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자수와 자수율
시조는 우리 고유의 정형시로서 우리 민족의 혼이 담겨진 그릇이다. 시조는 한시나 일본의 정형시처럼 그 자수에 변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45자를 기준으로 몇 자의 가감을 허용한다. 그래서 자수만이 아니라 음보나 구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긴축과 여백의 미학을 말하기도 한다. 시조의 기본형과 그 율격을 보자.
成佛寺(3) 깊은 밤에(4) 그윽한(3) 풍경소리 (4)
주승은(3) 잠이 들고(4) 객이 홀로(4) 듣는구나 (4)
저 손아(3) 마자 잠들어(5) 혼자 울게(4) 하여라 (3)
위의 시조는 노산 이은상의 「성불사의 밤」이다. 기본형에 맞고 율격도 잘 이루어진 작품이다. 위의 기본형을 벗어난 작품을 보자.
아무리(3) 여름이 더워도(6) 싫단 말(3) 다신 않을래(5)→17자
이 밤도(3) 또 밤새워 우는(6) 저 가을(3) 벌레들 소리(5) →17자
더구나(3) 우수수 잎들이 지면(8) 어이 견딜(4) 까본가(3).→18자⇒52자
이호우의 「聽秋(청추)」라는 작품의 첫 수다. 이 작품을 두고 어느 원로시인이 평한 것을 보니 “얼마나 자수나 틀에 구애받지 않고 내재율을 잘 살려 낸 작품인가. 그러면서도 파격이 전혀 없는 천의무봉한 가락인가.”라고 극찬을 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자수나 틀에 구애받지 않고 내재율을 잘 살려낸 작품” 이라 했는데 시조를 쓰면서 ‘자수나 틀에 구애 받지 않으면’ 자유시가 된다. 내재율은 자유시에도 산문시에도 있다. 시조는 3장 6구 안에서 외재율도 음보율도 자수율도 의미율도 함께 할 때 그 정체성이 보존된다. 시조를 쓰면서 할 말을 어찌 다 할 수 있으랴. 시조는 시어의 압축과 절제가 고도로 요구되는 시형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시어를 절제할 수 있다고 본다.
아무리(3) 여름이 더워도(6) 싫단 말(3) 다신 않을 래(5)→17자
이 밤도(3) 밤새워 우는(5) 저 가을(3) 벌레들 소리(5) →16자
우수수(3) 잎들이 지면(5) 어이 견딜(4) 까본가.(3)→15⇒48자
중장에서 ‘또“를 버리고 종장에서 ’더구나‘를 버렸다. 내용이 변하지 않는 한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줄일 것은 줄여야 한다. ’이 밤도’란 ’도‘에 이미 ’또‘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더구나’란 부사를 종장 머리에 두면 그 다음 오는 음보가 3어절 과음보가 되어 사실 맞지 않다. 아니면 ”더구나 잎들이 지면“으로 고쳐도 무방한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가람을 포함하여 대가들에게도 부지기수이다. 절제와 압축, 퇴고를 거듭하여 정격(43－47)으로의 기본형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고시조(평시조)에서도 43-47음절이 80%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다시 고쳐보자
아무리(3) 덥다 해도(4) 싫단 말(3) 않을 꺼야(4)
이 밤도(3) 지새우는(4) 저 가을(3) 벌레 소리(4)
우수수(3) 잎들이 지면(5) 어이 견딜(4) 까본가.(3)→43자
이다.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내용상으로 볼 때 ‘여름’이란 계절을 밝히지 않아도 지난여름 더운 것을 지칭함을 알 수 있다. ‘시’는 더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시어의 절제와 압축과 간결을 요구하는 언어미학이다. 하물며 시조에 있어서야 더욱 그렇다. 위의 시조의 고침은 다만 정격으로 가는 과정을 밝혔을 뿐이다. 어찌 할 말을 다 늘어놓고 시조를 쓰랴. 평시조의 단아함은 고도의 절제와 압축미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행간에서 독자가 읽어내게끔 여백을 남겨 두어야 한다.
시조는 ‘압축의 원리’에 의한 암시성을 그 본질로 한다. 시조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이나 직관, 감정 등이 최대한 집중되어서 압축성과 간결성에 의하여 시어가 갖고 있는 무게와 비중은 보다 커진다. 다음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헤밍웨이가 한 쪽 다리를 들고 서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친구가 목격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헤밍웨이 왈 “앉아서 쓰면 아주 편안하네. 그러나 써 놓은 글을 보면 문장은 길고 지저분하네. 한 쪽 다리로 서서 글을 쓰면 다리가 아프니까 간결하게 쓰게 되네.” 하고 대답했다. 이 구절을 읽고 필자는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을 생각했다. 대학교 1학년 때 그 원서를 읽은 적이 있다. 간결한 문체에 단어만 찾으면 읽을 수 있었다. 그 후 필자는 단문을 즐겨 쓴다. 중문이나 복문은 우리글이라도 헷갈릴 때가 있다. 더구나 철학 서적이나 신학 서적에서 한 문장이 5행~10행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문장은 우리 국어라도 재차 읽어야 그 의미가 닿는다. 영어도 접속어가 들어가고 관계대명사로 몇 개가 이어지면 해석에 시간을 요한다. 그 때부터 필자는 단문을 쓰는 편이다. 그래서 필자의 책은 어렵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헤밍웨이의 글이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아름다운 이유를 알 수 있는 대화이다. 시를 쓰는 시인들이 새겨야 할 전범(典範)이 되는 이야기이다.
다음 시조를 또 보자.
바람 잔 푸른 이내 속을 느닷없이 나울치는 해일이라 불러다오.
저 멀리 뭉게구름 머흐는 날 한 자락 드높은 차일이라 불러다오.
천년도 눈 깜짝할 사이, 우람히 나부끼는 구레나룻이라 불러다오.
－김상옥, 느티나무의 말－
이 작품 역시 시조의 자수개념으로 따지면 그 기본형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이를 음수율은 무시하고 운율을
살린 음보로만 본다면 다음 빗금으로 나눌 수 있다.
바람 잔 /푸른 이내 속을 /느닷없이 나울치는/ 해일이라 불러다오.→25자
저 멀리 /뭉게구름 머흐는 날 /한 자락 드높은 /차일이라 불러다오.→25자
천년도/ 눈 깜짝할 사이,/ 우람히 나부끼는/ 구레나룻이라 불러다오.→26자⇒76자
이렇게 4음보로 보면 시조의 형식에는 맞다 하겠다. 하지만 가만히 따져 보면 각 장 첫째 음보를 제외하고는
실상 두 음보로 나누어지는 음보인 셈이다. 그러니 정격에서 두 배의 음수율을 허용하면서까지 이를 평시조라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제대로의 평시조가 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바람 잔 / 이내 속은 / 나울치는/ 해일이고 →15자
저 멀리 /뭉게구름 /드높은 /차일이네 →14자
천년도/ 눈 깜짝할 사이,/ 나부끼는/ 구레나룻.→17자 ⇒46자
시조는 각 음보 내에서는 수식어와 서술어가 들어갈 여지가 없다. 과감하게 버릴 수 없다면 자유시를 선택해야 한다. 즉 초장의 경우 ‘푸른’ ‘느닷없이’ ‘불러다오’, 중장에서 ‘머흐는 날’ ‘한 자락’ ‘불러다오’, 그리고 종장의 경우 ‘우람히’ ‘~라 불러다오’ 같은 대목이다. 이러한 수식어와 서술어는 시조 형태의 자수개념을 무시한 소치이다. 그렇다고 엇시조도 사설시조도 아니다.
선배 시조시인들이 더구나 인지도가 높다는 시조시인들이 이렇게 썼으니 그 후배들이 어찌 따르지 않으랴. 또 감히 후배가 어찌 선배의 작품을 논할 수 있으랴. 이런 풍토가 오늘 날 변격과 파격의 원인이라 본다. 김상옥의 ｢느티나무의 말｣은 시조가 아니다. 3행으로 곧 3장으로 발표되었다고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는(4) 사람에게만(5) 새벽은(3) 새벽이 된다(5).→17자
봉두난발(4) 상처뿐인(4) 제 가슴(3) 쥐어뜯으며(5)→16자
유백의(3) 찻잔을 만드는(6)→9자
어느 도공의(5) 기도처럼(4)→9자 ⇒51자
길은 아직(4) 헝클린 채로(5) 안개 속에(4) 묻혀 있는데(5)→18자
조간처럼(4) 달려온(3) 소중한(3) 여백 하나(4)→14자
새로운(3) 출발을 권하는(6) →9자
아~ 숨가쁜(4) 초인종이여(5)→9자 ⇒50자
－이우걸, 새벽－
－2008년 제28회 가람시조문학상 작품－
새벽은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새벽이다→16자
봉발(蓬髮)에/ 상처뿐인 /제 가슴 /쥐어뜯으며 →15자
유백의/ 찻잔 만드는 →8자
어느 도공의 /기도처럼.→9자⇒48자/
아직도 /헝클린 채 /안개 속에/ 묻힌 길에서→16자
달려온 /조간처럼 /소중한 /여백하나→14자
새로운 /출발을 권하는→9자
아~숨가쁜/ 초인종! →7자 ⇒45자)
다만 정격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했을 뿐이다. 위의 시는 시어의 함축과 암시로 독자로 하여금 생각의 시간, 감상의 시간을 갖게 한다. 시어의 함축과 암시는 상상의 세계를 담아내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지나친 암시는 난해시를 낳는다. 그래서 일반 독자들은 시가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또 일반 독자들을 멀리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적절한 암시는 독자로 하여금 사고(思考)의 세계를 달리며 상상의 날개를 펼쳐 또 다른 시의 세계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도 한다. 위의 시는 독자나 평자에 따라 몇 개의 시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내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시적자아가 갖는 내부의 문맥을 명쾌하게 이해하기란 어렵다.
시조의 정격을 지키고 고수하고자 애쓰는 시인들도 많은 것으로 안다. 그래서 큰상을 타는 작품만큼은 정격을 지켰으면 한다. 또 그들이 모범이 되어 시조의 정격을 지켜야 한다. 위 시조도 퇴고의 원칙을 따라 퇴고를 하면 얼마든지 단아한 정격으로 갈 수 있다. 각장 첫 음보를 3음절로 고쳐 보았다. 퇴고의 유래를 상기하며 퇴고의 원칙 세 가지를 제대로 활용하면 시조는 정격으로 갈 수 있다. 시조의 절제미와 함축미는 시어의 압축과 내포적 의미에서 온다.
시인 박용래
눈이 젖어 바라보던 →13자
그 삭정이 둥지
삭정이진 슬픔 →12자
한 줌 詩
고독을 품던 새는
지금은 날아가고 없다. →19자 ⇒44자
－이근배, 까치집－
「까치집」은 44자로써 시조의 총자수율로 보면 정격이다. 하지만 각 장마다 시조의 기본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이는 음보 개념으로 쓴 것이 아니라 구 개념으로 창작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초ㆍ중장은 소음보이고 종장은
과음보이다. 따라서 자유시와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이 또한 독자들은 자유시로 볼 수 있다.
이정자의 [현대시조, 정격으로의 길](국학자료원.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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