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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6-17 19:24
 조회 :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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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선의 시조집 『멀리서 가까이서』
생각의 다채로운 무늬
김 준(본지 발행인)
1.
홍병선 시인의 작품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그의 관심이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현장 바로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마다에 있고, 그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자아에 대한 성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바쁜 일상에 쫓겨 지나쳐버리거나, 혹은 무관심으로 생각조차 꺼려할 일들을 놓치지 않고 곱씹어 보는 시인의 지칠 줄 모르는 활력이 부럽기도 하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심의 넓은 폭만큼이나 그가 만들어내는 시의 형태 또한 다양하여 이 시집을 통해 톡자들은 현대시조에서 현대시에 이르기까지 두루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2.
현실에 대한 그의 시각은 우선 비판적이다.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가 하면 (<조간 신문을 펼치며>, <종군위안부>등), 언론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유리그릇 같이
맑은 개울물에
송사리 떼가 놀고 있는 곳
인적이 드문 시골 개천을
TV가 추적하여 방송한다.
지극히 당연해야 할
정상적인 것을 들추어
신기하고도
별나게 떠드는 세상
대단한 것을 보여주는 듯
흥분하면서
감격하는 아나운서
환상적인 눈빛
향수를 유도하고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곳으로 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또다시 오염이 될 것이다.
-<뉴스의 촛점> 전문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언론을 접하며 살아간다.
그 언론은 현실에서 일어나는사건들, 특히 인간에게 해를 끼치거나 인간을 위협하는 사건들에 주목하고 그것을 파헤쳐 바로잡는 데에 기여하는 순효과의 기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위의 작품에서 말하고 있듯이 언론은 순효과만이 아니라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시인은 그것을 파악하고 언론에 대한 우려의 심정을 피력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 감격스러운 현상인 양 보도 되고, 그 보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 보도는 역효과를 낳고 만다.
그런데 시인이 이와 같이 비판의 고삐를 힘껏 틀어쥐는 경우는 주로 자연환경이 파괴될 때이다. '인적이 드문' '맑은 개울'은 곧 TV를 보고 몰려간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고 황폐해질 것임을 걱정하는 시인의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관광지가 되어 장사꾼과 쓰레기로 가득차버린 청학동을 돌아보는 길(<청학동 관광>)에서도 그의 걱정어린 비판은 여지없이 발휘된다. 이제 청학동은 사람들이 '신의 영역까지/ 짓밟고 욕심내고 점령해 들어'가 자연이 '재앙으로 맞서고 대들고 있는/ 우울한 현장'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지리산이 '찢기고 헐리며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골짜기마다 토해내는 악취'를 맡고 저주어린 '붉은 눈물'을 본다.
3.
만일 홍병선 시인이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외부 세계에 대한 비판으로만 일관했다면 혹여 독자들 중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 비판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줄 아는 사람이다. 달콤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은 본받을 만한 일이나 때로는 심한 자괴감까지 드러내어 나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시인은 자신을 '먼 옛날에 모두모두/ 다녀간 그 길을/ 뒤늦게 돌아보면서/ 한탄하는(<지각생>)'지각생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가 가면 따라가고/ 그가 오면 따라오고'하다가 어느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들러리(<들러리만 서다가>) 라고 하기도 했다. 또 심지어는 자신의 시작품이 허무한 일회용품(<소모품>)이라고 펌하하기까지 한다.
시인은 끊임없이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려가는 것일까/ 무엇을 위하여 가고 있는가(<새로 난 길을 달리며>)'반문하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 그가 흐르는 세월에 민감해질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 볼 과거의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찰의 깊이와 넓이가 커지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다양한 관심이 연륜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륜이 깊을수록 외곬으로 흐르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아직 활기찬 젊은이 같다. 다만 그가 아쉬운 것은 세월이 '모든 것 쓸어 묻고/ 사라지는 (<오늘은>)' 찰나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괴롭다
생각한 일
세월가니 잊게 되고
잊은 일
생각하면
어디 있다 찾아오네
잊은 건
오고 가는데
돌아오지 않는 세월
-<돌아오지 않는 세월> 전문
위의 시조는 세월의 힘을 빌어 고통의 날들을 지나왔지만 돌아오지 않는 그 세월이 무엇보다 아쉽고 원망스럽다는 심정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철학자 볼테르는 '젊음이 알 수 있다면, 늙음이 할 수 있다면....' 이라고 하였는데, 젊은 날에는 지혜가 부족하고 그 지혜가 채워질 즈음에는 시간이 부족함을 간명하게 잘 나타낸 말이다. 삶의 지혜를 얻은 후 쏜살같이 지난날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비단 홍병선 시인의 일만은 아니며 결국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4.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자아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눈길을 끄는 것은 시인의 순수한 서정이 담긴 시편들이다.
그는 비오는 밤이면 잠 못 이루고 짝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했던 추억에 잠기며(<비오는 밤>), 바람을 의인화하여 스쳐 지나가는 인연을 안타까워한다 (<바람에게>), 또 우연히 마주친 여인이 보내는 미소에 가슴 설레이기도 하고(<어떤 미소>), 환자를 향한 측은지심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병문안 가서>)/
산을 덮은 아지랑이
봄바람은 오락가락
사무치는 그리움에
꽃을 먼저 피워 놓고
온 산을
붉게 적시며
설레이는 진달래꽃
기다림에 지쳤는지
훈풍 만나 떨고 있네
때가 되면
흐드러지게 피울 수 있었는데
서둘러 피워 놓고서
붉은 한을 토해 놓네
-<진달래> 전문
위의 작품을 보면 시인이 이른 봄 서둘러 핀 진달래를 두고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그렇게 서두르게 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나 저제나 임이 오시기를 기다리다가 임이 오실 때가 가까워 오자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 미리 마중을 나온 수줍은 여인을 연상하게 하는 구절들이 진달래를 순정의 꽃으로 여겨지게 한다. 이것은 바로 임을 기다려 본 시인의 경험과 그 순수했던 마음이 진달래에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 째 수에서 이 순정의 여인 진달래는 기다림에 지쳐 가냘픈 몸을 떨고 서 있다고 했는데,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꽃을 피웠더라면 하는 시인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시구들이다.
5.
이제 시인은 낙원으로 회귀를 꿈꾼다. 그 낙원은 바로 어린 시절 뛰놀 던 곳, 외암리. 할머니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동무들과 허물없이 뒹글며 어울리던 곳이다. 불합리하고 비정한 현실을 알기 전, 흐르는 세월에 대한 근심조차 없던 때, 그 시절의 그 곳이 그에겐 낙원이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늘 낙원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잡고 있다.
세월을 베고 누운 외암골의 느티나무
문명마저 외면하고 물레방아 돌리면서
오십리 돌담에 갇혀 꿈만 푸는 전통 마을
중략
전해오던 초가집은 옛날 모습 잃어가고
기와집은 단장한 채 새 모습을 자랑하네
갈등의 세월 달래며 지켜가는 외암마을
-<외암리 마을> 첫째, 넷째 수
아무리 현실이 부조리하고 때로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해도 그가 그것을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이 안락한 낙원 덕분이리라. 그런데 이 외암리 마을이 자꾸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시인은 더욱 마음 속 낙원을 재건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고향이 아닌, 마음의 고향, 점점 각박해져만 가는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시인이 품고 있는 것고 같은 그 마음의 고향인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마음 속 낙원 하나를 두고 산다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아질 것이라 확신한다.
-시조문학 2003. 여름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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