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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5-12 10:13
 조회 :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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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밀레니엄 기획특집 ●
현대시조의 고민과 모색
李崇源(평론가 · 서울여대교수)
시조는 자유시보다 정제된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형식상을 지켜야 한다는 점 때문에 현대 사회의 다양한 체험을 표현하는데 제약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시조를 창작하는 사람들은 시조의 율격이 우리의 감정과 호흡에 잘 맞기 때문에 제약들 받는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율격이 우리의 감정 흐름에 잘 맞는다는 것과 표현상의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우리의 감정이나 감각은 어떤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하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에는 변화가 없겠지만 조선조 시대에 사랑을 나누는 감정과 현대인이 사랑을 나누는 감정인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문화적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인간의 사상과 감정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선조 때에 정착된 시조의 형식적 율격이 오늘날 현대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그대로 부합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이야기다. 시조가 조선조 때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인 양식이었듯이 오늘날 현대인의 사상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는 현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양식이 필요한 법이다. 만일 시조가 현대인의 생활 감정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인 장르라면 오늘날 시조가 이렇게 소외받을 이유가 없다.
시조를 창작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의 하나가 시조는 우리 민족이 남긴 유일한 정형시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넓혀서 생각하면 이것도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신라 시대에는 향가라는 서정양식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경기체가나 속요같은 서정양식이 있었다. 말하자면 각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서정양식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이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시조가 서정양식 발전의 종착점이고 향가와 속요은 시조를 낳기 위한 과도기적 양식이라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각 시대에 나타난 변종 장르는 그 나름의 특색과 개성이 있고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성이 있는 것이다.
시조만이 정제된 정형시이고 향가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이것은 시조가 조선조 말에 와서 사설시조로 해체되는 양상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모든 장르는 생성과 소멸의 역사적 과정을 밟는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시조를 창작하는 사람들은 시조가 현대실정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즉 시조가 조선조 말에 사설시조로 변화를 꾀했듯이 현대인의 생활 감정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설시조를 시도하기도 했고 시조의 고정된 음수율에서 벗어나 보려는 형식 실험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정형시의 형식적 제약에서 이탈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유시로 이행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시조는 시조로서의 장르적 특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이 정형적 형식성을 잃은 문학 양식에 굳이 시조라는 명칭을 붙일 필요가 없다. 그러한 실험적 시조시는 그냥 시라고 부르면 되고 일반 문학자의 시창작란에 다른 자유시와 똑 같은 위상에서 발표되고 평가받으면 그만이다. 굳이 시조라는 이름을 내건 문학지에 그런 작품을 발표할 필연성도 없고 그런 작품을 쓰는 사람이 시조시인이라고 자신의 소속을 한정할 이유도 없다. 그는 그야말로 자유롭게 시인으로서 작품을 쓰고 발표하고 활동하면 된다. 실험적 시조시를 쓰는 경우데도 그 작품의 내부에 시조의 형식적 제약성이 여전히 견이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전통 시조의 원천 속에서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현대 자유시를 쓰는 사람 중에도 민요시의 가락을 이어받은 시인이 있고 한시의 기풍을 따를 사람도 있고 서구식 감각을 따르는 사람이 있듯이 시조의 가락 속에서 자유롭게 자기 시를 쓰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현대시조』99년 가을호에 신작시조 12편을 발표한 전원범은 '시작노트'에서 시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뚜렷이 밝히고 있다. 그는 시조의 율격이 우리의 정서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우리 민족의 생리에서 빚어진 자연스러운 호흡이라고 주장하면서 현대시조가 변화하는 현실을 수용하고 형식적 융통성을 허용한다는 명목하에 시조의 율격적 특성을 무시한다면 시조문학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고 못박고 있다. 그래서 "시조의 율격을 파괴하는 시조, 산문적 묘사나 기술로 이뤄진 시조, 직서적 소재나열에 그친 시조" 등은 모두 시조의 정도에서 벗어난 위시조(僞時調)라고 부정한다. 시조가 시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존재의 해석적 표현에 의해 개성적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시정신이 확고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시조의 정통성을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러한 주장에 기반을 둔 시조 창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서정성의 핵심을 포착하고 그것을 형상화한다는 장점을 지닌다. 대상을 은밀하게 관조하면서 거기서 얻어지는 연상을 다른 이미지와 결합시키고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을 얻어내는 것이 그러한 시작법의 기본 구도이다. 전원범의 신작시조 12편은 거의 다 이러한 시정적 전개의 전형성을 보이고 있다.
물빛도 산빛도
다 내리는 가을날
三界의 綠을 풀어서
孤山을
만나러 가다가
前生에 갖고 놀던 꽃
금강초롱만
보았다.
흰 구름 몇 점이
부질없이 떠 있는
자리
못 견딜 만큼의
그리움으로
어디쯤 떠나갔는지
초롱꽃 울리는 소리만
귓가에 쌓이네.
「綠雨棠 가는 길 」전문
이 작품의 각 시행을 보면 참으로 섬세하고도 정교한 이미지가 아로새겨져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가을이 무르익어 산빛만이 아니라 물빛가지 변화하는 것을 포착하는 섬세한 안목이 있는가 하면 고산의 유적을 보러 갔다가 금강초롱을 보고 그것을 전새의 인연이 맺어진 존재로 인식하는 미묘한 상상력의 움직임이 있다. 고산의 실체를 만나지 못한 허전함이 허공에 떠 있는 흰구름으로 환치되고 그것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바뀌면서 현재 가슴에 밀려드는 안타가움을 초롱꽃 울리는 소리로 표현한 수법은 시정적 표현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어느 모로 보건 한편의 정제된 서정시로서 흠잡을 곳이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 외의 11편의 작품도 모두 그 나름의 품격을 지키면서 서정적 밀도와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 12편의 서정적 전개 양상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시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감꽃을 주으면」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감꽃으로 환치해 보았으며, 「그믐달」은 조각달을 어머니의 한으로, 「雪夜」는 눈을 간절한 절망과 부딪는 영혼으로, 「벌레 두 마리」는 내외의 존재를 두 마리의 벌레로,「강물 소리」는 강을 뒤척이는 그리움의 형상으로 비유하여 형상화한' 것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개개의 시편을 통독하고 나면 유사한 정서가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조가 갖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약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전원범의 작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시조문학』 99년 가을호에 실린 작품 중 노을을 소재로 한 두 편의 작품을 인용해 보겠다. 하나는 서정성의 높은 경지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송선영의 「노을 앞에서」이고 또 하나는 평시조 단수의 서정성을 끈기있게 추구하고 있는 김사균의 「落照」이다.
한겨울 해넘이 하늘 날(刃) 세워 휘젓다가
얼붙은 강 치달아 오는 또 하나의 홍건적이여
우우우 날파람 소리,
새기말의 배(腹)를 친다.
무성한 구호 저켠 허리 꺾인 흰 억새들
목울대 부여잡고 신음 소리 흘리다가
대물린 뿌리를 추스려
모은 손을 다시 든다.
「노을 앞에서」 전문
강마을
물버들숲에
갈퀴 세운 불가마귀
山이 타고
하늘이 타고
끝내는 내가 타는데
西天은
피울음을 토해
묵정 詩田을 썰고 있다.
「落照」 전문
이 두 편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든가 서정적 밀도에 차이가 있고 언어 구사 방법도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이 두 작품에는 일정한 유사성이 잠복되어 있다. 그것은 대상과 자아와의 관계에서 온다. 이 두 작품으느 시인이 바라보는 대상을 중심으로 서정적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앞의 작품은 붉은 노을을 날 세워 휘젓는 홍건적으로 비유하였고 뒤의 작품은 갈퀴 세운 불가마귀로 비유하였다. 둘 다 거세고 역동적인 심상으로 노을을 표현하였으며 그러한 강력하고 역동적 심상이 자아에게 연결되는 맥락을 제사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신음 소리 흘리다가 가까스로 추스려 손을 드는 억새의 몸짓으로 자아의 형상을 표현하였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시심을 오래 버려두어 거칠어진 묵정밭으로 보고 서천의 붉은 노을이 자신의 시심을 새롭게 갈아엎는다고 표현하였다.
말하자면 서산에 지는 노을의 장엄함을 노래하면서 다시 그 정경을 자아의 생활세계와 관련짓는 태도를 보인다는 접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러한 특성은 앞의 정원범 시조에서도 드러나던 것이다.
이러한 시조의 특징을 임의적으로 '대상의 서정성'이라고 이름붙여 보겠다. 대상의 서정성은 모든 서정시의 기본 성격인데 시조에 그러한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시조가 전통적이고 정형적인 서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자유시의 특징은 일상적 생의 단면을 그대로 제시하면서 거기서 시적 응축을 꾀하는 수법을 보인다. 그런 까닭에 서천의 노을이라든가 억새 언덕을 비추는 노을, 혹은 금강초롱 피어 있는 유적을 바라보지 않아도 일상적 삶의 맥락에서 얼마든지 시가 생산될 수 있다. 그리고 무질서한 나열처럼 보이는 일상적 소재의 노출이 서정적 윤기를 머금고 긴장을 자장을 형성하는 것을 본다. 이것을 편의상 '현실의 일상성'이라고 이름붙여 보겠다. 시조가 대상의 서정성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서 현실의 일상성을 수용하려는 시도를 펼치기도 했다. 그것은 시조를 현대화하여 현대인의 일상성을 표현해 보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것이다. 시조를 새롭게 써 보려는 신진들의 작품에 그런 경향이 많이 보이는데 『열린시조』99년 봄호에 신인으로 추천된 다음 두 사람의 작품이 그 전형적인 예에 해당한다.
알 수 없는 그것을 엑스라 하자.
또 다른 미지수 와이(y)와 반비례하거나
제트(z)의 몇 제곱으로 놓여 있는 세상.
사람들은 엑스를 찾아내고야 만다.
우주의 거리를 재고 복제 인간을 만든다.
건져낸 자연수 몇 개 물에 젖어 떨고 있다.
백제의 왕릉이 서울역 지하도에 뒹군다.
헐벗은 마네킹이 울며 울며 길을 가고
자꾸만 더 보여 달라고 조르는 사람들.
따스한 햇살과 바람, 달과 별, 시드는 꽃.
미지수 우리의 사랑 그것을 엑스라 하자.
이제는 엑스를 그만 엑스로 남겨 두자.
김동찬, 「그것을 엑스(x)라하자,」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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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생생하게 떠오르는 저 달이 몸과 마음을 낱낱이 들추는 것 같아 숨이 막혀요.
나와는 거리가 먼줄 알았던 절망들은 하나둘씩 스며와서 푸른 내 종아리를 회초리
로 거칠게 때렸지요. 언젠가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창문 하나 열기 위해 온 방을
흐느적거리던
그 때처럼 희망의 발끝이라도 보여달라고 아름다운 말로 몸부림쳐 봤지만 가도가
도 끝이 안보인단 말 이제야 알 것 같아요. 한줄기 빛이 있어 밤 더욱 깊어 간다는
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이 막막함은 어쩌나요······
뚜뚜뚜 수신되었습니다.
어둠 잠시 이동합니다.
최향숙, 「전화」 전문
이 두 작품에는 현대인으 일상적 삶이 수용되고 그것에 걸맞는 현대적 표현 기법이 활용되어 있다. 위에서 검토한 전통 서정성에 기반을 둔 작품들과는 많은 거리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앞의 작품은 x.y.z라는 방정식의 미지수를 기본 모티브로 하여 공허한 세계속에서 무의미한 삶을 반복하고 있는 인간 군상의 단면을 풍자적으로 표현하였다.
뒤의 작품은 전화로 호출기를 연결하여 메시지를 전송하는 현대인의 의사소통 방식을 끌어와 진정한 소통의 길이 단절된 현대인의 막막함을 표현하였다. 두 작품 다 현대적 감각이 살아 있고 현실의 일상성이 작품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발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엄격히 얘기하면 뒤에 인용한 「전화」는 시조라고 보기 어렵다. 아무리 사설시조의 현대적 변용이라고 합리화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시조가 아니다. 도대체 사설시조라는 양식이 조선조 후기에 과도기적 양식으로 잠시 나타났다가 자연 도태되어 버렸는데 이런 사라진 양식을 되살려 그것을 다시 변형시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사설시조의 재생이 시조에 현대성을 부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큰 착각은 없다. 그렇게 현대성을 중시한다면 굳이 시조라는 양식 명칭을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 것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것처럼 설득력 없는 주장은 없다. 지금 우리는 의식주 생활 속에서 우리 것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가? 전통 한복을 입는가, 한식 가옥에 사는가? 양복을 입고 아파트에 살면서 우리 것이니까 시조는 지켜야 하고 그래도 현대화는 해야 하니까 사설시조 형식으로 현대성을 수용한다는 논리는 완전한 비논리다.
현실의 일상성을 작품에 끌어들여 효과를 거두려면 시조 양식을 버리는 것이 낫다. 「그것을 엑스라 하자」같은 경우도 이와 같은 현실 비판이라든가 풍자의 감각을 제대로 실리려면 시조의 형식적 틀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좋다. 현실의 일상성과 시조의 형식성은 결합되기 어려운 관계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관계에 있다. 시조 형식으로 현실의 일상성을 드러낼 경우 다음과 같은 유머러스한 작품 수준에 머문다. 진지하고 엄숙한 시조 법도에 익숙한 사람은 이러한 시조를 경박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경시대회 출전한 아들놈이 들어서자
풀릴 듯 하면서도 괴롭힌 문제라고
기억을 반추하면서 내 앞에 내놓는데
두 자리와 세 자리의 자연수를 곱하려다
아차 하고 늘어 쓰니 원래 답의 아홉 배라
失手가 문제가 되면서도 너그럽지 않은 세상
내 생각이 모자랄 뿐 답없는 문제랴만
숨어서 풀어봐도 해답은 구구만리
천만 개 못이 박힌다 엉터리라면 땡인걸
안희두, 「수학 경시 대회 문제에서」 전문
이 작품은 『현대시조』99년 가을호에 실린 작품이다. 같은 시인의 작품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앞의 작품은 아들이 수학경시대회에 나가게 된 과정을 그린 것이고 뒤의 작품이 위에 인용된 것이다. 이 작품은 경시대회에 나갔다 온 아들이 풀다가 애를 먹은 문제라고 내놓은 문제를 시인 자신도 풀지 못해 애를 쓰는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의 단면을 시조로 표현한 것인데 시의 소재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 내용이 오히려 시적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은 바로 시조의 운율 때문이다. 자유시 형태로 이와 같은 내용을 썼다면 아주 싱거운 작품이 되어 버렸을 텐데 시조의 율격이 이 작품에 유머의 윤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작품은 재미있는 생활시조는 되겠지만 예술성을 거느린 본격시조하고 하기는 어렵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시조가 시조로서 독자적이면서도 올바른 자리를 지키려면 대상의 서정성에 충실한 작품을 쓰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현실의 일상성 쪽으로 나가게 되면 형식의 자유를 누리는 자유시의 풍자적 비판적 효과에 미치지 못하게 되고 시조의 형식만 부서지게 된다. 시조의 율격에 충실할 경우, 현실의 일상성을 수용하는 작품은 재미있는 생활시조의 단계에 머물게 된다. 따라서 문학예술로서의 고답한 경지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생활세계와 연관지어 전환 표현하는 작품을 쓸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서정성을 가장 신선한 표현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 현대시조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을 많은 작품들이 일관되게 보여줄 때 독자들은 단조롭고 동어반복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전통적 서정성을 전통적 형식으로 보여주는 시조가 단선적 답보성을 드러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것은 현대시조의 운명이다.
현대에도 계속 시조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변화와 갱신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세상에서 전통적 정서와 형식을 고수하는 것은 고지식한 답보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 가고 무상한 전변이 시대의 조류로 인식되는 세상에서 느긋하게 서정의 정수를 붙잡고 있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지 모른다. 현대시조를 쓰는 사람은 그 점에서 위안을 얻고 더 나아가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지킨다는 것은 보수족 태도를 수용하는 것이며 조선조 선비의 정신세계를 현대에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가치의 다양성이라든가 변화의 무한성을 긍정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현대시조 창작은 그러한 세계관의 선택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세계관에 기반을 두지 않은 현대시조 창작은 자유시의 위압적 도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따라서 현대시조를 쓰고자 하는 사람, 현대시조를 옹호하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재점검이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은 변화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쪽에 서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유시의 다채로운 세계를 분석하는 글을 써왔을 뿐 시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은 세계관의 선택에 의한 필연적 결과다. 필자의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 한 이러한 태도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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