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조문학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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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5-22 10:15
소나무처럼, 바다처럼
 글쓴이 : 이해인
조회 : 3,021  




◆ 소나무처럼, 바다처럼 ◆ 
 - 법정 스님께

   스님, 안녕하신지요?
   "다닥다닥 꽃눈 붙은 나뭇가지를/ 길상사 스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토근하면서 무심히 화병에 꽂았더니 길상사가 진달래로 피어났습니다." 늘 밝고 고운 동심으로 한 세상을 살다 간 정채봉 님의 '길상사'라는 시를 잔디밭에 앉아 읽었습니다. 늘 스님께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각별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스님을 대상으로 서간체의 글을 쓰곤 했던 정채봉 님의 흉내를 내고 있는 저를 오늘은 나무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 수녀원에 스님을 모시고 왔던 그분이 안 계시니 요즘은 스님을 뵙기가 힘들어 서운해요. 얼마 전 제가 스님께 향기 나는 우표와 시를 보내니 강원도 산바람 소리가 들리는 글을 보내 주시어 기뻤습니다.

   숲 속의 나무들이 일제히 초록빛 기침을 하는 이 눈부신 계절엔 마음도 항상 초록빛으로 깨어납니다. 사계절 내내 늘 푸른 소나무에서는 한결같은 평상심을, 같은 것 같으면서도 매일 다른 빛깔을 내는 바다에서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감동을 잃지 않는 출렁임을 새롭게 배우며 살아갑니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일과를 반복하는 수도자의 일상을 보고 사람들은 '삶이 지루하지 않으세요?' '무슨 재미로 사시지요?' 하는 질문을 자주 하지만 저는 나름대로 마음의 차림표를 정해놓고 재미있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즐거움을 만들어 가렵니다. 새들이 산책하는 언덕길, 침묵 속의 복도, 오래된 성당,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동료들을 바라보다 문득 눈물이 핑 도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오랜 수도 연륜이 빚어낸 내적인 고요와 지혜, 담백한 평화는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요!

   소임상의 사소한 일들도 마지못한 '의무'보다는 '사랑'을 넣어서 기쁘게 하는 마음을 키우다 보면 하루하루가 작은 축제로 피어남을 체험하곤 합니다. 가끔 한밤중에 스스로의 기침소리에 잠이 깨어 개울물 소리를 들으신다는 스님. 스님께서는 질서와 절제를 산 속에서 '홀로' 지키며 사시고, 저는 공동체의 수도규칙과 날질서를 바닷가 수녀원에서 '함께' 지키며 산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종종 '바늘 치명' 이란 말이 실감날 만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남모르게 살짝 인내할 일이 많은 편이고, 그래서 성격이 밝고 시원해야 행복한 수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저도 버스나 전철에서 노약자 석에 앉아도 덜 미안한 나이가 되었어요'하는 구절에 대해 스님은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수도자는 육신의 나이를 돌아볼 것이 없다'고 하셨지요. 저희는 요즘 첫 서원 후 10년 단위로 재 교육을 받는데 저도 곧 솔뫼에 가서 33명의 수녀들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답니다. 수련 시절의 옛이야기도 나누며 생활 속의 영성을 배울 그 시간이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스님의 '산방한담'을 읽기 위해 <샘터>를 즐겨 읽던 많은 독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제가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불일암에 보낸 인연으로 오늘에 이른 지 벌써 30년 가까이 되었군요. 스님께선 요즘 어떤 책을 읽으시는지요? 저는 요즘 시를 쓰기보다는 읽는 일을 더 많이 하고 가끔은 좋은 책을 번역하면서 공부하는 기쁨을 누린답니다. 번역 일은 늘 인내심을 키워주어 좋아요. 제 수도 여정에서 스님의 격려와 충고가 을 힘이 돼 주었음을 다시 감사드립니다. 소나무처럼 늘 똑같이, 바다처럼 늘 새롭게 자신을 길들이면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선물방' '작은 우체국'이라는 별칭이 잘 어울리는 저의 작업실에도 스님의 글씨가 걸려 있는 것 알고 계시지요? 스님께서 흉보시는 저의 '구름체 글씨'는 고쳐 보려는데 잘 안되어 걱정입니다. 언제 부산에 오시면 우리 집에도 한번 들려주셔요. 제가 여기서 스님을 뵈면 여행길에서 구한 '보석보다 아름다운' 조약돌을 몇 개 드리려고 합니다. 기대하세요! 그땐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를 거닐며 이 동시를 읊어드리려도 합니다.

'수천 년을 갈고 닦고도 조약돌은 아직도 물 속에 있다/ 아직도 조약돌은 스스로가 부족해서/ 물 속에서 몸을 씻고 있다/ 스스로를 닦고 있다.'
-이무일의 동시 '조약돌'-

내내 청안하시길 비오며 광안리 식구들의 초록빛 인사도 함께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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