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조문학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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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5-14 18:08
분단시대 동시문학의 한 면모(2/2)-김용희
 글쓴이 : 야초 손상철
조회 : 3,274  
3. 90년대 분단문제를 다룬 동시들의 몇 갈래

분단문제를 다룬 동시문학은 90년대를 기점으로 확연히 달라진다. 90년대 이전까지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수동적으로 대응하던 동시문학이 90년대 들어서면서 분단현실을 보다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다. 거기에다 새로운 감각과 기법을 구사하며 주제도 보다 다채롭게 구가한다. 그것은 분명 90년대를 전후로 한 세계질서의 재편과 직접 관련된다. 90년대는 ‘한소협력시대’란 말의 당혹감 못지 않게 국제정세 변화는 참으로 엄청났다. 동구 공산국가들의 개방화 물결을 탄 탈이데올로기화와 때를 같이하여 평화공존의 시대를 예견하듯 남북 예멘과 독일의 통일이 이룩되었다. 이렇듯 세계질서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반목과 대립이 종식되고, 상호의존적인 경쟁과 경제공동체로 전환된 것이다. 아직 한반도는 남북한 물리적인 대치 상태와 적대적 긴장관계가 엄존하지만, 1989년 6월 한소정상회담 이후 여러 형태의 남북 회담이나 상호 방문이 이루어졌고,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북한바로알기’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그에 따른 통일에의 열망도 증폭되었다. 분단 반세기를 보내는 이제는 우리의 분단에 대한 인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현정부는 확고한 안보의 기반 위에서 북한이 필요한 모든 분야에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바 있고, 대북 개방정책인 ‘햇볕론’을 내세워 ‘화해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개방의 수위도 한층 높였다.
북한사회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었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4년 여만에 열린 북한 최고 인민회의에서 김정일을 개정헌법상 최고의 직책인 국방위원장에 추대함으로써 김정일체제가 공식 출범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유훈통치라는 어정쩡한 지도체제를 탈피하고 김정일시대 개막을 공식화한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2세 권력체제 시대를 의미한다. 김정일 체제가 출범하면서 이중적 현시의 극단적인 외교를 보여주기도 했다. 동북아 안정을 뒤흔드는 미사일 발사 실험과 금강산 관광 길을 열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북한은 현재 식량난을 비롯한 심각한 경제 사정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북한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될지 예단하기 어렵게 하지만, 우리의 대북인식에 대한 변화만큼 그들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하기를 고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90년대 이러한 국내외적 정세 변화는 동시문학에도 뚜렷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동시문학이 분단현실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대북인식에 관한 시대성을 쟁점으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순응적으로 분단상황을 받아들였던 90년대 이전에 비하면 주제면에서나 내용면에서 보다 다채로워졌고 분단의 문제성을 다양하게 표출시켰다. 여기에는 분단에 대한 참다운 상황인식과 냉철한 역사의식이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분단현실에 대한 상황인식과 시간의식
9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 동시문학은 분단의 시간성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는 동력이다. 시간은 동구권 공산주의의 벽도 허물고, 철저한 이데올로기의 성곽도 퇴락시킨다. 80년대 동시문학은 공간성을 통해 분단의 아픔을 인지했다고 하면, 분명 90년대 동시문학은 시간성을 통해 분단을 비판적으로 인지하기 시작한다.

시간도 쌓이면
무게가 있나 봅니다.
남북을
팽팽하게 가르며
날이 섰던
철조망이
늘어지고 굽어져서
녹이 슬었습니다.
그래서 지뢰밭이라는 푯말조차
들고 있기 힘이 듭니다.
이제
작은 바람에도 울기만 하는
철조망에
새들도 앉지를 않습니다.
― 방원조의「지뢰밭 푯말이 걸린 철조망」전문 (『아동문예』1991, 1)

군사분계선 안의 지뢰밭 푯말을 게시한 철조망은 분단 비극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그 ‘지뢰밭 푯말이 걸린 철조망’을 시적 화자는 분단 40여 년이라는 긴 시간으로 바라보고 있다. 곧 시간이 쌓인 무게감을 통해 분단의 상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모든 형체를 변화시킨다. 팽팽히 날이 선 철조망도 낡고 녹이 슬게 하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늙어 죽게 만든다. 분명 4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은 팽팽하게 날이 선 철조망을 늘어지고 굽어지도록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세월이다. 그 많은 시간의 흐름은 점차 무게를 달고 “지뢰밭이라는 푯말조차/들고 있기 힘이” 들 정도로 유형의 물체를 퇴락시키고 있다. 이렇듯 이 동시의 시적 화자는 군사분계선 안에서 이제는 새들조차 거들떠 보지 않은 퇴락한 철조망에 지뢰밭을 알리는 푯말이 아직도 변함없이 걸려 있는 모순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40여 년이라는 분단의 세월에 자기 책무조차 감당하기 힘이 들 정도로 낡은 철조망이지만, 그 철조망은 아직도 남북한의 물리적인 대치 상황은 엄존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단현실에 대한 시간의식은 정운모에게서 보다 운명론적으로 제기된다.

다 심고 돌아서다가
걱정이 되어
다시 쳐다본 열매 나무

북쪽으로 뻗은 가지엔
빠알간 열매가 조롱조롱 열리고
남쪽으로 뻗은 가지엔
파아란 열매가 조롱조롱 열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열린 열매끼리
색깔이 다르다며 서로 싸울까 봐
걱정이 되었다.

뿌리는 분명 하나인데
나는 왜 이처럼 쓸데없는
걱정을 해야만 할까.
― 정운모의 「식목일」4∼7연 (『아동문학평론』1991, 가을)

식목일은 산림 녹화를 위해 특별히 제정된 법정 공휴일이다. 정운모는 식목일에 한 그루의 과수를 심으며, 그 과수에 서로 다른 열매가 달리고 서로 다른 열매끼리 싸울까 봐 그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극단적인 남북한의 이념 차이로 반목과 대립을 쌓아온 ‘시간의 무게’가 시적 화자에게 운명론자로 만든 셈이다. 40여 년 쌓인 불신이란 시간의 축적이 곧 한반도의 타고난 숙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왜 이처럼 쓸데없는/걱정을 해야만 할까”라며 반문한다. 이 반문은 분단으로 계속되어온 시간의식에 기초되어 있는 것이다. 정운모의 ‘쓸데없는 걱정’의 요인으로 남북회담 대표들이 “얼굴을 붉히고/욕설을 퍼부으며 돌아”선다는 제해만의 「판문점의 참새」(『별찾기』상서각, 1994)에서 그 일례를 찾을 수 있다. 「판문점의 참새」는 남북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서린 냉전체제의 여진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동시이다. 남북회담은 남북관계 교류를 개선하여 진정한 민족적 화해를 모색하는데 필요한 가장 현실적인 기본 창구이다. 그러나 남북 대표들이 동질성 회복을 구축하는 민족의 현안들을 시원스럽게 처리하지 못하고, 결국 적대적 관계를 확인시키고 마는 실망감을 「판문점의 참새」는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분단상황이 정운모가 ‘식목일’에 한 그루의 과수를 심고도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만든 현실이 되며, 그 걱정으로 쌓인 시간이 양이 운명론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결과이다. 그것은 단일 민족이면서 분단 반세기가 흐르도록 화해는커녕 이질화의 골만 깊어간다는 시간의식에 대한 반향인 것이다. 박신식도 그런 시간의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열리지 않지?

혹시
서로 열쇠를 바꾸어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 박신식의「휴전선」2∼3연 (『아동문예』1997, 6)

반세기 동안 꼭 닫힌 「휴전선」이란 자물쇠에 대응할 수 있는 열쇠는 무엇일까. 박신식의 「휴전선」은 이런 시간의식에 소여된다. 여기에 박신식은 “혹시/서로 열쇠를 바꿔어/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또 반문한다. 그의 반문은 남북한이 서로 갖고 있는 열쇠를 바꾸면 쉽게 열 수 있는 해결법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열쇠를 바꾼다는 것은 대립된 이념이나 민족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제반 사항뿐 아니라 긴장으로 대치하면서 소모되는 국가적 손실까지도 상호간에 바꿔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곧 박신식의 「휴전선」은 아무리 많은 분단의 시간이 흘러도 한번쯤 서로의 처지를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방법으로 분단문제의 현안을 모색해 보면 꼭 닫힌 휴전선 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는 동시이다. 그 같은 분단상황에 대한 모색을 김정은 ‘한 몸’ 의식으로 제시한다.

우리 나라는 3·8선만
그어졌을 뿐
한 몸이지

빨간 동그라미 파란 동그라미
반쪽끼리 만나 껴안아야
태극기가 되는 거지

네가 반 웃고
네가 반 웃어야
진짜 웃음 되는 거지

주먹 푼 너의 왼손
주먹 푼 나의 오른손
마주 잡아야 통일이 되는 거지

개멋 부리려고 허리 쫄라맨
3·8선 댕기 풀어 내야
한라에서 백두까지 맥 뛰는 거지.
― 김정의「배꼽 친구」전문 (『아동문예』1995, 8)

김정의 「배꼽 친구」는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의식에서 시상이 출발한다. 남북한이 원래 ‘하나’이면서도 ‘완전한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는 ‘개멋’ 부린 ‘3·8선 댕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적 인식은 3·8선이야말로 ‘개멋’ 부린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빨간 동그라미 파란 동그라미 반쪽끼리 만나 껴안아야 비로소 완전한 태극기가 되듯, 한반도의 허리에 쫄라매어 있는 ‘3·8선 댕기’를 풀어야 민족의 맥이 제대로 뛰며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김정의 「배꼽 친구」는 남한과 북한은 ‘한 몸’에서 태어난 ‘배꼽 친구’이기 때문에 서로 절반씩 웃어야 진짜 웃음이 되고,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 잡아야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김정의 시적 상상의 근저에는 결국 남한과 북한은 ‘한 몸’이어서 반세기란 시간이 지났다 할지라도 다시 그 나누어진 둘이 서로 손을 맞잡는 순간 민족의 맥이 제대로 뛰고 새롭게 살아나 진정한 ‘배꼽 친구’가 된다는 천진한 일원론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90년대 시적 상상은 이렇듯 반세기란 시간의 무게로 쌓은 남북한 감정의 골도 진정한 화합의 순간에 메워진다는 「배꼽 친구」에서 보여주듯, 남북한이 ‘완전한 하나’ 되기를 갈망하는 분단극복의 희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2) 냉철한 역사의식과 시대적 고뇌
90년대 분단문제를 다룬 또 하나의 시적 특성은 분단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다. 그것은 냉철한 역사의식과 시대적 고뇌에 기초한다.

6월이 다 끝나가는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 바른생활
‘통일의 길’ 시간

꼬마들이 선생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북한은 우리 나라 아니지요?”
“선생님, 정말 북한 사람도 한복 입고 우리 말을 해요?”
“선생님, 북한 땅에 왜 못가요?”
“선생님, 누가 휴전선을 만들었어요?”
“선생님, 왜 철조망을 쳤어요?”
“선생님, 철조망 끊어버리면 되잖아요?”

한 가지 설명하면 또 한 가지 묻고
텔레비전에서 보고
잘 알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묻는
우리 철부지 꼬마들의
천진하고도 엉뚱한 질문.
― 권오삼의「통일의 길」1∼3연 (『아침햇살』1998, 겨울)

오늘날의 우리 아이들은 북한이 아득히 먼 전설의 땅도 아니고 아주 남의 나라로 인식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갈 수 없는 곳이란 분단 이데올로기의 미망과 그렇게 살아온 반세기란 시간의 양이 그들에게 북한을 아예 미망의 나라로 안착시킨 결과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통일의 길’이라는 덕목은 올바른 대북관을 심어주는 계기이기 전에 우선은 북한을 아득히 먼 미망의 나라로부터 현실에 현현시키는 도정에 위치한다. 초등학교 2학년 바른생활의 ‘통일의 길’ 시간은 어린 아이들에게 북한을 미망의 나라로부터 우리 나라의 일부라는 실제를 복원시키는 초입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권오삼의 「통일의 길」은 바로 아이들에게 북한을 미망의 나라로부터 실제에 현현시키는 궁극이 ‘통일의 길’밖에 없다는 확고한 일념을 제기한 동시이다. 그러한 그의 일념은 아이들의 ‘엉뚱한 질문’ 속에 내장되어 있다. 이 일관되게 아이들의 엉뚱한 질문을 아무런 해명 없이 나열한 것은 곧 북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통일의 길’밖에 없다는 시인의 일념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 연에 오면, 아이들의 엉뚱한 질문에 “절로 답답해지”는 선생님이 무대응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 마지막 연의 “얘들아! 믿어다오/이런 시간이 없어도 될 날/언젠가는 꼭 오리라는 것을”이라는 구절에서 시인의 통일에 대한 일념을 드러내게 된다. 남북통일이 되면 이 같은 철부지 아이들에게 북한이 미망의 나라로부터 실제 우리 나라로 현실화되어 ‘엉뚱한 질문’은 자연히 해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의 길」에서 나열된 아이들의 천진한 질문을 통해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질문이 엉뚱하면 엉뚱할수록 분단상황이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일 터이고, 그럴수록 분단은 하루속히 극복되어야 한다는 일념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동시는 이런 시인의 일념이 그저 주관적 근거 위에 정초되고 분단이 무조건 극복되어야 한다는 주관적 지향성만 강조된 문제성이 내포되어 있다. 아이들의 천진한 질문 속에는 충격적인 분단의 상황만 제시되어 있을 뿐 그 질문을 수렴하여 창조적으로 형상화하는 의지나 정당한 분단극복의 대안을 마련해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일념이 주관적 근거와 현상적 경험 위에 정초되어 냉철한 역사의식이나 시대적 고뇌가 용해되기보다 그것을 초월한 결과이다.
우리는 신현득과 박종현에게서 분단에 대한 냉철한 역사의식과 시대적 고뇌의 단면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힘센 놈은 그런 짓 해도 된다.
만세 소리 나는 땅에 삼팔선 긋기.

[…중략…]

남의 나라야 나누어지거나 말거나
한 고을이 두쪽 나거나 말거나
한 마을이 두쪽 나거나 말거나
한 가족 앉은 자리가 나누어지거나 말거나
하나의 학교가 남북으로 쪼개져도
곧게만 그으면 돼.

마당 끝으로 경계선이 지나고
장독대 복판으로도
외양간서 쉬던
송아지 등때기 위로도
경계선이 그어졌다.

전쟁이 되거나 말거나
몇 백만, 쓰러져 죽거나 말거나
피로 강물이 되거나 말거나
전쟁고아 수십만이 생기거나 말거나다.
― 신현득의「삼팔선 긋기」일부 (『시와 동화』1997, 가을)

이 동시에는 ‘45년 어느날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강대국에 의해 해방의 기쁨과 함께 분단의 비극을 강요당한 이야기라는 뜻일 것이다. 곧 분단이 우리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근원론적 접근을 통한 냉철한 역사의식으로 ‘삼팔선 긋기’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김재수의 「휴전선에서」(『아동문예』1995, 12)도 “힘 센 나라끼리/엮어 논 철조망”이라고 분단에 대한 역사의식을 만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김재수는 분단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감상적으로 대체하고 있을 뿐이다. 신현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단이 외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이 민족의 족쇄가 되어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원인론적 비극을 비장한 목소리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45년 어느날 한반도는 강대국의 이권쟁탈로 북위 38도선을 기준하여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강대국의 한반도 ‘삼팔선 긋기’의 강행은 “남의 나라야 나누어지거나 말거나/한 고을이 두쪽으로 나누어지거나 말거나” 그야말로 횡포 그 자체이다. 그런 남의 나라의 형편에는 염두에 없는 강대국의 횡포에 대해 신현득은 “한 가족이 앉은 자리가 나누어지거나 말거나/하나의 학교가 남북으로 쪼개져도/곧게만 그으면 돼/라고 항변한다. 그의 항변은 반복법에 의해 곧 울분으로 변하고, 또다시 ”몇 백만, 쓰러져 죽거나 말거나“ ”전쟁고아가 수십만이 생기거나 말거나“ 점층적으로 이어져 분노로 바뀐다. 강대국의 이권쟁탈이 만들어낸 ‘삼팔선 긋기’는 급기야 민족 동란으로 이어지게 했고, 그로 인해 ‘수십만 전쟁고아’가 발생한 엄청난 민족적 재난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분노이다. 이 동시에서 그의 항변은 울분이 되고 다시 분노로 변이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이행시켜주는 중요한 시어는 ‘되거나 말거나’라는 서술어이다. 이 서술어 속에는 ‘함부로 막’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거기에는 평화롭게 쉬고 있는 외양간의 송아지에게까지 함부로 막 강대국의 저의에 의해 고통을 주었다는 시적 화자의 폭팔하는 분노를 읽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우리 삶의 안일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던 강대국의 저의를 ‘되거나 말거나’라는 서술어가 담당한 시적 역할이다. 90년대 이전까지 ‘삼팔선’에 대해 감상적이고 소극적인 감정을 시화하던 우리 동시문학에 신현득은 분단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과 주체적인 목소리 찾기를 통해 분단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 당당한 목소리는 냉철한 역사의식에서 생성된 시정신인 것이다. 분단극복 의지는 분단에 대한 이러한 시정신을 선행조건으로 역사되는 것이다. 분단모순의 근원을 바르게 해명하는 일은 분단극복으로 가는 길의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바른 대응 없이는 우리 동시문학이 분단문제에 대해 관념화와 감상성으로부터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신현득의 「통일이 되는 날의 교실」연작동시는 이러한 분단현실에 대한 냉철한 역사의식 위에 기초된 성과물인 셈이다. 대신 박종현에게서는 시대 현실에 대한 시인의 깊은 고뇌의 단면을 만날 수 있다.

요즘 텔레비전은
무너진 장벽 위의
독일 인을 비춰 주고
자유의 깃발 든
루마니아인을 비춰 준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시 한 줄 없는 신문으로
독서를 하느라고
청탁을 받고도
시를 쓰지 못한다.

[…중략…]

휴전선의 철조망이 걷히면
내 시는 돌아올 수 있을까?
시 한 줄 없는 신문에서
시를 찾을 수 있을까?
― 박종현의「내 시는 어디 갔을까」2∼3연 (『굴렁쇠』1990, 2)

90년대 벽두부터 동구라파는 이념의 혁명을 이룩해냈다. 냉전체제의 응집적 산물인 이데올로기란 미망의 벽을 허물고 동서 화해의 길로 나섰다. 박종현의 ‘내 시 찾기’의 시적 고뇌는 90년대를 전후로 한 세계질서 재편에 대한 시대성과 직접 관련된다. 세계질서 재편 과정 속에서도 우리만은 유독 적대적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오로지 분단체제란 관성의 틀에 갇혀 있는 그 규정력에 대한 시대적 고뇌인 것이다. 바로 박종현은 ‘내 시는 어디 갔을까’라는 자신의 시 찾기로 대응한 셈이다. 「내 시는 어디 갔을까」의 시적 화자는 시 쓰는 일보다 독일의 무너진 장벽과 자유의 깃발을 든 루마니아인들에 대한 관심에 쏠려 있다. 이미 시는 그의 “가슴에서 떠나 버”리고 말았고, 그렇게 떠나 버린 ”시를 찾기“ 위한 노력보다 이데올로기의 혁명을 이끌어 낸 타민족에 모든 관심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밤에 잠들지 못하고 신문에 실린 타민족의 자랑스런 기사거리를 읽느라 청탁받은 시도 쓰지 못하고 깊은 고뇌에 빠져든 것이다. 시인이 동시 쓰는 일보다 이런 시대적 고뇌에 더 깊이 빠져버렸음을 토로하고 있는 「내 시는 어디 갔을까」는 90년대 분단문제의 고뇌를 되새기게 하는 동시문학의 한 성과물인 것이다.
90년대 시사성을 시화한 동시로 조명제의「소」 (『다시 부르는 노래』아동문예사, 1998), 송년식의 「하느님이 금강산을 만든 이유」(『아침햇살』1998. 겨울) 등을 더 들 수 있다. 이들의 동시는 남한 기업인이 남북경협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낸 성과물을 시적 제재로 한 작품으로 남북한 교류와 화해의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는 민족 염원을 담고 있다. 대결과 반목으로 점철된 분단 반세기만에 이룩한 소중한 타협의 결과가 결실 맺기를 바라는 희원이 내장되어 있다.

3) 용서와 관용, 그 시심의 아름다움
분단문제를 다룬 90년대 동시문학의 또 다른 시적 특성은 용서와 관용의 시정신이다. 분단극복은 보다 참다운 상황인식과 냉철한 역사의식이 바탕이 된 관용으로부터 비롯되기 마련이다. 반세기 분단의 모순이 계속 이어진 시간의 무게를 벗는 일은 용서와 관용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용서와 관용은 마음의 평온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슬픈 일일수록
새들은 빨리 용서할 줄 안다.

[…중략…]

지난 일을 잊기 위해
새들은 소총 소리 들리는
숲을 찿아와

거기에다
편안한 집을 짓는다.

지뢰가 흩어진 숲속을
우리보다 더 먼저 찾아와
탄탄하게 집을 짓고
따스한 알을 낳는다.
― 권영상의「비무장지대2」전문 (『아동문학연구』1991, 가을)

동시의 참다운 시정신은 진심으로 발휘되는 용서의 아름다움에 내장되어 있다. 순수하고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힘도 용서의 마음에서 생성되는 아름다움이다. 권영상의 「비무장지대2」는 인간이 일으킨 전쟁의 참혹성을 자연의 순수성으로 정화시키고 회복하는 용서의 속성을 내밀히 함축하고 있다. 비무장지대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가장 예민한 긴장의 지대이다. 권영상은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그 곳에 가장 순수한 생명이 ‘탄탄한 집’을 짓고, ‘따스한 알’을 낳고 살아간다는 아주 자연스럽고 평범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은 ‘용서’라고 함축한다. 이 용서라는 시어 속에는 우리 인간이 분단체제를 규정하고 강화시켜온 외부적 규정력을 무화시키는 탈냉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인간이 규정지어 전운을 감돌게 하는 팽팽한 긴장의 지대인 비무장지대에서도 순수한 새들이 지난날의 참혹한 전쟁을 잊고 ‘편안한 집’을 짓고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 만들어 강화해온 그 규정력의 해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곧 권영상의 용서는 분단의 아픔을 자연의 순수성으로 회복하고 평정을 찾아가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이렇듯 자연의 순수성과 용서의 아름다움은 분단의 아픔을 침잠시키는 힘이 되고, 다시 그 힘은 분단극복의 의지를 부유시킨다. 이 동시의 담긴 시정신은 이러한 자연의 순수성을 통한 인간의 정화와 탈냉전시대의 도래를 꿈꾸는 그 꿈의 아름다움에 있다. 권영상의 「비무장지대2」는 비로소 우리에게 분단문제를 수렴하는 태도를 상기시킨다.

철조망 속엔
가시가 돋혀 있었습니다.

‘다칠라…….’
모두다 인상을 쓰며
그 앞을 지나쳤습니다.

철조망은
외로웠습니다.

어느 따스한 봄날
조그맣고 여린 손이
철조망을 꼬옥 붙잡았습니다.

나팔꽃
덩굴손이었습니다.

“넌 내가 무섭지 않니?”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일어설 수 없었어요.”

철조망은
다른 손도 내밀었습니다.
― 김숙분의「철조망과 나팔꽃」전문 (『산의 향기』아동문예사, 1998)

김숙분의 「철조망과 나팔꽃」은 분단문제를 직접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분단극복을 시사하는 동시이다. 그것은 분단문제를 수렴하는 진정한 태도에서이다. 여기서 철조망은 남북을 가로막는 분단의 철조망일 수도 있고 분단과 무관한 단지 울타리로 쳐 놓은 철조망일 수도 있다. 철조망에는 가시가 돋혀 있다. 가시 돋힌 철조망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의도적인 방어물이다. 그런 철저망은 어떤 목적을 위해 설치한 자 이외의 모두 생명체에게는 흉물스런 물체나 흉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동시는 가까이 하기에 자연히 꺼려지는 철조망과 그의 도움이라도 필요했던 어린 나팔꽃의 관계를 감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전혀 조화될 수 없을 것 같은 철조망과 나팔꽃의 관계가 아름답게 형상화된 것은 바로 관용과 화합의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감동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상대방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킨 데서 오는 감동인 것이다. 이 동시는 남의 단점을 장점으로 상승시켜 수렴하는 태도에서 세심한 시심의 아름다움과 그 깊이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이제 비로소 우리의 분단문제를 극복하는 정신은 이 「철조망과 나팔꽃」과 같은 관용과 화합의 정신임을 알게 한다. 이런 ‘철조망과 나팔꽃’ 같은 관계가 진정한 남북한의 관계교류라는 것임을 이 동시는 함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숙분의 「철조망과 나팔꽃」은 참다운 분단의 상황의식을 창의적으로 제시한 좋은 동시이다. 결국 이 동시는 분단시대를 극복하는 소중한 시정신을 담고 있고 또 소재중심적 한계를 벗어났다 점에서 분단문제를 다룬 동시문학에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4. 통일시대와 동시문학의 과제

무엇보다 갈 수 없는 땅이란 분단 이데올로기의 미망과 그렇게 살아온 반세기란 시간의 깊이가 오늘날 우리 아이들에게 북한을 아득히 먼 전설의 땅도 아니고 아주 남의 나라로 인식하는 시대를 살게 하고 있다. 해방 이후 우리가 살아온 이 시대를 분단시대로 규정지을 만큼, 그것은 불가피한 사회적 현상일 것이다. 이런 우리 아이들에게 분단의 문제는 어떠한 문학적 재제보다 중차대한 과제임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분단시대를 살아온 반세기, 동시문학이 분단문제에 대해서 미온적 대응과 열악한 문학성을 드러내었던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분단문제에서 제 모순을 간과한 나머지 소재중심에 머물렀고, 휴전선·비무장지대·갈 수 없는 곳 등으로 규정화된 공간성과 시간성 속에 묶여 단지 이산의 아픔과 통일에의 염원 등으로 축소시켰던 결과이다.
우리 민족은 이미 분단된 지 반세기가 넘어선 시간을 살았고, 이제 그 모순으로 분철된 한 세기를 마감하는 공간에 서있다. 이렇듯 앞으로 새로운 세기를 맞는 시점에서 우리를 다시 되돌아본다는 것은 지난날의 문제성 극복을 염두에 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문단문제를 다룬 동시의 면모를 개략적으로 검토해 보는 일도 결국은 분단문제에 관한 문학적 상황을 재인식하고,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열린 노력의 하나라는 점이다. 곧 우리 동시문학이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과정의 역할을 감당하는 문학이어야 한다는 데에 있게 된다. 그것은 우리 동시문학이 반세기에 걸친 분단의 세월이 침윤시킨 이질적 앙금의 벽을 허물고, 진정한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현실적인 방안들을 모색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비근한 예로,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야, 이 북한놈아’라는 말이 욕설로 쓰인다고 한다. TV에서 본 굶어 죽어 가는 북한 아이들을 떠올려 만들어진 욕설이다. 이러한 현시는 북한을 멸시하고 북한에 대한 잘못된 우월감에서 비롯된 또 다른 분단모순의 일종이다.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동시문학은 분단의 제 모순을 동심으로 정화시키는 관용과 화합의 아름다운 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도래할 통일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동시문학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과제 실현이 요청된다.
첫째는 동시문학이 소재중심이나 분단의 상황성에 얽매인 규정적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분단문제라 하면 으레 떠오르는 분단현장의 상징적 제재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분단의 상징물들은 우리를 분단의 모순 속으로 다시 몰아넣을 수밖에 없고, 그런 분단문제는 감동과 심미적 가치를 상대적으로 경시하게 된다. 감동과 심미적 가치가 상실된 동시문학은 이미 동심의 문학으로써 그 의미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인의 시정신의 규정도 바로 여기에 몰입된 결과이다. 동시문학은 올바른 역사의식과 참다운 상황인식으로 분단의 원인으로부터 통일의 저해요소에 이르는 전과정을 포괄하는, 시적 제재를 확장하고 다양화하여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시정신을 창출해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막연한 통일에의 염원과 낭만적 환희, 또는 북한사회와 분단현실에 대한 신경증적인 의식을 버려야 한다. 신경증(neurosis)이란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실제 이상의 증폭된 감정을 갖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 사회가 6·25의 참혹한 동족상잔의 경험과 그 이후 고착화된 분단, 그로 인한 북한과 남한사회의 제 모순, 남북한 물리적 대치 상황과 유착된 긴장 관계,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요원한 염원, 북한이 보여온 이중적 현시에 대한 불신감 등에 증폭된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신경증적 반응은 시정신을 강제하고 시적 상상력을 제약하는 규정력을 갖게 마련이다.
세째는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에 대한 애정적 접근과 환경·생태적 문제의 깊이까지 시정신을 확장시켜야 한다. 사회주의 제제가 붕괴되면서 가장 먼저 문제로 떠오르는 현상은 환경오염이었다. ‘시베리아의 진주’로 일컬어지던 바이칼호에 물고기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은 사회주의 주종국이었던 소련의 환경문제를 대변하는 증거이다. 독일도 통일 이후 동독지역의 오염을 서독 수준으로 정화하기 위하여 2천년까지 2,000억마르크(140조원)를 투입해야 한다고 하며, 현재 환경오염 피해로 구동독지역은 매년 국민 소득의 약 10%인 300억마르크의 손실을 보고 있다고 한다. 북한도 독일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환경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북한은 군수산업·중화학공업 중심의 공해 다량성 배출 산업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낡은 생산시설과 저급 갈탄이 주에너지원이어서 공해 발생은 불가피한 일이다. 거기에다 식량부족으로 ‘다락밭 개간’이나 ‘새땅찾기운동’을 벌리며 산림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그 산림 황폐화로 인해 토사 유실이 초래되고, 하상에 토사가 퇴적되어 빈번한 범람이 일어나 농업 생산량은 갈수록 감소되고, 경제활동도 침체되는 악순환 현상이 일어났다. 또 기상이변 등 연속적인 자연 재해로 농업생산 기반이 붕괴되고, 비료·농약·석유 등 원자재난까지 겹쳐 식량난 사태를 불러온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북한의 식량난은 이러한 환경 구조가 가속화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환경문제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원칙이 철저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앙상한 몸집에 눈만 왕방울 만한 아이의 힘없는 얼굴이 테레비전 화면에 비친 적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가족 간의 유대마저 무너뜨린다는 북한의 식량난의 한 단면인 셈이다. 북한은 1997년 새해 신년사 공동사설에서 ‘풀죽’을 인정하며, 마침내 숨겨온 기아의 장막을 걷고 식량난을 세상에 알렸다. 그해 3월 북한의 식량난 실태상황을 파악한 세계식량계획(WFP)의 캐서린 버티니 사무국장은 북한의 식량지원이 늦어질 경우 대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호소했다. 2백40만명에 이르는 만 6세 이하 북한 어린이의 대부분이 영향실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성장기의 영향실조는 신체는 물론 두뇌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는 증후이다. 어느 사회나 기근상태에 직면하게 되면 그 피해는 우선적으로 힘이 없는 계층에 닥치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은 늘 취약한 상태에 놓인 형편이다. 온 나라 안이 북한의 굶주린 참상을 공개할 때에도 우리 동시문학은 그 문제성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북한의 환경·생태적 문제와 굶주린 아이들에 대한 문제는 다름 아닌 직접적인 우리의 문제이다. 그것은 언제 도래할지 모를 통일시대에 가장 중대한 과제로 떠오를 것이고, 또 그때 우리가 떠맡아야 할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동시문학에서의 민족동질성 회복은 먼저 북한 어린이에 대한 따뜻한 동포애 정신을 발휘하는 일에서 비롯될 것이다. 북한의 환경·생태적 문제와 굶주린 아이들의 문제를 우리 동시문학이 애정적으로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분단시대를 살고 있다. 분단시대라는 것은 분단현실이 안고 있는 모든 모순을 통괄한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세기를 맞아 도래할 통일시대를 예비하며 적대적 북한관에서 포용적 북한관으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동시문학도 여기에 합당한 통일을 준비하는 문학관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재상의 특이성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감동이 살아 있는 동시 창작에 몰입해야 할 일이다. 분단극복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제에서 창의적인 상상력과 시적 감동이 유실된다면 그것은 한낱 쓸모 없는 감상이나 허전한 염원에 그치고 말뿐이다. 동심의 정서는 이데올로기의 미망 이전의 본성으로 되돌리는 강한 향수를 유발한다. 이 정서는 민족의 정서로 승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 가능성으로 통일시대를 예비한다는 것은 우리 동시문학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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