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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5-19 01:40
눈을 감고 가는 길
 글쓴이 : 정채봉
조회 : 3,089  
★ 참 맑다 ★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크레파스 가운데 가장 쓰여지지 않았던 색을 들라면 누구나 하얀색을 들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이 이의 크레파스 통에서는 반대로 하얀색이 가장 먼저 닳아져 없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진다. 이 이의 시는 달빛 같은 하얀색으로 그려 놓은 그림을 보는 듯한 시이기 때문이다.

이 이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늦가을 밤이었다. 자정무렵에 도착해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이내 왔던 길을 되짚어서 당진으로 떠났다. 배웅하고자 하늘을 보니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초승달이 그를 내내 따르려니 생각하고 집에 들어와 놓고 간 원고를 펼쳤다.

매일 밤 그는 긴 편지를 써서 불꺼진 내 창가에 놓고 간다
어떤 날은 깨어 있다가 그의 편지를 받기도 한다
오늘도 그는 뜰 앞의 높은 잣나무 가지에 턱을 괴고
조용히 내 창가를 바라보며
편지를 쓰고 있다
방에 불을 켜고는 그의 편지를 읽을 수 없다
뜨락에 숨어 사는 귀뚜라미들도 그의 편지를 받았는지
소리 높여 저마다의 목소리로
그것을 나에게 읽어 주고 있는데
나는 편지 속에 담긴 그의 조용한 목소리를
아무에게도 전해 줄 수 없다
이 세상 누구로부터도 받을 수 없는 황홀한 연애편지를
날마다 그에게서 받으며
이렇게 살고 있다
- 달빛 편지

이 얼마나 은은한가. 새하얀 은박지에 봉숭아꽃물 든 약지 손톱으로 그려 놓은 무색(無色)의 세상이 아닌가.
'방에 불을 켜고는 읽을 수 없는 편지.' 빨강을 비롯한 저 아우성치는, 아니 괴성을 지르는 유채색 편에서 본다면 적막하기 그지없는 달빛을 황홀히 연모하는 이 이가 도리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는 당당히 고백한다. '이렇게 살고 있노라'고, 이는 어쩌면 '괄구월 신작로 길 양옆을 가득 메운 코스모스'와 '오뉴월 한참 물기가 오른 냇가의 버드나무나 보리대궁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던 유년의 고향 빽 덕분일지도 모른다.

물이 맑으면 아무리 깊을 강 속도 훤히 보인다.
이 이는 너무 맑다. 시의 내장까지도 훤히 보인다.
이 이는 그의 시가 '새벽 첫 우물물'이기를 바라고 '석양보다 더 붉은 참회'이기를 바람다. 그러나 어느 신인들처럼 시의 단순 생산자이기를 거부한다. '시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구하며 절대자를 만나는 가교로서 시에 의지한다고 그의 시'시인의 기도'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단히 외람된 말씀이지만 퍼내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시샘(詩泉)이 그의 가슴 한가운데 있음을 이 이의 시를 읽은 분들 또한 나처럼 눈치챘으리라 믿는다. 억지로 쓰려고 해서 된 시가 아니라 물이 퐁퐁퐁 솟아나는 듯 시가 절로 하얀 눈 위의 사슴 발자국처럼 찍혀져 있지 않은가.

그의 가슴이 움직이면 모두 시를 담아 내오는 것이다. 산에서, 노을에서, 돌에서, 풀에서 이슬 한 방울 별빛 한 실금 스친 사실이 이 이의 영혼에 이르면 절대자로의 그리움이 되는 것이다.

가을 산행길에서 절로 영글어 떨어진 밤 한 톨 줍다.
만지작거리다 꽉 깨무는 순간 밤벌레 한 마리 고개를 쏙 내민다. 나도 깜짝 놀랐지만 그 녀석은 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이다.

나는 하마터면 그 녀석의 징그러운 몸뚱이를 깨물 뻔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녀석을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세상 전체가 갑자기 두 쪽이 나고 생명까지 두 동강날 뻔한 일생일대의 엄청난 사태의 발생에 놀랐다.

아, 누가 있어 어두운 밤 속에 있는 나의 이 집도 흔들어 깨물어 줄 것인가? 그 앞에 나도 이 추한 몸뚱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

자기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박살나면서 나타난 시리도록 푸른 하늘, 그 하늘을 보면서 밤벌레는 죽었다.

나도 그처럼 죽고 싶다. 단 한 번만 그 하늘을 볼 수 있다면 굳이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지 않아도 그냥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다.

- 가을 산행길에서

이는 한 바리 밤 벌레에서 깨우친 천지개벽이 아닌가. 그런가 하면 이 이는 가끔씩 하루살이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다가 하아얀 제대포 위에 날아든 베짱이의 작은 눈에서 '수천 억의 모래알이 빛나는 밤하늘을 우러러보는 황망스러움(미사일기 2)'의 내밀한 신비를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입선(入禪)의 경지에 든 이 이의 시에서 허심(虛心)의 청복(淸福)을 나누어 가는 이 많으리라 믿는다.

밟은 이 있어도 발자국 없고
죽지 않고는 오를 수 없고 오르지 않고는 살지 못할
마음속에 아득한 산 하나
- '山'에서

그 산에 나도 하찮을망정 내 꽃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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