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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6-04 10:54
 조회 : 2,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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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목소리 현현과 자기 성찰의 시조 ★
- 김 준의 시 세계 -
문 흥 술(서울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1.
나는 시조를 창작하는데 있어서 단순한 서정의 표상만을 드러내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성찰의 도구로서의 서정이요, 자기 수련의 목표 그 자체로서의 서정이라는 의미를 랒고 있기 때문에 자연 과작이라고 말하고 싶다.(『쓸쓸하지 않는 연습』)책머리에서)
시인 스스로 자신이 시조 창작을 두고 "자기 성찰의 도구"이자 "자기 수련의 목표 그 자체"라고 언급하고 있는 바, 이는 '시조'를 전범으로하여 일평생을 살아오면서 자기 성찰과 수련을 했다는 의미이다. 성찰이나 수련은 정신의 영역에 해당된다. 그것은 육체적 만족이나 물질적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며, 또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참다운 삶이고 가치 있는 삶인가라는 식의 정신적 측면과 관련이 있다. 시인 스스로 시조가 '자기성찰과 수련의 그 자체'라고 말할 때, 시조는 바로 시인의 삶 그 자체이자 전부인 것이다. 시인은 성직자나 구도자처럼 시조를 통해 자기 성찰과 수련을 하는 것이다. 그런 시조를 쓰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며, 그의 과작은 여기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1938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1960년 《자유문학》지에 시조 「이마음」으로 당선한 이후, 첫 시조집 『四十二章』(1966)에서 출발하여 『인정은 물일레』(1974). 『진실로 네 앞에서는 무엇을 미워하랴』(1991), 『쓸쓸하지 않는 연습』(1998)등 네 권의 시조집을 발간한 김준의 시 세계는 과연 자신의 언급대로 '자기 성찰과 수련 그 자체'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네 번째 시조집에 실린 다음 작품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내 무딘 세월들은
주어진 시간만큼
지루하기 그지없어
넉넉히 펴 놓고 보일
그런 때도 없었네.
그 넓고 넓은 세상
인생이 변두리에서
미리 챙겨 놓은
크고 작은 일들조차
언제나 지나치고 말았네.
주변머리 없었네.
무심히 잊고 사는 일이
때로는 덕이 될 듯도 하여
온갖 어려움도
지혜롭게 버티었네
오늘도 내 분수 안에서
존재하는 것일세.
(「자화상」전문,『쓸쓸하지 않는 연습』: 이하 시조집 순서대로 숫자와 페이지만
표시,4:pp,33-34)
회갑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시인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해 스스로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격동의 세월에서 시인은 '넉넉히 펴 놓고 보일' 큰 명예나 권세 없이'지루하기 그지' 없는 단순하면서도 평범한 삶을 살았고, '미리 챙겨 놓은 크고 작은 일들조차' 잊어버리면서 ' 인생의 변두리' 에서 '주변머리' 없이 살았다고 자신이 삶을 뒤돌아보고 있다.
그러면서 마지막 수에서, 그런 보잘 것 없는 삶이지만 언제나 '분수'를 지키면서 온갖 어려움도 지혜롭게 극복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분수'는 평범한 일상인으로서 지켜야 할 '분수'라는 의미보다는 시인으로서 '분수'를 의미한다. 곧 시인은 시인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분수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며, 시인으로서 시조를 통해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인 '자기 성찰과 수련 그 자체'라 명명한 시 세계가 무엇이기에, 시인으로서의 분수를 지키면서 세상살이의 온갖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잇는 것인가?
넉넉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금 눈앞에
빛나는 언어들은
참으로 온당한 말씀
은혜로운 결과입니다.
산과 들 어느 것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온 세상 선한 것들
단풍으로 윤기 나고
마추어 눈물겹도록
하늘 저리 푸릅니다.
(······)
(「가을 들녘에서」에서,4:p.23)
네 번째 시조집에 실린 작품으로, 김준의 시 세계의 특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수에서 시인은 가을의 끝자락을 수확을 마친 들녘에 서 '넉넉한 마음'으로 자연의 풍광들을 바라보면서 '빛나는 언어'를 보고, 그 언어를 통해 '참으로 온당한 말씀', '은혜로운 결과'를 읽고 있다. 두 번째 수에서 가을의 들녘과 푸른 하늘은 부끄럽지 않고 선한 것들로 윤기 난다고 읊조리고 있다. 언뜻 보면, 산과 들과 강 등의 구체적인 자연물을 대상으로 한 평범한 자연 예찬시로 읽힐 수도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해석의 차원을 거부한다. 그것은 '빛나는 언어'라는 구절 때문이다. 가을 들녘에 펼쳐진 자연의 제반 형상들을 두고 그 외적 풍경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대상으로부터 '빛나는 언어'를 감지하는 시인의 시적 능력은 예사롭지 않다. 대게 시는 시적 언어를 매개로 하여 어떤 대상에 시인의 정조를 투사한다. 이 때의 언어는 일상언어이면서 고유한 시적 언어로, 그 담당자는 시인 자신이다. 곧 시인 자신의 시적 정조에 따라 언어는 선택하고 배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준 시인은 가을의 자연물로부터 언어를 보고 있다. 이것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가 훨드린의 시를 분석하면서 언급한 "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다"(하이데거,『시와 철학』, 박영사)라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는 근대 자본주의를 두고〈존재의 집의 결핍 내지 황폐화〉로 명명하고 있다. 곧 근대 이전에 인간과 자연은〈존재의 집〉에서 합일되어 조화롭게 공존하였다. 그런데 근대가 시작되면서〈존재의 집〉은 황폐화되고 인간과 자연의 합일은 파괴되면서 〈존재가 사라져 버린 시대〉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사라져버린 존재의 목소리(언어)를 듣고(읽고) 그 목소리에 따라 모든 사람들을 그 본질에 있어서 명명한다. 달리 말하자면, 시인은 모든 사물들에서 존재의 목소리(언어)를 읽고 그 목소리(언어)로 노래함으로써 사라져버린〈존재의 집〉을 현현하고, 동시에 근대 자본주의에 의해 훼손된 일체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존재의 목소리(언어)를 통해 건설하고 명명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시인은 존재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를 통해 일체 사물의 숨겨진 본질직 의미를 현현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원환을 이루는 〈존재의 집〉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때의 언어는 〈궁핍한 지상의 언어〉가 아니라 지상에는 부재하는, 그러나 인간이 진정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되찾아야 할 〈존재의 언어〉인 것이다.
김준 시인이 가을 들녘에서 자연의 일체 사물로부터 '빛나는 언어'를 눈앞에서 보고 읽는다는 것은 바로 사라져버린 존재의 언어를 읽는다는 것이며, 동시에 훼손되기 이전의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을 읽고 명명한다는 의미이다. 수확이 끝난 텅 빈 가을 들녘을 보면서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되고, '은혜로운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언어이기에 가능하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적 측면에서 보면, 텅 빈 가을 들녘의 모든 사물은 쓸쓸하고 공허하며, 수확이 끝난 뒤에 버려진 하찮은 것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가시적인 현상의 측명을 떠나 모든 사물의 본질의 측면에서 본다면, 곧 존재의 언어에 따르면 각 사물은 텅 비어 있지만, 그 텅 빔 속에 또 다른 풍요를 내포하고 있다. 각 사물은 그 자체의 고유한 존재적 의의를 지닌' 온당한 말씀'이자 '은혜로운 결과'이면서, 그 모든 것이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지향하는 존재의 목소리를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러한 존재의 목소리에 따라 사물의 본질적인 것을 건설하는 것이다.
가시적인 현상 너머 사물의 본질에 대한 천착, 사라진 존재의 목소리의 명명과 현현으로서의 시조, 그런 시조가 시인의 '자기성찰과 수련 그 자체'가 되는 경지,이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현대에 있어서 시조의 의매에 대하나 탐색가 맞물려 있다.
시조의 현대적 의의에 대한 논의는 여러 측면에서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본연지성(本然至性)과 기질지성(氣質至性)의 측면에서 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연지성은 통일과 동일화와 보편화의 원리이며, 기질지성은 차별과 분별과 특수화의 원리이다. 이기(理氣)철학에서 본연지성은 이(理)며, 기질지성은 이(理)와 기(氣)를 함께 지칭한다. 가시적인 현상들의 제반 다양한 측면들이 기질지성에 해당된다면, 그 다양한 차별성을 통일하여 보편화하는 것이 본연지성이다. 본연지성은 세계와의 접촉 없이도 존재하는 자아로 주관과 객관, 감정과 이성이 구분되지 않는 미분화 상태이기에 대립과 갈들이 있을 수 없다. 시조는 본래 이 본연지성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차별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통일과 합일의 세계가 시조가 지향하는 궁극적 세계이며, 그 세계는 본연지성에 의해 가능하다. 그런데 근데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본연지서으로서의 합일은 하나의 이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세계는 이제 대립과 갈등이 난무하며 그것은 기질지성의 측면과 관련이 있다. 시조의 현대적 의의는 기질지성이 지배하고, 대립과 갈등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본연지성에 의해 통일과 동일성을 강렬히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인간과 자연이 대립된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조는 인간과 자연이 합일된 동일성의 세계를 본연지성에 의해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조의 현대적 의의를 이렇게 판단한다면, 김준 시인이 도달한 존재의 언어로서의 시조의 측명은 실상 시조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영역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와 이에 따른 물질적 측면의 풍요만을 구가하면서, 자연과의 합일과 순수한 정신적 가치를 상실한 현대 사회에 있어서 시조가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바로 상실된 <존재의 집>을 회복하는 것이다. 김준 시인은 상실된 <존재의 집>의 목소리를 현현하면서, 존재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황폐함을 극복하고, 그런 시조를'자아 성찰과 수련 그 자체'로 삼고 있는 것이다.
어둠이 숲을 타고
소르륵 내리는 밤
풀벌레 울음으로
달빛 저리 눈부시다
어룽진 창살을 비껴
깃을 펴는 이 낭음(朗吟).
호젓이 뜰에 서니
되려 허(虛)한 나의 의상
밟히는 시름자락
시원(始原)으로 고이 접고
이대로 한 마리 호접(蝴蝶)인양
적막 속을 날고 있다.
(「가을 어느 날 밤」전문,3:p.87)
가을 어느 날 밤 시인은 뜰을 거닐고 있다. 시인은 가시적인 현상의 자연물을 보고 있지만, 그 현상 뒤 본질에 내포된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럴 때, 어둠이 숲에 '내리고', '풀벌레 울음'이 '눈부신 달빛'으로 치환되고, '낭음'이 뜰에 '깃을 편다'. 이것은 단순한 의인화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지향하는 물아일체, 본연지성, 존재이 목소리의 현현의 경지에 해당된다. 그 경지에 도달할 때, 시인은 현실의 온갖 허물(의상)을 벗고 '한 마리 호접'이 되어 적막한 뜰을 거닐게 된다. 아니, 날게 된다. 인간과 나비가 일체가 되는 것은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꿈과 현실,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일체가 되어 공존하는 이 세계는 '무위자연'의 그것이자, '시원'에 해당된다. 만물의 원천으로서 '시원'은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는 동일성의 세계이자, 존재의 집이며,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아늑한 원초적 고향이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사라진,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공존하는 평화로운 세계로, 상품 물신주의가 만연하고 육체적 쾌락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세계이다. 김준 시인은 그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 세계의 목소리로 시조를 스고, 그 시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수련하는 것이다.
다음 두 편은 인간과 자연, 꿈과 현실,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이 합일된<존재의 집>의 목소리에 기초한 시조를 자기성찰 그 자체로 삼은 시인맘이 도달 할 수 있는 삶의 지혜이자 혜안일 것이다. 그것은 대립과 갈등, 물욕을 비롯한 온작 소유욕에서 벗어나 통일과 합일, 무욕을 깨우친 고귀한 정신에 다름 아니다. '말과 침묵', '말과 숨결'. '고독과 만족'의 대위법, 그리고 '빈 그릇과 풍요'의 대위법은 다른 시조 작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식적이고 수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연지성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지향하면서 그 세계의 목소리로 시조를 쓰고, 그 시조로 자신을 부단히 성찰하고 수련한 시인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건네는 말보다는
새겨두는 침묵이어라
무어라 말하지 않고
속 깊은 숨결이어라
오로지 차고 넘치는
고독이란 이 만족.
(「사랑을 위하여2」전무,4:p.45)
내 진정 말하지만
저 빈 그릇 다시 보게나
지척 무료할 땐
생각 말고 살펴 보게나
넉넉히 비어 있음은
진정 풍요 아닌가.
(「풍요로움」전문,4: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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