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위의(威儀)를 지키는 일
현대에 이르러 문화의 발전 속도는 가히 놀랄 지경이다. 과거 3,000년 동안의 농경사회는 겨우 300년 동안의 산업사회로 바뀌었고, 또 오늘날의 지식, 정보사회로 발전하는 데는 불과 30년밖에 안 걸리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앞으로 3년만 지내면 또 다른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제 우리 생활의 모든 면에서 발전의 속도는 완전 초고속이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문학이나 시조 분야의 발전 속도는 어떠한가. 자문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더 이상 시조의 형태 미학에만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걸 유념해야 된다.
시조가 우리의 전통시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허나, 전통이라고 해서 과거를 그대로 이어받아 답습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또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필자는 ‘전통’이란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발전, 변혁 시키는 것이 참다운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에 이르러 시조의 형태는 음수율에 의한 정형시(定型詩)라기 보다 율격(음율)에 의한 정형시(整形詩)라는 의견이고, 내용면에 있어서도 현대성을 가미해서 그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며, 아울러 순수한 미의식을 근간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 옳은 말이다. 허나 그런 이론이나 말은 쉽지만 막상 좋은 시조를 창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오늘날 우리 시조시인은 딜레탕트(프-dilettante)의 장식용 시인이 아니라, 장인정신을 갖춘 투철한 예술혼이 깃든 시조시인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시조가 자유시보다 더 운문적이라는 말에도 항시 유념해야 한다. 시조는 사물을 완상하거나 경관을 영탄하는 수준에서는 하루속히 벗어나야만 한다. 특히 음풍농월이나 자기 도취의 경향, 직설적 어법으로 세상 타령이나 하는 시조는 절대로 안 된다. 일찍이 이호우 시인이 「개화」라는 단수 한 편을 10년에 걸쳐서 완성했다는 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작년 겨울호 『시조문학』(통권 181호)에 실린 작품을 위주로 그 편집 순서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자. 다만, 지면 관계상 전에 거론한 적이 있는 시인보다는 거론한 적이 없는 새로운 시인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신작특집>에서 두 편을 골라 보았다.
내줄 것 다 내주어
바짝 야윈 추월산은
조각달 가까이서
산마루에 뉘여 놓고
다 헤진 옷고름 풀고
마른 젖을 빨린다.
- 김진혁, 「가을 추월산」 전문
이 단수 작품은 우선 모국어의 순도를 느끼게 한다. 순수한 우리말의 시어를 알맞게 사용하여 시적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울린 이미지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해주고 있다. 초장의 말머리도 인상적인 부분을 축약하는 솜씨를 보이고 있다. 겉모습보다는 시상을 포착하여 시적 비유로써 이미지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참신한 착상으로 자연에 대한 서정성을 여과하여 응축해낸 통찰력이 엿보이는 가편이다.
이 보다 더 먼 곳이
어디 있으랴
영원으로 소멸해간
아픈 생각 하나
이순의 산모롱가에
하현달로 뜨는구나.
- 신웅순, 「어머니 ? 22」 전문
근원적 어머니 사랑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하늘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은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했다. 초장에서 “이보다 더 먼 곳이 / 어디 있으랴”라는 표현에서 신 시인의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또 종장엔 그 내포된 의미가 자못 깊다고 본다. ‘상현달’과는 달리 ‘하현달’은 그 모양새를 그려볼 때 어머니에 대하여 공손하게 엎드려 큰절을 올리는 모습이 얼핏 연상되는 것이다. 시조가 언어 예술이란 점에서 생각과 의미는 이렇게 예술적 요건과 형식을 갖추게 된다.
다음 <단시조단>에서는 두 편을 골라보았다.
생인손 보다 더한
망부한(亡夫恨)을 다스리며
돌이 된 사연을 안고
고독을 씹는 청상
청산도
가슴을 뜯어
핏빛으로 울먹인다.
- 김광수, 「한계령 단풍」 전문
이 작품은 배행에 얽매이지 않고 시조의 형식 안에서 창조의 가능성을 확인 시킨다. 시조의 장과 장 사이를 이끌고 차단시키는 호흡의 묘리! 특히 비약이 감행된 종장의 시법은 부럽기만 하다. 예컨대 종장에선 비약과 함께 첫 음보 “청산도”가 반전과 고조의 수법으로 역동성이 가해지고 있어 시조의 묘미를 한껏 살리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감정의 절제 속에 사유의 농도와 비유의 농도 또한 그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김 시인은 확고한 시정신의 바탕 위에 작품을 빚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적 대상을 외적인 풍경 묘사가 아닌 자신의 내면세계의 감성으로 끌어안아 삭혀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스듬히 누운 햇살
안방 깊숙 발을 뻗다.
그가 벌써 눈치 챘나
노동지(老冬至) 구들목을
새알심
바람든 민심
어우러져 끓는 팥죽.
- 김몽선, 「동지」 전문
김 시인은 새로운 시 공간을 열어 개성적인 시상을 펼치고 있다. 시인의 고뇌가 작품으로 드러날 때, 거기엔 시대정신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 종장 “새알심 / 바람든 민심 / 어우러져 끓는 팥죽.”이 시사하는 바, 그 상징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조의 형식과 내용이 고루 반죽되어 팥죽이 끓는 형국에 다름 아니다.
다음 <겨울시조단>에는 풍성하게도 100여 편의 작품이 게재되어 있으나 지면 관계상 부득이 10여 편만을 골라 보았다.
뜬 세월 길이만큼
쌓인 한 깔아놓고
절절이 아쉬운 점
나이테에 묻어둔 채
떠나는
길손들 속에
슬밋슬밋 끼어든다.
- 김두수, 「자화상」 전문
이렇게 한 편의 작품 속에는 작자의 정신세계인 사상이나 인생관이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떠나는 / 길손들 속에 / 슬밋슬밋 끼어든다.”에서는 자아성찰의 자세는 물론 김 시인의 소심하고 겸손한 면도 엿볼 수 있다. 쉽게 읽히면서도 공감의 폭은 크다.
우직한 마음으로 받들은 천직의 삶
종이에 찍힌 관인 내 삶을 흔들어도
선비의 여정이라고 억울함도 삭혔지.
고향을 등지고도 마음을 묻고 살며
낯설던 임지들을 내 눈에 담고 익혀
민초들 깊은 애환도 알뜰살뜰 챙겼네.
새벽과 어둠속을 반평생 넘던 고개
천둥산 박달재는 내 눈물 보았으리
지천명 넘긴 이 가을 회한만이 쌓인다.
- 김일영, 「종잇장 인생」 전문
삶의 궁극을 성찰하게 하는 소박한 작품이다. 본인이 원하는 곳이든 원치 않는 곳이든 관인이 찍힌 발령장 하나를 받아들고 임지에 가서 몸과 마음을 묻어야만 되는 게 바로 공직자의 처지인 것이다. 오로지 투철한 사명감으로 공직에서 반평생을 보낸 김 시인의 애환이 고스란히 짐작된다. 이 작품은 시조의 행과 연이 유기적 긴장의 응결체라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장별배행의 연시조가 기-서-결의 내용을 구성하며 행간마다 박력이 숨어 있어 세 수까지 시상을 끌고 가는 재미가 있다.
아래는 보지 말고 위로만 올라가자
절망으로 내몰려도 가는 길이 따로 있다
너와 나 부등켜 안고
갈 때까지 가보자.
숨가쁘게 달려온 길 절망을 넘어서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한 때도 있었지
앙상한 실핏줄 위로
빗줄기가 내리고.
- 김 전, 「담쟁이」 전문
창작은 새로운 발견이라고 했다. 짧은 시조 속에 인생이 담겨 있고 우주가 담겨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하찮은 소재라 할지라도 어떻게 쓰이고 부리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사뭇 달라진다. 이렇게 소재에서 참신성을 개발하는 것은 시인의 역량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김 시인은 대상에 몰입하여 일체감을 형성하고 다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고 있다. 오로지 긍정의 힘으로 참고 견디며 삶의 어려운 굽이를 넘어서는 야무진 인생관이 엿보인다.
열리면
온 우주를
담고도 남는 여백
닫히면
바람 한 줌
바늘 끝 틈도 없는
주인도
어쩔 수 없네
손잡이가 없어서.
- 박상준, 「마음의 문」 전문
이 작품을 읽으며 생략과 배제의 원리를 생각해 보개 된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작품이다. 역시 시조의 생명은 3장 구성의 완결미를 통해 함축된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특히 단시조는 순간적으로 촌철살인의 기운으로 독자의 폐부를 찌르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여기서 종장은 도치법으로 표현의 변화를 꾀하며 위트가 깃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둑한
화단길로
올라오는 저 귀공자
얼굴엔
미소 가득
마음에는 기쁨 가득
해맑은
소망 담아서
솟아오른 달덩이.
- 신권호, 「보름달」 전문
다분히 개성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시적 대상을 긍정적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참신성이 돋보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현대에 와서 시나 시조의 어미사용 문제는 꽤 중요시 되고 있다. 시행의 어미나 연의 맨마지막이 되는 어미 처리를 얼마큼 제대로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그 작품의 의미와 내용이 한결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을 보면 행의 끝 어미를 아예 생략하거나 명사로 종지함으로써 간결하고도 깔끔한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어느 선비 붓끝에서 화선지에 옮겨 앉아
달빛에 물들이고 실핏줄에 피 돌리고
툭 차고
기립한 자리
향기 절로 매섭다.
끝동 같은 이야기와 씁쓸한 기억까지
발치에 묻어 놓고 노란 얼굴 내밀었네
가늘게
오는 바람에
화두 하나 만들고.
- 윤주홍, 「국화가 피기까지」 전문
이 작품은 자아와 시적 대상과의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회화적 수법의 작품은 자칫하면 보이는 형태 이상의 것을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윤 시인은 오히려 인식의 객관화라는 차원에서 성공하고 있다고 본다. 사군자로 꼽히는 한 폭의 국화를 앞에 두고 시의 화자는 상상력이 열어주는 세계와 객관적, 이성적으로 내밀한 마음의 움직임까지를 다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시적 감각이 높은 차원 속에 요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랜만에 원고지위 글자를 바로 잡는다
오탈자 잘못됨과 앞뒤의 간격까지
오늘은 판검사 되어 준엄하게 바루다.
사람이 잘못되면 교도관이 교정한다
사전적 낱말들도 바로잡기 어려운데
하물며 사람교정은 살얼음판 건너기다.
밟아온 이승 길에 잘못된 일 너무 많아
가슴을 불태우며 교정 못한 마음벌에
쟁깃날 깊이 꽂아서 청정심을 심는다.
- 이용우, 「교정보기」 전문
이 작품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시조다운 태깔도 잘 지키고 있다. 율격 체계를 잘 갖춘 3장 구성의 연시조로 감정의 진실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첫 수에선 원고 교정, 둘째 수에선 사람 교정, 셋째 수에선 시적 화자의 성찰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시조의 틀에 전형적인 3단 구성의 내용을 담아 정연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현실 감각을 통한 삶에서 긍정적인 힘과 성찰의 자세가 느껴지는 시조다. 창조적 작업을 통한 한 편의 시조에서는 은연 중 작자의 체취를 담고 있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셋째 수에서는 화자가 교정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이얀 고운 눈이 하염없이 내립니다
메마른 산천초목 하얀 꽃을 피웁니다
눈처럼 순결한 마음
이뤄지길 빕니다.
- 조희식, 「순결」 전문
연세가 꽤 많으신 분이신 데도 진정으로 순박한 시의 가슴, 시의 마음을 지니고 계시다는 걸 바로 알 수 있다. 시의 마음은 순결한 마음이요, 맑고 고운 빛으로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꾸어 준다. 쉽게 읽히는 단시조다. 경어체 어투여서 겸손한 설득력과 만나게 되기도 한다. 곱고 하얀 이미지 제시를 통해서 높고 맑은 시적 성취를 얻고 있다고 본다. 하얀 눈꽃을 보면서 시인은 이미 지순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초장에서 ‘고운 눈’이, 중장에서 ‘하얀 꽃’으로, 종장에선 ‘순결한 마음’으로 예술적 승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동인 순례>란에 실려 있는 ‘대전시조시인협회’ 회원의 작품에서 두 편을 골라 보았다.
한반도 갈꽃 속에 반쯤은 두고 갔을
씨알, 목쉰 울음 이 땅에 풀어 놓고
저무는 하늘 쪽으로 두 손 모아 서성일 때
내 귓전 울리도록 날이 선 그 육필이
햇살 아래 침묵하며 오로지 베풀어온 힘
일순간 먹물 헤치고 환한 세상 밟아간다.
- 김광순, 「씨알 步法」 전문
김 시인의 신작을 오랜만에 대하게 된다. 시조의 율격을 잘 지키며 개성적인 시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두 수 연시조에서 수준 높은 의미율화로 시조의 현대성을 잘 살리고 있는 것이다. 불필요한 감상이 배제된, 시정신의 가열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행마다 시상을 이끌어가는 힘이 실려 있다. 작품은 작가가 만든 제품이 아니라 정신이 깃든 생명체라는 말이 실감된다. “일순간 먹물 헤치고 환한 세상 밟아 가는” 김 시인의 “씨알 步法”이 기대된다.
천 길 물속을 저어 가재처럼 더듬는다
진주보다 더 귀한 홍합 한 송이
콧노래
꿈을 섞어서
바구니에 주워 담고.
서러운 날은 없어라 사는 것이 즐거워
털부리 선장을 따라 바다로 나아간다
그 나이
아흔 한 살에
바다보다 깊은 삶.
- 이도현, 「인어 할머니」 전문
이 작품은 “91세의 김화순 해녀의 삶”이란 부제가 붙은 시조다. 한 수 5행의 구조로 행의 배치를 살펴보면 시각적 효과도 도모하고 의미와 메시지 전달의 효과도 도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식 운용이 능숙하고 자연스럽다. 심상이 포착한 시의 대상은 하나의 피사체가 된다. 이 피사체를 이 시인 자신의 시각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그려나가고 있다. 이게 바로 개성이 아니겠는가. 이 시인은 이렇듯 시적 대상과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사유해 보게 한다.
이상으로 열 네 분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시조의 형태를 잘 지키며 율격에 충실하고 있다고 본다. 내용면에서는 과거보다 긍정적, 진취적 세계를 그려가고 있는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또한 희망적인 현상의 하나라고 자위해 본다. 시나 시조는 상상력의 산물이며 복합적 감정으로 구성되는 예술작품이다. 설익은 감정이나 감상, 과잉된 주관으로 쓰여진 시조는 광고의 문안이나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모름지기 저급한 시조는 추방하고, 시조의 고급화 운동에도 다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시조의 위의(威儀)를 지키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시조는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우리시다.
조회 : 1,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