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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30 02:24
 조회 :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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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결 속에서 익어가는 삶의 연륜 ◈
- 이태극 선생의 시조문학-
우 한 용(서울대 교수)
1. 삼월이면 생각나는 시인
시인이 하는 일 가운데 시간의 감각을 되살려 주는 것 만큼 큰 것이 없을 듯하다. 이는 흔히 시의 이론이라든지 이념 등에 묻혀버려 언급을 하지 않고 지나간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이상은 어쩌면 감각이 살아 있고 그것이 생생한 감수성으로 서로 전수되는 삶이 아닐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언어기호 저편에서 메마르게 전개되는 삶의 갈피에 계절의 감각을 살려 주는 것은 시를 읽는 기쁨 가운데 가장 큰 것일지 모른다.
삼월이면 생각나는 시가 있다. 「삼월(三月)은」이라는 시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진달래 망울 부퍼
발 돋음 서성이고
쌓이던 눈은 슬어
토끼도 잠든 산(山)속
삼월(三月)은 어머니 품으로 다사로움 더 겨워 --.
멀리 흰 산(山) 이마
문득 다금 언젤런고
구렁에 물소리가
몸에 감겨 스며드는
삼월(三月)은 젖먹이로세
재롱만이 더 늘어--.
<1956.4.15 동망산방(東望山房)>
학교를 다니느라고 20년을 보내고 학교에서 가르치느라고 20년을 보내는 동안 3월이란 달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계절이다. 개학과 더불어 젊은이들이 학교로 몰려들어 희망의 눈을 빛내면서, 그 열기로 산 머리에 남은 눈이 녹아날 것 같은 그런 날들이 지나가는 동안 계절의 변화를 기대한다. 그러할 때 진달래 망울이 부풀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스운 표현 같지만, 행복이다.
그러나 "삼월(三月)은 젖먹이로세/ 재롱만이 더 늘어 --."라고 하는 구절에 익숙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했다. 싸늘한 날씨가 계속되고 바람끝에 매서운 삼월이 젖먹이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한 달을 더 기다려 "4월은 잔인한 달, 언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그렇게 먼 나라 시인의 한 구절을 외며 시간의 흐름에 빗나가 겉돌아가기가 일쑤였다.
다시 그러나, 내게 삼월은 늘 진달래 망울이 부풀어 발돋음 서성이는 이미지로 시작되곤 했다. 학교라는 데서 평생을 보내게 된 나는, 삼월은 피빛깔로 아우성치는 역사를 먼저 머리에 떠올리게 하는 강요를 벗어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삼월(三月)은」 한 편이 있어 나의 봄은 바람 끝에 실리는 꽃기억을 풀어내면서 연두빛 강물처럼 흐르기 시작할 수 있었다.
2. 산하에서 역사를 읽으며
아주 평범하게 말하기로 하자. 우리는 매일 역사와 민족을 생각하며 가슴 조이고 애달파하는 심정으로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가 격랑을 일으키는 길목에서 일상에 묻혀 초연하다면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나라 하늘을 숨쉬는 인간으로서, 그러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시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버릇이 있다. 시인이 진리를 보아내고 견자이고(la voyant) 광야에서 역사의 미래를 외치는 선지자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시인마다 그렇게 나서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인은 삶의 섬세한 결을 읽어내며 그것이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에 어떻게 맞물려 있는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역사에 참여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6.25의 전란이 산하를 휩쓸고 지나간 황량한 세월에 시인이 체험하는 역사는 어떤 것인다. 「내 산하(山河)에 서다 」에서 우리는 시인의 시대체험을 읽을 수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전쟁이 터졌을 때 왜 시인에게 총을 메고 앞서 나서라고 하지 않고도 그가 역사의 책임을 다하는지를 알게 된다.
1
일월(日月)도 서멱한 채/ 그늘진 정(情)은 흘러//
핏자웃 길목마다/ 귀촉도(歸蜀道) 우는구나//
건널목 숲으로 가름한/ 저 언덕과 이 강물!
2
진달래 피어들고/ 단풍잎 불타나고//
부르며 바라보는/ 어배들의 보금자리//
배리(背理)는 화사(花蛇)의 습성(習性)/ 굳어만 가는 마음벌!
3
얼룩진 수의(囚衣)이기/ 되십는 회한인가//
깁소매 접어 넣고/ 확짝 열자 닫힌 창을//
섭리(攝理)는 새 날의 기수(旗手)/ 지켜 서는 내 강토(彊土).
4
오랜 역사(歷史)의 장(章)이/ 갈피갈피 어엿하다//
한핏줄 소용돌아/ 가슴가슴 솟구친다//
갈림은 만남이 정점(頂點)/ 휘어잡는 내 손길 --.
(1965. 6. 감나무골)
시인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은, 독자가 나라를 사랑하여 목숨을 바치게 하는 '장렬한 전사'를 촉구하는 데 있지 않다. 현실의 아픔을 내 아픔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되 절제된 슬픔을 드러냄으로써 남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데 시인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이 있다. 「뇌우탄막(雷雨彈幕) · 1」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6.25가 일어나 이듬해, 1.4후퇴에 밀려 대전으로 내려간 시인은 상황의 급박함으로 벼랑에 서 있는 듯한 위기감에 싸여 있다.
뇌탄(雷歎)은 날려 날려/ 앞뒤에 불을 뿜고//
어미 등에 지친 애는/ 그만 잠에 떨어졌다//
이것이/ 운명(運命)이라면/ 말할 나위 있으랴//
하늘에선 불세례/ 적병(敵兵)은 앞뒤인데//
등대도 아득하고/ 사공조차 간데 없다//
그래도/ 남(南)으로 남(南)으로/ 밀려가는 이 무리--.
위 시의 상황 앞에서 「소리 · 6」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역사의 질곡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봄은 현실의 가파름을 척결하는 지혜를 구하는 일이다. 과거가 현실을 모두 해결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되돌아봄이 없이 미래를 그릴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삶의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그 자체가 역사의식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다짐도 허사로고 어수선한 틈을 노려
북쪽 되바람이 이 강토 휩쓰는 소리
사흘도 못버티고서 궁궐마저 앗기다.
산산 조각이 난 채 아녀잔 울부짖고
호기에 찬 오랑캐는 산성을 에워 싸고
항복을 재촉하는 화살 빗발되어 꽂히다.
항전과 화해의 사이 충정으로 엇갈리다
사직과 겨례 위한 피치못할 통곡 속에
곤룡포 자락을 끌고 삼전도를 꿇앉다
수욕과 원분으로 초목도 빛을 잃다
한강수 삼각산을 돌아돌아 붙안고서
가약도 못한 발길 옮기던 비바람 속의 북행길.
(1977.6.26. 자하산사에서)
일제강점기를 체험한 이들에게 그 시대를 돌아보는 데는 역사의 치욕을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소리 · 12」로 되어 있는 작품은 이렇게 되어 있다.
말도 잃고 글도 빼앗겨/ 벙어리 냉가슴으로//
죽지 못해 이어 살던/ 어둠의 그 나날들//
젊은인 마구 끌리어서/ 목숨 헐케 버렸다.
동아의 천지 가득/ 단말마(斷末魔)의 발굽 소리//
사랑의 금지환도/ 가전(家傳)의 쇠붙이도//
허망의 이름을 쓴 채/ 앗기고야 말았다.
지긋이 눈 감으면/ 핏자국 선연하고//
돌이켜 귀 담으면/ 곡성(哭聲)만이 충천하여//
숨통을 보듬어 안고/ 동트기만 헤이다.
(1979.4.19.자하산사에서)
이 시를 두고, 일제강점기가 얼마나 험난한 역사의 고비였던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지긋이 눈 감으면/ 핏자국 선연하고// 돌이켜 귀 담으면/ 곡성(哭聲)만이 충천하여// 숨통을 보듬어 안고/ 동트기만 헤이다." 그 이상 어떤 말이 필요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눈을 주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역사의 벼랑을 시인이 자신의 정신 내면에 맥을 이어 엮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식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점점이 흩어져 있고, 시간적으로 끊어져 있는 사실을 어떤 의미의 가닥으로 정리하는 그 안목과 함인 것이다. 그러한 안목은 현실을 바라보는 안목으로 전환된다. 그것을 의미의 지평을 혼용하는 일이며 해석학적 과제를 시인이 떠맡는 방식이다.
3. 핏줄로 이어진 존재라는 의식을 일깨움
흔히 하는 말로, 사람은 사람 사이에 있다. 人間이라는 말을 가지고 하는 언어유희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희만은 아니라는 점은 늘 다시 살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사색의 제목이다. 자아는 타자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다는 것이 심리학과 인식론의 논지이다. 내가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윤리의 궁극점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부모와 핏줄로 이어진 존재라는 점은 너무 평범해서, 그런 깨달음을 일깨우는 것은 시인의 일이 아닌 듯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어머니라는 존재, 아버지라는 존재 그들이 내 존재의 근원이라는 깨달음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념화 되지 않은 모성과 부성을 일깨우는 것은 순정한 시심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일이다. 「어머니 영(詠)」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견디어 삼백 날은 살얼음 밟아 살고
팔딱 놀 때마다 환희로 뛰던 가슴
넘기던 일력 장장에 배어 벅찬 마음씨
진통의 회오릿 속 트여난 고고의 싹
안도 숨소리에 지켜선 봄바람에
밤낮을 오로지 하여온 그 하나의 정이여!
다칠세라 꺾일세라 살펴 북을 돋아
자리 가려 옮겨 마음 조려 날을 이어
줄기찬 한줄기 소망 쌓아올린 탑이여!
흰 머리 깊은 주름 한생 그 한마음
목숨 다한대도 못 잊던 그 너그러움
가슴 속 터져 넘도록 썰고 밀고 굽이짓네.
(1969.4 모래내에서)
내 존재가 다른 어떤 존재에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이 어머니로 인해 온다는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 찾기 어려운, 이 나라 특유의 존재인식인 듯하다. 혹자는 그것이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인식틀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생명은 이념을 한결 뛰어넘는 섭리와도 같은 것이다. 마음으로 느끼고 심정적으로 공감하고 그리하여 대상이 나와 일치되는 경험이 쌓이는 가운데 존재의 분열적 갈등을 넘어서는 데에 생명의 윤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윤리가 전통으로 살아 있다면 그것이 가부장제면 어떻고 모성적 억압이면 무슨 상관일 것인가.
인간이 삶을 엮어 가는 가운데 가장 가까운 존재를 배우자로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책망하는 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육화되지 않은 이념이란 얼마나 허잘것 없는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살 맞부비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엄숙한 빛을 띠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짝은 떠나고」라는 시에게 이렇게 돌아본다. "팔순 한 평생을/ 사는 듯 살도 못하고/ 한 마디 말도 못한 채/떠나간 그대 모습// 봉긋한 무덤에 누워/ 부슬비에 젖는가." 시인의 아내가 한 일은 이렇다.
피려던 열여덟에
귀밑머리 풀고 와서
어렵사리 살림살일
말없이 꾸려 주고
사남맬 퀴워 키워서
보란 듯이 세웠고.
정갈한 몇 줄로 요약되는 삶의 역정에 대한 시인의 돌아보는 심정은 "회한은 비바람되어/ 문듯 문듯 감겨온다."고 서술된다. 그리고 돌아보면 삶의 구비마다 어리고 쌓였을 사연은 이렇게 정화되어 나타난다.
" 아침 저녁 상머리에/ 앉은 듯 어리는데// 그 미소 안개 속으로/ 아스라이 숨는다."
(1991.7.10.하계우사에서)라고 부기되어 있다. 10년 전의 일이다. 아스라한 미소로 남는, 아니 숨는 그 삶의 흔적을 과장하지 않고 조용히 떠올리게 하는 이 시의 숨결을 그 자체가 정화된 감정의 정수이다.
4. 섬세한 삶의 결/ 결의 삶
인간 삶의 정원이 황량한 벌판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삶의 허전함으로 방황한다. 그러할 때 한 편의 작은 시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위안이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위안은 삶의 허망함에 대한 공감에서 오기도 하고, 잔잔한 애정에 대한 연민에서 오기도 한다. 삶의 결을 더듬어 구체화 하는 일, 그것이 시인과 문학을 하는 모든 이들의 일이다. 이를 형상화라는 용어로 말하지 않더라도, 들떠서 삶을 떠나지 않도록 존재의 본바닥을 매만져 주는 시는 삶의 아름다운 무늬일 수밖에 없다. 삶의 무늬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으로 〔주막］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운 죽지는 접고
발을 터는 처맛밑
문고리에 닿는 정(情)이
삶을 지레 솟꾸는데
따라온 사연은 겹쳐
창문턱에 누웠네.
그믐 달 새어 들어
야위어 서린 벼갯맡
성황당 부엉이도
밤새 울다 지친 사념(思念)
저 먼 길 영(嶺)이 뵈는 곳
두고두고 가는 밤--.
(1996. 5. 28. 감나무골)
고향을 떠올리는 것은 연륜을 헤아려야 되는 일이다. 고향에 살면서도 고향이 이전같이 익숙한 세계가 아닐 때, 고향에서 '또 다른 고향'을 그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고형을 떠나 타향을 떠돌며 세월을 살아간 이에게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실향곡(失鄕曲)］은 시인이 나이들어 고향을 찾아가 추억을 더듬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눈 감으면 거울되는/ 내 놀던 푸른 언덕//
북한강 따라 올라/ 사명산(四明山)의 북녘 기슭//
지금은 파로호(破虜湖) 깊숙한/ 어별(魚鱉)들의 보금자리.
피어난 진달래가/ 석장을 수 놓으면//
산꿩들의 울음따라/ 잠차지던 소꿉놀이//
냉잇국 쑥버무림에/ 초생달도 밝았지?
물이 불고 고기 뜨고/ 날이 들면 뱃놀이들//
벌거숭이 하동(河童)들의/ 꿈은 마냥 부풀지만//
밤나무 그늘 밑에서/ 귀글 소리 우렁찼지?
서시래 벼랑 끝에/ 단풍이 불타나고//
영 너머 조 이삭이/ 석양에 물들며는//
온 마을 타작 마당/ 풍년가로 들렜지?
눈이 찬 바람이/ 강마을을 휘몰아치면//
잉어 잡이 토끼 몰이/ 따라나선 꼬마 용사//
짚신 속 발가락이 얼어도/ 지칠줄을 몰랐지?
이렇듯 꿈 꿈으로만/ 새김하는 옛 내 고향//
이순(耳順)문턱에서/ 티끌만 호흡한다.
색동옷 그 마당에 앉은 채/ 소쩍소리 들으며--.
(1967. 11. 감나무골에서)
위에 인용한 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명징하다. 명징하게 그려진 기억의 편린들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그런 체험은 개인의 감수성에 국한된다는 평을 들을 수 있다. 삶의 여울에서 역사를 읽는 복합적인 시각이 마련될 때, 그 시는 우리를 이끌어들인다. ［황토길］같은 작품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변화하는 현실은 혼탁하다."태고의 흰옷자락을 흙탕 속에 적시면서" 걸어야 한다. 그러한 현실을 현실로 용인하면서, 그 안에 역사를 이끌어들일 때 비로소 "살아갈 그 길이 가슴에 와 서린다"고 하는 말이 실감을 갖게 된다.
역사가 징검다리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좁고 휘돌아서 마을과 마을로 간다
태고의 흰옷자락을 흙탕 속에 적시면서
해가 뜨고 달이 밝아 풀피리도 불어본다
어른 아이들이 턱을 괸채 쪼그리고
옛얘기 되풀이 들으면서 새바람을 마시고
아스팔트 곧은 길가 비닐하우스 늘어서고
양옥이 여기저기 자세짓고 버티어도
살아갈 그 길이 가슴에 와 서린다
(1987. 3.15. 자하우사에서)
인간이 집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존재의 증명에 해당한다. 고투에 고투를 거듭하여 몸을 눕히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는 것, 그것은 그야말로 '존재의 집'인것이다. 그 집에 대한 애정은 속물근성이 아니라 삶에 대한 간절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970~1986 여름까지 정들었던 자하산사를"이라는 부제가 달린［깃은 헐리고］라는 작품은 손수 장만한 집이 헐리고 이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빚어진 시이다.
서울살이에서 가장 오래 머문 자리
짐꾸펴 옮긴 빈터 정적을 깨고
크레인 드높은 소리로 허물어져 가기만
정어린 선물이기 정들여 가꾼 오동
십칠 년의 흔적 그냥 나뒹굴어 떨고 있고
싱그레 너울대던 파초도 소리없이 쓰러졌다
방싯 반겨주던 산목련도 흔적없고
겨우 살려피우던 매화도 살지 말지
추위가 닥치는 언덕에 세워지는 골조기둥
용문산정(龍門山頂) 에서 옮긴 원추리꽃 맺힌 정도
파로호에서 맞아온 상사화의 그리움도
뿌리서 돋아 자라던 감그루도 먼 기억뿐
볼 붉혀 안겨오던 대추알도 아물아물
주저리 달려 웃던 청포도도 눈에 어리고
그 그저 허수아비로 허공만을 바라본다
사십여 편 자하산사의 화목찬(花木讚)도 시로만 남고
아침저녁 매만지던 손길도 자취로만 남아
주름진 얼굴만 들고 석양길을 밟는다.
(1986. 11.16 자하빌라에서)
5. 간계없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
문학은 오직 젊은이를 위한 것인 듯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늙으면 문학이 어떻게 된다는 식으로 성급히 규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이들이 도모하는 일종의 간계일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에 늙은이의 몫이 있는 법이다. 늙은이의 자리가, 변화를 거듭하기는 하지만 마련되는 것이다. 시인은 「요즘의 심정」이란 작품에서 생애를 요약하면서 싱싱한 삶의 의욕을 살려내고 있다.
전체가 8수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의 1은 다음과 같다.
손수 가꾼 자하산사/ 꿈도 있었건만//
빌라로 둔갑된 훈/ 박제된 허수아비//
이곳을 떠나 옮겨지니/ 속빈 강정만 같을 뿐.
이어서 상계동(上溪洞)에서 살던 일, 바둑을 잡은 채 세상을 마치고 싶은 노년의 소망등을 떠올리면서 "이젠 아들 따라/ 강남으로 옮겨왔다."고 술회한다. 늙었지만 "아직 사람이기/ 미련도 애착도 있다"고 직설법으로 의욕을 털어 놓는다. " 내 삶의 흔적들을/ 남겨 두고도 싶다."는 구절로 요약되는 몇 가지 소망을 적어 내려간다. '늦게 얻은 아들도/ 불혹 넘어 제 길 가고// 며느리도 두 아들을/ 키워 놓고 제일 열었다."고 한다. 그런 정도의 안정감을 얻었으면 다른 욕심 없이 여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인데, 시인은 그렇지를 못하다. "바람만 살포시 가슴에 안겨/ 실존(實存)임을 알리네."하는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시인이 업도인지도 모른다.
삶을 익혀가는 일이 항변이나 비판, 혹은 투쟁으로만 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늙어야 한다. 분노도 좌절도 들끓어 오르는 욕망도 정화되어 대상이 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꽃이 지는 일이 슬픔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낙화(洛花)의 변(辯)」은 원숙한 정신의 여유로움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꽃도 피면 이우는 법
떨어짐 또한 자연이지만
몰아친 광풍으로
휘날려 허공을 도니
보는 이 가슴 가슴에도
허허로움 더하리.
역리가 순리됨도
세상의 흐름이라지만
낙화를 순풍에 실어
제자릴 찾게 함도
이 또한 다사로운 꽃으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
휘몰려 날려진 꽃도
대지는 감싸준다.
날빛과 습도 또한
번갈아 찾아준다.
남은 향 고이 지니면서
이 한 생을 다하리.
(1991. 1.26. 상계우사에서)
격정의 물살이 바다를 향해 가면서 안으로 가라앉고, 그러는 사이 꽃이 피고 지고 하면서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 섭리 가운데 살아가는 삶의 이치가 합자연하는 시점에서 시인은 담담해진다. "남은 향 고이 지니면서/ 이 한 생을 다하리."하는 다짐은 "역리가 순리됨도/ 다사로운 꽃으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라고 하는 정신적 평정 다음에 온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시조인생이라고 해야 할 그의 생애 중간에 이런 점검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후 50년 가까운 세월을 시조 작업을 해온 살이 그 자체가 청사(靑史)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매, 더욱 절실한 감이 있다. 「시조송」은 1955년 작품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연은 이렇게 되어 있다.
묶는 듯 율(律)의 자윤
내일(來日)바라 벋어나고
부풀어 말의 자랑
갈수록 되살아나
이 노래 청사(靑史)를 감넘어
보람쩍게 크리라.
이 시인이 시조를 시작한 것은 대단한 의욕 같은 것을 과장하지 않는다. "시조(時調)가 하도 좋아/ 나도 얽어 보던 것이/ 그 벌써 한 이십년(二十年)/ 어제론 듯 흘렀구료" 하면서 시조를 쓰는 즐거움을 서술한 후 얻은 의욕과 다짐이다. 그러한 다짐에서 빚어진 시조작품이 스스로 "청사를 갓넘어/ 보라쩍게 크기를"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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