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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6-02 09:27
삶의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꿈
 글쓴이 : 김병희
조회 : 1,889  

◆ 삶의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꿈 ◆
- 여영자 시인의 세계 -
김병희(시조문학 집필전문위원)

1.
같은 시인이라도 여성에게만은 여류라는 칭호를 붙인다. 남성들의 전유물이던 문학의 영역에 감히 발을 내민 여성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때문이든 특별함에 대한 예우로든 어느 틈에 여성문인들에게 따라붙은 말이다. 더구나 시조라는 장르는 고전시가로부터 그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여성을 수용하는 품이 그리 넉넉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름을 드러낸 몇 몇 여류시인과 연관시켜 그 이미지나 작품 세계를 제한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여영자 시인은 이름 석자만으로도 여성의 이미지를 능히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름에도 시대적인 흐름이 있어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시인의 연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혼란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의 역사를 온몸으로 떠받치며 결연히 살아온 우리 어머니의 세대를 연상하면서 여 영자 시인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시는 곧 그 시인의 삶이라는 말에 머리를 끄덕이게 된다. "대한민국의 아줌마는 버스보다도 빠르다"는 한 광고의 문구나 "대한민국의 제3의 성(性), 아줌마"라는 표현들이 아줌마의 여성적 이미지를 폄하하는 듯한 어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는 아줌마라는 용어에 부가되는 이미지에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삶이 할퀴고 간 상처들을 고스란히 끌어안고도 넉넉히 웃을 수 있는 내성과 여유로 무장된 장년의 여성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시작품은 설익은 소녀적 감상과도 다르고, 삶의 외형적 요소들에 무게를 두는 남성적인 시작품과도 달라서 내면데 가라앉아 있던 물이기와 같은 감성의 편린을 자극한다.

어릴 적 고향에 가면 나를 반겨 우는 얼굴
안긴 채 눈은 멀리 그 마음 몰랐는데
잊어도 한참 잊은 뒤에야 그때 생각 왜 날까?

누가 주는 설움 아닌데 북받치는 설움은
아마도 건너온 세상사가 그래도 좋았기에
고만한 눈빛만 보아도 가슴 젖어 내리나 봐.
-<정> 전문-

이 작품은 어릴 적의 기억을 통해 정으로 얽혀진 관계의 소중함을 노래하고 있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오랜만에 한 번씩 보는 혈육을 부둥켜 안고 눈물짓는 어른들의 심사를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하면서도, "눈은 멀리" 딴전을 부리던 천진한 아이의 모습과" 그 때 생각 왜 날까?"라며 의아하면서도 오래 전 추억에 압도되고 있는 성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병치시키고 있다. 1연에서 화자의 의문을 제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다음 2연에서는 화자 스스로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고난과 서러움, 연민과 그리움이 뒤얽힌 세월의 흔적을 어루만지고 있다. 화자는 그동안 건너온 세상사의 모퉁이에서 문득 떠올리며 힘을 얻고 위로 받았던 "고만한 눈빛"에 겨워 가슴이 젖어 내린다.

오래 된 유행가 가사 중에 "...내가 커 부모 되어 알아보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지금은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알 수 없는게 있다. 스무 살에는 스물 살 만큼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더 많이 이해하려면 살아보는수 밖에 없다. 체험을 통해서만 살갗에서 우러나오는 감각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뇌리에 잠재해 있던 애정 어린 눈물과 포옹의 기억이 세월의 마디마디에서 서럽도로고 따뜻하게 솟구쳐 오르는 장면을 이 작품에서 목격하게 된다. 이제는 세월의 부대낌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앉아 여유롭게 삶을 돌아보는 품이 넉넉한 아줌마의 정취가 한껏 배어있는 작품이다.


2.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아줌마 시인이라는 표현에 여 영자 시인이 호응해 줄지 한편으로는 주저되는 마음도 없지 않다. 다음의 시조에서 시인은 삶의 누더기를 단숨에 떨쳐버리고 초월적 심상을 드러낸다.

물빛은 늘 흘러도
푸르게만 잠기는데

세월은 한 세월
멈출 줄을 모르는가

내 마음
천년의 바다
노를 젓는 푸른 별
-<독백> 전문-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는 노 저어 오오......" 학창시절 가슴에 아로새긴며 듣고 또 듣고 하던 노래 가사다. 시에 곡조를 붙인 가곡이라서 그런지 노래 마디마디가 절절하게 와 닿는 이미지가 명쾌하게 전달되는 명곡이라고 생각해 왔다. 여 영자 시인은 고백한다. 내 마음은 천년의 바다를 유영하는 푸른 별이라고."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라고 할때, 화자의 위치나 심경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양태를 띈다. 여기서는 그대라는 존재가 적극적인 객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 영자 시인의 <독백>에서 시적 화자는 내 마음이'천년의 바다'가 아니라, 그 바다에서 '노를 젓는 푸른 별'이라고 노래한다. 천 년의 바다가 가지는 영원성과 거대함에 비하면 별의 이미지는 유한함과 극단적인 왜소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어린 시절 애절한 멜로디에 가슴 떨었던 <반달>이라는 노래의 이미지와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돗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푸른 하늘 은하수 사이로 표표히 흘러가는 반달과 여 영자 시인의 푸른 별은 그 이미지에서 등가를 이룬다. 인간 삶이란 망망대해에서 한낱 노가 일으키는 물살에 일희일비하며 바람에 등을 떠밀리는, 반달보다도 작고 흔한 별 하나의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달관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여 영자 시인의 달관은, 그러나 오만하거나 도도하지 않다. 소박하면서도 생명력이 4강한 대상을 통해 전달되는 관조적인 자세 때문에 시조 작품이 관념적으로 치닫지 않고 친근감을 자아낸다.

열 손끝 다 닳도록
쓸고 쓸다 지치어

봄바람도 손사래로
시들어 지나는데

맷돌 위
참새 한 마리
천년의 꿈을 꾸고 있네.
-<어느 한나절> 전문-

"어느 한나절"이라는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대단한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일상의 뒷골목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봄바랍도 사위어 가는 계절에 춘곤증에 못이긴 참새 한 마리가 맷돌 위에서 졸고 있는 그림을 상상해 보면 누구라도 그윽이 미소지을 수 있으리라. 어느 집 낡은 벽에 색 바랜 채 걸려있는 민화를 떠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 여 영자 시인은 그 참새 한 마리에 자신을 감정이입하고, 나아가 참새가 천년의 꿈을 꾸고 있다고 읊는다. 맷돌이니 절구니 하는 물건들은 철저하게 생활적인 도구들이다. 지금은 기계문명에 떠밀려 고풍스런 찻집이나 전통 한식집의 한 구석에서나 발견하게 되지만 이런 물건들에는 궁핍했던 시절의 흔적과 어머니들의 한이 서려있게 마련이다. 참새는 맷돌의 이미지와 연결될 수 있는 선험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콩쥐가 시간 내에 찧어야 했던 볏섬을 처리해 준 것이 참새가 아니던가. 맷돌 위에서 참새는 무슨 꿈을 꾸며 졸고 있었을까? 고단한 작업을 끝내고 오수에 빠진 참새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났거나 아라비아 궁전으로 여행을 했는지 모른다. 남루한 삶의 자락들 너머로 소박하지만 결코 끝나지 않는 꿈을 쫓으며 흘러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과정됨 없이 진솔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3.
우리의 삶이 생활고로부터 차츰 벗어나면서 우리가 꿈꾸는 호사 중에 하나가 여행인 것 같다. 생활의 현장에서 벗어나 타인들의 삶을 목격하고 인생의 이면을 마주하는 소중한 체험이 되는 것 또한 여행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인구밀도가 높고 휴가철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넉넉한 마음으로 여향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 요즘 들어 해외여행이 보편화되고는 있다지만 아직도 해외나들이가 그림의 떡인 채 영화의 한 장면을 꿈꾸거나 상상 속의 낙원을 동경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더러 시인들이 해외여행에서 느낀 감정을 시로, 시조로 표현하곤 하지만 체험을 공유하지 못한 독자가 기행시에 공감을 얻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공통의 화제가 있어야 대화가 통하고, 내가 끼어 있어야 여행 다녀온 사진에도 흥미를 느낄 수 있다. 특정 지역에 대한 기행시는 때로 작품으로부터 독자를 소외시킬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여 영자 시인의<상해의 새벽>은 여행지의 특수성을 드러내기보다는 항구의 새벽 공기가 우리의 피부에 와서 닿은 듯한 공감을 전해 준다. 간결한 단시조로 축축한 새벽공기, 안개와 뱃고동소리가 어울린 항구 특유의 분위기를 노래하고 있다.

기도로 이루어지는
하루의 출발은

낯선 땅 눈빛만큼은
다를 것 하나 없고

뱃고동
목이 쉬어간들
황포강은 말이 없다.
-<상해의 새벽>전문-

여 영자 시인의 시어들은 언젠가 어디선가 듣고 보았던 듯한 익숙한 느낌으로 우리 가슴에 파문을 만든다. 뱃고동이 떠나련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인간사의 시시콜콜한 만남과 이별이 얽히고 아우성쳐도 강은 말이 없다. 자연은 그렇게 묵묵히 인간들의 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세월을 가라앉혀 왔을 것이다. 낯선 땅, 낯선 사람들의 삶에 터전임에도 강은 바다에서 만나 모두 한통속으로 되듯이 웅크려 앉은 자태가 내남 없이 같에 마련이다. 상해의 새벽, 뱃고동 소리에 설레지 않는 황포강가에서 시인은 깊은 눈으로 벌써 바다를 향해 영원을 약속하는 황포강의 물살을 따라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맹사성의 고택(古宅)에서 느낀 감회를 표현한 작품도 우리에게 울림을 전달해 준다.

까마득 세월을 넘어 새 세상을 만나 본다.
디귿자형 맞배집 높은 문턱 넘어서니
굴곡의 위대한 숨결 맑은 물소리 뿐

바람의 눈도 아름다운 산길을 돌아서
환생의 마음으로 님의 자취를 살피는데
世德祠 흠모의 정이 추녀 끝에 매달리네

말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순리 앞에
올곧은 의미 없이 살아가지 말라는
雙杏木 육백 년의 소리 눈먼 새도 눈을 뜬다.
-<맹사성 古宅> 전문-

3연으로 구성된 이 시조의 종장들이 우선 눈에 띈다."위대한 숨결 맑은 물소리 뿐/ 흠모의 정이 추녀 끝에 매달리네/ 눈 먼 새도 눈을 뜬다." 각 연에서의 시상이 종장에서 정리되고, 종자에서의 감회를 연결하면 하나의 이야기기 드러난다. 맹사상의 고택(古宅)에서 시인의 감각적으로 포착한 것은 맑은 물소리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맑은 물소리에서 시인의 숨결을 감지한다. 고택(古宅)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시인은 새 세상을 만난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공간들은 모두 새로운 세상으로 비견될수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문을 닫고 나올 대 우리는 이미 들어 갈 때의 그 사람이 아니다. 특수한 공간의 공기를 숨쉬고 그 사물들에 눈을 틔웠으며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흡수된 정보들을 어떤 식으로든 머릿속에서 처리하는 과정을 겪은 것이다. 경험의 축적으로 인해 우리는 바로 전의 나 자신과 다르며 개별화된 하나의 시공간에 대하여 통과 의례를 거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인이 맹사성의 古宅에서 만난 위대한 숨결은 2연에 집약된 흠모의 정을 고조시키며, 그 기상에 취한 시인은 눈먼 새도 눈을 뜰 만한 추상같은 호령을 감지한다. 여 영자 시인의 두 편의 기행시는 사뭇 대조적이다. <상해의 새벽>에서는 황포강의 침묵에 천착하였으나. 맹사성의 고택에서는 오직 물소리에서 위인의 숨결과 호령을 감지해 낸다.


4.
여 영자 시인의 시조 작품에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중심이 된다. 인간의 자취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체취에 대한 그리움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앞에 인용한 시들뿐만 아니라 I.M.F.의 고통을 슬기롭게 헤쳐나가자고 설득하고 격려하는 <원점>, 대구 지하철 참사의 아픔을 노래한<비는 내리는데>. 우리 민족의 만남과 통일을 염원하는<금강산>등 인간사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작품으로 승화하려 애쓰고 있다. 시조가 제한된 형식을 갖추고 있는 시 장르라서 원대한 포부나 기원을 다담아내기에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절제된 시어 속에서 그 의미가 더 중폭되는 반작용을 기대할 수도 있다.

여 영자 시인은 비교적 늦게 시조와 만났고, 그런 만큼 시조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다를 것이다. 넉넉한 품으로 삶의 질곡들을 표현해 내는 과정 속에서 작품들이 그 깊이와 무게를 더해 가리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독자에 대한 배려를 당부하고 싶다. 그들은 시조에 관심이 있는 대한민국의 아무개들이다. 독자들의 공감과 간접체험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깊이와 무게에 못지 않게 명쾌한 전달의 측면도 고려되어야 한다. 시조는 어렵고딱딱한 시라는 인식이 젊은 세대에서는 일반적이다. 시조에 대한 열정이 강 건너에 있는 그들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돌다리든 구름다리든 연결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여영자 시인이 독자와 더 다까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시조문학 2003년 여름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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