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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6-05 11:19
 조회 :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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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목소리 현현과 자기 성찰의 시조 ★
- 김 준의 시 세계 -
문 흥 술(서울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2.
김준 시조가 도달한, 존재의 목소리의 현현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는 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두고 가혹한 현실을 무시한 일종의 현실 초월적 내지 도피적인 것이라 비판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김준 시 세계의 전모를 탐색할 때 전혀 무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준 시조의 출발점에는 상실감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상실감의 원인을 "가난/시름/우울 속에//한신들 울기만 했다."(「네 이 못난 두꺼비야」,1:p. 43)는 시구에서 보듯 개인적 삶의 차원에 둘 수도 있고, 전쟁과 분단을 몸소 겪은 세대로서 절박하게 느끼게 되는, '철조망' (「네이 못쓸 사람아」,1:pp.55~57)으로 상징되는 사회 역사적 비극에 둘수도 있다. 아니, 그러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김준 시조의 기저에 상실감이 자리잡게 된 것이라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1938년 생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전쟁과 국토 분단이라는 불행한 시대의 비극적 일들을 직 ·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동시에 가난한 농촌 출생으로 척박한 삶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이러한 상실감이 그의 시적 원형질로 자리잡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쓰디쓴 입 언저리/쑤셔오는 뼈마디와//모래알같이/헝거롭기만 한 이 가슴//어디매 눈길을 주랴/안개 자욱 낀 이 앞인데."(「푸념」,1:p/31)라는 구절은 현실과 삶에서 겪게 되는 절망감과 아픔,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한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김준 시인뿐만 아니라 시인과 같은 세대의 시인드에게서 이러한 상실감과 절망감은 보편적 정서에 해당될 것이다. 김준 세대의 시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런 정서를 때로는 절망적 어조로 토로하거나, 아니면 시대적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거나 하는 식으로 시적 대응을 행한다. 그러나 김준 시인은 그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시세계를 구축한다.
1
北風이 몰아쳐도
의젓한 街路菩薩
출렁이는 그림잘
微笑로 인도하며
"煩惱도 다스리고 보라"
어머니의 默示여.
2
노래 사라진 벌판
별도 지친 하늘에서
몸부림 치다치다
외면한 歲月인데,
無量히 經을 외는 慈悲
우뚝 사는 街路菩薩.
(······)
(「街路燈」에서,1:pp.7~8)
'북풍'이나 '노래 사라진 벌판/별도 지친 밤하늘'은 열악한 현실상황을 의미한다. 시인은 그 상황에 절망감과 상실감을 느끼고 그것에 맞서 '몸부림 치다치다' 그 황량한 세월을 '외면'한다. 여기서 '외면'은 현실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속악한 현실의 세파에 휩쓸리기를 거부하고, 그 거친 급류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한 방법에 해당되는데, 그것이 '가로 보살'되기이다. '의젓한 가로등'은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구원의 빛으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보살'은 '무량히 경을 외면서' 속세의 온갖 번뇌를 다스리고 다스려 그것을 초월하고, 그 초월의 경지에서 일체중생을 '미소'로 대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존재이다 시인은 이러한 '가로 보살'처럼 가혹한 세상사에 절망하지 않고, 모진 세파를 꿋꿋이 헤치고 온갖 번뇌를 무언의 정신집중인 '묵시'를 통해 극복하려 한다.
시인은 이러한 자세를 "고된 외로움을/꿈으로 달래 가고//몸서리 치는 세월/쓸어 안는 地心"(「窓」,1:p.10)으로 표현하고 있다. 곧 시인은'보살', '번뇌', '경' 등으로 상징되는 불교의 선사상을 매개로 하여 현실의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버팀목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김준 시조에서 절망이나 좌절, 슬픔등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시인이 개인적, 사회적 측면에서 그런 정서를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정신적으로 굳건하게 극복할 수 있는 지주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오히려 꽃으로 피어
밤을 사르는 외로움
저려 오는 눈보라도
체온으로 다스리고
못 지운 그을음에 얽혀
주름 느는 認苦가.
2
평생 비바람에
향수야 뜨내기로
마른 한숨이
세월만 불러 가고
쌓여 온 悔恨에 젖어
바위로 굳은 가슴이여.
(······)
(「石燈」에서, 1:pp.19~20)
오랜 세월 석등은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면서도 꿋꿋이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켜오고 있다. 석등은 세월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불교의 선사상을 매개로 하여 올곧은 정신으로 굳건히 자신을 견디어 내는 시인의 모습 그 자체이다. 석등처럼, 시인은 어두운 밤과 같은 현실에서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이면서 한숨과 회한을 쌓아왔고, 그로 인해 숱한 상처(못 지운 그을음)를 입었지만, 그 모든 상처와 아픔을 인고로 참고 견디면서 기어이 꽃을 피우고 그럼으로써 차가운 석등에 따사로운 체온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현실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 "한 가닥 벅찬 의미로/웃어보는 그 훗날"(「석등」,1:p.21)을 꿈꾸면서 시인은 현실의 가혹한 상황을 극복하고 정신적 숭고함과 순수한 가치를 지향하면서 현실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김준의 후기시에 나타나는 사물의 가시적인 현상 너머 비가시적인 본질로 시적 인식을 심화시키는 한 단초를 읽을 수 있다. 비생명체이자 무기질인 '석등'과 '바위'를 두고, 가시적 현상에 머물지 않고 그 본질로 인식을 심화시켜, 그것을'꽃'이라는 생명체로 치환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부재하는 존재의 목소리의 현현은 하루아침에 이룩된 것도 아니며, 어떤 가식적인 포즈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그 출발에서부터 현상 너머 본질을 인식하려는 시적 치열성이 축적된 결과이며, 그러기에 이러한 시적 인식은 김준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다. 속악한 현실에 휩쓸리지 않고 정신의 순수한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시인의 자세는 의식의 내향화를 동반한다. 곧 시인은 현실로 시선을 회향화하기보다는 그 현실과 맞서 자신의 순수를 지키고 또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내부로 의식을 지향시킨다. 의식의 내향화는 공간의 좁힘을 동반한다. 그것이 세월 밖의 "한 잔 차(茶)잔에//허전한 나의 공간(空間)" (「나의 공간」,2:p.31)인데, 시인은 현실과 거리를 둔 자신만의 공간에서 삶에 대한 탐색을 통해 시인은 '가난하지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면서 하늘이 부럽지 않는 무욕의 삶'(「하늘이 부럽지 않다」,2:p.20)과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자비로운 삶'(「가로등 Ⅱ」,2:p.25)을 지향한다. 시인은 이를 위해 '천명'에 따른 삶을 살고자 한다.
짐짓 천명(天命)을 지켜
허둥이는 당신의 길
아픈 능선(稜線)을 따라
웃으며 가는 당신의 길
깊고 먼 일월(日月)을 찾아
배웅가는 당신의 길.
(「숙명」전문,2:.p.39)
초기에는 불교의 선사상을 매개로 하여 타락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버팀목을 마련하던 시인은 이제 불교라는 종교적 측면에서 벗어나 보다 보편적인 매개항으로 나아가는데, 그것이 '天命'으로 상징되는 세계이다. 시인은 하늘이 정해놓은 만물의 질서와 섭리에 따른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현실은 천명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인위적이고 인공적으로 재편함으로써 타락하고 훼손되어 있다. 그런 현실에서 천명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허둥'될 수밖에 없고, '아플'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험난한 삶의 여정을 '웃으며' 살아가면서 '깊고 먼 일월'로 상징되는 세계를 지향한다. 여기서 '일월'ㅇ느 후기시에 가서 자연으로 구체화된다. 다음 시조는 시인이 정신적 버팀목의 매개항으로 불교에서 출발하여 천명을 거쳐 자연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양계장 암탉은
한 마리 나비인양
청산(靑山)을 부르며
훨훨 춤을 춘다
새로운
둥지를 찾아
빙빙 도는
출발(出發)로.
(「양계장의 암탉」에서,2:pp.29~30)
'양계장 암탉'은 타락한 현실에 길들여지고 사육된 존재이다. 시인은 그런 삶을 거부하고 한 마리'나비'가 되어 청산을 훨훨 날아다니고자 한다. 곧 시인은'청산'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새로운 둥지로 설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삶의 섭리를 터득하여, '암탉'이 '나비'로 변하듯 스스로의 질적 변화를 꾀하고자 한다. 두 번째 시조집을 보면, 시인은 구체적 자연물, 예를 들어 '내장산', '다보탑', '추풍령', '해바라기', '석류'. '진달래' 등의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자연물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통해 험난한 세파를 헤쳐나갈 정신적 자양분을 습득하고 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시조집 이후, 점차 시인의 인식이 깊어지면서 시인은 자연일반으로 의식을 넓히고, 나아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상이 아니라 비가 시적인 본질로 의식을 심화시킨다.
차라리 거추장스런
남루를 벗어버리고
아예 아무 것도
외면한 이 산정에 서서
차분히, 홀가분한 마음으로
긴 겨울을 노래하리.
(······)
때때로 겨울나무는
알몸으로 춤을 춘다
고이 잠들 수 없는
영욕의 허울을 벗고,
더불어 겨울나무로 서서
산의 뜻을 헤아리리라.
(「겨울나무로 서서」에서,3:p.32~33)
시인은 속세의 온갖 거추장스러운 남루를 벗어버리고 모든 것을 외면한 채 홀가분한 마음으로 겨울 산정에서 서서 겨울나무를 바라보고 그 나무와 일체가 되고자 한다. 잠들지 못하게 하는 온갖 번뇌와 영욕의 허울을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춤을 추는 겨울나무와 일체가 되어 산의 섭리를 배우고자 한다.
어느 먼 두메산골
계절은 저홀로 두고
구름도 외면한 채
본시 정한 마음이더니
지금은
어느 길손의 손에 닿아
어안이 벙벙하겠구나.
난은 난이라서 귀하고
향기 또한 그윽하다
가꾸고 다듬은들
본 뜻이야 빛이 날까
그 신비
황홀하다 해도
사로잡지 못하네.
(「전시장의 난을 보고」전문,3:p.65)
전시장의 난은 본래의 난이 아니라 가꾸고 다듬어진 인공의 난이다. 시인은 그런 인공적인 난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거부한다. 두메산골에 정한 마음으로 있던 난 본래의 모습, 곧 인공적이고 가시적인 난이 아니라, 난 본래의 모습을 지향한다. 난은 난이라서 귀하고 향기 또한 그윽하지만, 인공의 난은 그 본래의 특질을 드러내지 못한다. 인공적이로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난이 잃어버린 난 본래의 신비롭고 황홀한 특질, 곧 타락한 현실의 훼손된 인간이 결코 사로잡을 수 없는 난의 본질과 일체가 되려 한다. 난의 본질은 인공화되고 상품화된 자연에서 결코 찾을 수 없다. 시인은 난의 그러한 본질과 일체가 됨으로써 난처럼 고고하고 숭고한 정신적 가치를 지니려 하고, 난처럼 기품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 시인에게서 난은 인공적으로 가꾸어지는 도학적, 현학적 취미의 대상이 아니다. 시인에게서 난은 삶과 인생의 예지를 깨우쳐주는 스승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난의 가시적 현상에 시선을 고착시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가시적 현상 너머 본질에까지 인식을 천착시킬 때 비로써 가능한 영역이기에, 이를 통해 시인의 정신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을 외면하고
무량(無量)만을 반추한다.
눈도 귀도 병이 될 듯 싶어
마음 꼭꼭 닫아두고
견고한 고독의 자세로
청산을 받들고 있다.
(「바위1」전문,3:p.68)
시인은 자연의 본질을 터득하기 위해 현실의 세월로부터 눈과 귀와 마음을 꼭꼭 닫고, 바위처럼 '견고한 고독'의 자세로 '청산'을 받들면서 청산의 섭리를 배우고자 한다. 유한한 인간 세계와 대비되는 '청산'의 무한함과 그지없음을 깨우치려는 시인의 가열찬 정신은 드디어 자연과 일체 되어 자연의 본질에 내포된 상실된 존재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를 현현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한치의 빗금도 없이
출렁이던 너의 꿈은
냉냉한 하늘 높이
계절을 응시하며
노련한 몸놀림으로
언어들을 잉태한다.
어둠 깔린 산길 따라
외로움을 뒤로 하고
언젠가 빛깔 짙을
그 날을 손짓하며
나목(裸木)은 생각이 깊다
우람한 짐승처럼.
아슴한 기억 속에
헤아리는 삶의 역정(歷程)
혹한의 그 형벌로도
끝내 정직한 의식은
진부한 관념을 털고
신명초행(神命初行)을 적고 있다.
(「나목」전문,3:pp.82~83)
시인은 앙상한 겨울나무를 본다. 현상적 차원에서 겨울나무는 무성했던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만을 을씨년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겨울나무의 그런 현상적 측면에 머물지 않고, 그 본질로 인식을 심화시킨다.
그럴 때, 겨울나무는 앙상하지만 그 본질에 고귀한 생명을 내포하고 있으면서, 존재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으로 질적 변용을 꾀한다. '노련한 몸놀림'으로 '잉태한 언어'는 나무에 내포된 존재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언젠가 빛깔을 짙을 그 날'을 기다리는 나무의 '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그 날'을 두고 겨울이 가고 여름이 와서 풍성한 나뭇잎을 드리우는 날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 접근에 불과하다. '그 날'은, 지금은 훼손된 현실에 의해 앙상해진 나무이지만, 훼손되기 이전 나무가 내포하고 있던 그 본래의 생명력을 되찾을 때, 곧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는 <존재의 집>을 되찾는 때를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은 마지막 수의 '진부한 관념'과 '신명초행'을 통해 뒷받침된다. '진부한 관념'은 훼손된 현실에 길들여진 의식이다. 시인은 이를 거부하고 겨울나무처럼 질적 변용을 통해 '신명초행', 즉 사라진 존재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현현하려는 첫걸음을 내딛고자 한다. '정직한 의식'은 현실에 훼손되지 않은 의식이자, 부재하는 존재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의식이며, 그 목소리를 통해 모든 사물의 현상 너머 본질에 내포된 본래적 모습을 되찾으려는 의식이다. 시인은 그런 정직한 의식으로 존재의 목소리를 현현하려 하기에 현실에 편안하게 안주할 수 없다. 정직한 의식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시인에게서 '혹한의 형벌'과도 같은 것이다. 시인은 그 형벌을 달게 감수하면서 기꺼이 자신을 바쳐 존재의 목소리를 현현하고자 한다. 그 현현의 결과물이 그의 시조고, 그 시조는 바로 시인이 한평생 행해 오고 있는 자기성찰과 수련 그 자체이다.
3.
김준 시인은 이제 오랫동안 봉직해왓던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 나이 65세, 아직도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고 후진 양성을 정력적으로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정든 학교를 떠나야 한다. 수십 년 간 정이 든 교정과 동료 교수들과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야한다는 생각에서일까, 시인은 노을 물드는 가을산에 올라 '저무는 연습'을 '애써'배우고 있다.
노을진 산굽이를
구름처럼 머문 가을
그 가을산을
서둘러 보면서도
더없이 텅 비어 있음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숲길을 걸어가면
쓸쓸한 나이만큼이나
마음은 서걱서걱
잎새에 바람 일고
조금씩 저무는 연습을
애써 배울 뿐이다.
(「가을산에 와서」전문,4:p.25)
시간이 흐르고 만물이 변화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진리이다. 꽉참이 있으면 텅 빔이 있고, 오름이 있으면 내림이 있고, 젊음이 있으면 늙음이 있는 법. 시인은 정년 퇴임을 앞두고 지나온 세월의 여정을 회고하면서'쓸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 천명을 지키고 신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올곧게 살아온 시인이기에 그 섭리에 순응하고자 한다. 시인은 가을산의 텅 빈 모습을 보면서, 삶도 그렇게 꽉 참에서 텅 빔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씩 '저무는 연습'을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지나간 모든 것은/참으로 아름답다//늘상 새로움은/그 속에 숨")「쓸쓸하지 않는 연숩1」)쉰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또한 "흘러 온 만큼/흘러가는 강물"(「강가에서」)도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시인은 정년 퇴임을 앞두고도 '쓸쓸하지 않는 연습'을 한다. 그렇다. 시인은 결코 쓸쓸하지 않다. 처음 '불교'에서 출발하여 '천명'을 거쳐 '자연'으로 나아가, 자연의 본질에 내포된 존재의 목소리를 해온 위대한 시인이기에, 아직도, 계속해서,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시인으로서의 분수를 지켜야 할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리에 새긴 채, '밝은 햇살' 아래에서 마음껏 자연과 함께 노니는 '바람'이 되어 자신이 앞으로 '흘러가야 할 강'을 설계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유로운 '바람'이 전해 올 아름답고 황홀한 존재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과 그 작품에 살아 숨쉬는 시인의 고귀한 삶과 자기성찰의 노래를 가슴 뭉클하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작품으로 김준 시인의 또 다른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면서, 시인의 앞길에 늘 '밝은 햇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또한 한 평생 시조와 함께 살아온 시인에게 시인을 존경하는 한 후학도로서 최대한의 깊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윽히 이는 생각
때로는 바람이고 싶네
머무는 자리마다
연연해 하지 않는
그래서 미련도 없이
지나치는 기억으로.
정이 깊고 보면
소중했던 마음들은
겨운 봄날의
초록의 눈을 달고
목숨과 견줄 수도 없는
그러한 한때였네.
어느 날 속달로 받은
한장의 전보처럼
비정이 앞서 가는
무심한 구름을 보았네
차라리 미움이 병이라던가
생각을 접어본다.
간절한 종종 걸음
이제 보아 주체롭네
더러는 밝은 햇살
보배인양 스치다가
이대로 아아, 그냥 이대로
바람이고 싶다네.
(「쓸쓸하지 않는 연습(2)」전문,4:pp.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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