 물 흐르듯 매끄럽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수에서는 과거의 아린 정을 읊었고, 둘째 수에서는 현재의 각박하고 어려운 현실을 읊었으며, 셋째 수에서는 꽃피울 미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이렇듯 시조는 통일성, 다의성, 심미성을 지니고 있어 감동을 주는 예술작품인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낙강(洛江)’은 ‘영남시조시인협회’ 동인회 명칭이지만 여기선 흐르는 강의 이미지로 시적 승화를 이루고 있다. 강물은 흐르는 세월을 상징하고 있으니 이 작품 속엔 낙강(洛江) 아닌 ‘낙강(洛江)’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산 바람
강 바람이
서로 얼린 수성호반
한 여름
한 두 번은
할일 없이 날 불러
겨울, 봄
못다 한 얘기
그늘 아래 늘어 놓고.
찌든 마음
맺힌 땀을
물보라로 씻어 볼까.
빛 바랜
돛폭 달고
나룻가에 나 앉으니
물 무늬
일렁이는 호심
나를 비춰 나무란다.
- 정재익, 「수성 호반에서」 전문
시조의 정형을 잘 지키고 운율과 호흡이 안정을 유지하여 참신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또 사유를 잘 정제하고 궁굴리어 다양한 무늬와 깊이를 느끼게 함으로써 시조의 높은 격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지가 선명하게 형상화되고 있으며. 순수 서정의 지향이 엿보이는 이 시조에선 답답한 일상을 초월한 높이에서 진솔한 설득력과 만나게 된다. 두 수의 연시조인데 배행을 각 장마다 3행씩, 두 수가 각각 9행씩으로 배치하여 시각적인 표기효과를 거둠은 물론 각 행마다 그 의미를 보다 강하게 환기시켜 주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상으로 『시조문학』여름호를 중심으로 대략 살펴보았으나, 역시 주마간산 격이 될 수밖에 없음을 시인한다. 시조는 모름지기 쉽게 읽히면서도 깊이가 있는 시조라야 한다. 직관에 의한 상상력으로 현실의 세계를 미적으로 재창조하는 것이 시조의 세계다. 물론 시조는 담금과 발효의 과정을 거쳐야 되는 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시인의 눈은 과학자의 눈이 아니요, 어쩌면 주술적이며 통찰력의 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시인은 한 방울의 눈물이 지구를 적시고도 남게 하는 마력(?)이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시조가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우선 ‘참신한 표현과 주제의식의 심화 문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현안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창작은 작가의 예술적 소양과 재능을 총체적으로 집약시켜 표현하는 정신적 작업이다. 우리가 보다 더 좋은 시조를 창작하기 위해서는 참신한 표현으로 작품의 주제가 미적으로 창출되도록 해야 할 것이며, 호소력의 극대화에도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참신한 표현이라면 미적 시어사용이나 다양한 표현의 기교도 주요하고, 또 낡은 상상과 오래된 비유를 버리고, 눈부신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도 더 없이 주요한 일이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는 특히 주제를 시어나 문맥, 행간 속에 감추어 두는 수법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주제를 심화시키는 방법도 고도의 수련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아무튼 이 짧은 지면에 창작에 대한 문제를 수학의 공식처럼 바로 정답을 말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모름지기 우리는 끊임없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은 사유를 계속해 나가야 할 일이다.
(시조문학, 2011.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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