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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5-12 13:41
 조회 :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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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평 ●
낙인(烙印)과 다시 태어남의 시
조주환(시조시인)
시인들은 참으로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고뇌와 고통을 감수하며, 새롭고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쏟는다.
빼어난 작품을 들고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등단한 신인이 계속 우수한 작품을 발표하여 남의 눈과 입에 오르내리는가 하면, 흔한 잡지에서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작품으로 등단해서 몇 년이고 서정적 예술의식이 떨어지는 작품들을 발표해온 시인은 그 이름을 들어도 등단 작품이 무엇인지, 어떤 작품이 있는지를 모르는 시인들도 많다. 이런 경우는 우선 선입견으로 좋은 작품을 못쓰는 시인이란 낙인이 찍혀 사람과 시간의 갈피에 묻혀 흘러가기 쉽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가혹한 채찍으로 다시 태어나는 아픔이 없이는 어지간해서 다시 살아나기 어렵다. 또 어떤 시인은 등단할때는 평범한 작품으로 선을 보였으나 연륜이 더할수록 끊임없이 스스로의 허물을 벗고 성장하여 번뜩이는 작품을 보이는 시인들도 잇다.
(시조문학)가을호에 실린 작품 가운데 먼저 김일연의 몇 작품을 본다. 이미 두 권의 시집을 낸 바 있는 김 시인은 몇 번의 껍질을 벗고 거듭 태어나 두 번째 시집인 <서역가는 길>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김시인의 <서역가는 길>은 그 이전에 발표한 작품들과는 완연히 다른 두려울 만큼 커다란 시적 진폭과 깊이를 더한 새로운 세계를 보인다. 곧, 김일연의 시는 때로 불덩이 같기도 하고, 구천(九泉)과 구천(九天) 사이를 오가는 전율로 와 닿기도 한다. 가슴을 움켜잡는 호소력, 사랑의 간절함과 절박함, 뼈에 닿는 아픔 등을 노래하며, 영혼의 정수리에 닿고, 가슴의 밑바닥에 있는 것들을 길어 올린다. 이는 시적 진폭이 크다는 뜻과 충격적이리 만큼 깊은 감동을 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봉지 천원
한 길 함지 안에
억만 길로도 닿지 못할
바닥의
虛無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
발가벗기운
저 侮辱
고치 속에 갇혀서 기다린 나날의
孤獨과
不安과
죽음 같은 침묵과
뜨겁게 敬拜하고픈
그 간절함들이여
-김일연, <번데기> 전문
<번데기>는 시적 화자의 내면세계를 간절하게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수 중장에서 한 점 번데기로 남기까지 억만 길로도 닿지 못할 바닥의 허무로 남아, 발가벗기운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시적 화자의 감정이 투사된 때문이다. 둘째 수에서 아직도 번대기 상태로 남은 시적 화자의 간절한 인고의 날들을 뜨겁게 경배하고픈 것은 살아 푸덕이는 한 마리 나비로 하늘을 날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곧 '번대기'를 통하여 시적 화자의 영혼이 소망하는 그 어느 곳에 가 닿을 듯한 고뇌의 간절함을 보게 한다.
네 목소리다
물 속의 별이다.
미치광이의 殉敎,
한여름밤의 꿈이다
靑春의 발바닥에 박힌
길 위의 유리 파편이다.
내 여태 가슴이 아픈
火印같은 흉터가
진창의 나날들을
살아온 힘이었느냐
이토록
숨쉰다는 것은
슬픔을 참는 일이었다.
-김일연 <눈> 전문
<눈>은 첫째 수에서 '목소리' , '별' , '순교' . '꿈' . '유리 파편'등으로 은유되어 다양한 이미지로 와 닿게 하는데, 이는 그만큼 시적화자의 사유의 진폭이 넓음을 뜻하기도 한다. 초장에서 반갑고 정겹던 '목소리'며, '별'이던 '눈'이 종장에서 격동적이며 부푼 '미치광이의 순교'와 '한여름밤으 꿈'을 지나 종장에서는 '청춘의 발바닥에 박힌 유리 파편'이 된다.
이는 맑고 투명한 꿈으로 와 닿던 '눈'이 시적 화자의 발바닥에 박히도록 아프게 와닿기 때문이다. 둘째 수에서 시적 화자의 가슴 아픈 흉터가 진창의 나날들을 살아온 힘이었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아픔의 흉터가 힘이 되는 아이러니 속에 이 시의 묘미가 있는 것같다. 살아 있다는 것은 슬픔은 참는 일이라고 한 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적 화자의 영혼의 한 끝이 깊은 슬픔의 수렁에 닿아 있음을 본다. 그런 이 작품의 강점은 역설의 묘미와 강렬한 이미지의 충돌로 독자의 가슴에 짙게 와 닿는데 있다.
이 시인은 <백지로 다시>의 첫째 수에서 한줌 햇살에 수많은 잔금의 균열이 있고, 야행성 곤충의 그물눈이 어룽거리는 것을 아는 시적 화자는 둘째 수에서 지금까지 일구어 온 그 모든 것을 단호히 털고 다시 시작하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렇듯 김일연의 시는 간절한 영혼과 정서의 깊은 밑바닥에 닿아 새롭게 거듭 태어나고 있다.
시골학교 운동장은
아무리 봐도 큰 저수지
철새들이 날아들어 나뭇잎이 모여들어
물위를 헤엄쳐 다녀 물 무늬가 일렁입니다.
절벅거리는 물소리에 힘살 세웠던 발을 씻으며
둘러선 프라타너스도 빈손을 털어 보입니다.
가슴 속 숱한 철새들, 이윽고 풀어놓습니다.
세월도 잎이 말려 바람에 굴러갑니다.
그 뒤를 따라 가면, 운동자엔 물살이 일고
떨구는 우리네 잎들
물오리 되어 첨벙입니다.
-손수성, <가을이 깊어지면>, 전문
손수성의 <가을이 깊어지면>은 먼저 '운동장'을 '저수지'에 비유한 은유의 착상과 상상력이 돋보인다. 이로 인해 이 시의 전개를 신선하게 하고, 풋풋한 서정으로 이끌게 하고 있다. 곧, 첫째 수에서는 늦가을 낙엽이 시골학교 운동장 위를 굴러 다니는 모습을 철새에 비유하고 활유로 처리하여 역동적이며, 사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물위를 헤엄쳐 다녀 물 무늬가 일렁인다.'라는 표현 등이 그렇다. 둘째 수에서 가을 바람으로 술렁이는 운동장의 모습을 물소리에 비유한 점이며, 초 · 중장에서 '힘살', '발', '빈 손'등에 비유하여 의인법으로 처리함으로써 생동감을 더하고 있고, 종장에서 풀라타너스 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가슴 속 숱한 철새들, 이윽고 풀어놓습니다.'하고 비유한 것도 가구(佳句)다. 셋째 수 초장에서 봄 · 여름 · 가을 동안 성장하고 물든 잎이 낙엽으로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세월도 잎이 말려 바람에 굴러갑니다.'라고 번뜩이게 형상화한 것이며, 중장에서 낙엽이 굴러가는 그 뒤를 따라가면, 운동장에 물살이 인다는 등의 표현은 상상의 여운을 풍기게 하여 서정의 맛을 한껏 더하게 한다. 종장에서 갖가지 인간의 일들을 '우리네 잎들'이라고 비유한 점도 그렇다. 아무튼 이 시는 참신한 비유와 형상화로 독작들에 새롭게 와닿게 하고 있다.
물에 빠진 하늘을
누가 저리 건져 올리나
동해로 나가는 길목 누가 저리 물꼬를 트나
석양이 목조 폐선처럼 기우뚱한 죽천리에서,
물위에 로비용 옷, 파업을 유도한 검사 얘기들
흘러오는 저 기름 띠를 누가 홀로 쓸고 있나
누가 또 물살을 지어 임금님 귀라도 늘어뜨리나,
어둠이 하나 둘 모여 모래톱마져 삼키는 밤
등불도 꺼버리고 어둠과 누운 주민들 저편
그윽이 별빛 머금고
누가 남아 반짝거리나.
-손수성,<竹川里 대숲>. 전문
이 시를 이해하는 열쇠는 본문에 나오는 '누가'를 이해하는데 있다. 찬찬히 읽어보면, 이는 '竹川里 대숲'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잇다. 곧 첫째 수에서 하늘을 건져 올리고, 물꼬를 트는 주체며, 둘째 수의 로비용 옷과 파업을 유도한 검사이야기, 그리고 기름 띠를 쓰는 주체도 그렇고, 셋째 수의 별빛을 머금고 반짝거리는 주체도 모두 '竹川里 대숲'이다.
그리고 이 시의 화자는 우리 사회의 충격적이고 어두운 사건들을 목격(체험)하며, 석양 무렵부터 어두운 시간까지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竹川里 바닷가 언덕에 나가 대숲을 보며 갖가지 상념과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물에 빠진 하늘을 대숲이 건져 올리는 이유는 둘째 수 초 · 중장의 나오는 오늘의 어두운 현실을 지우기 위함이다. 이는 둘째 수에서 이 시대의 어두운 현실들로 인해 하늘이 물에 빠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숲의 역할은 첫째, 둘째 수에서 하늘을 건져 올리고, 동해로 나가는 길목으 물꼬를 트며, 둘째 수에서 오늘의 어둠들(로비용 옷 이야기, 파업을 유도한 검사 이야기, 기름 띠를 쓸어내는 일)을 쓸고 삭히는 역할을 한다. 셋째 수에 이르러서는 현실의 어둠 속에 누운 주민들을 구제하는, 희망을 주는 일들까지 한다.
또한 이 작품은 할 말을 다 하면서도 형식을 의식하지 않고 읽어도 좋을 만한 개성적인 리듬과 자연스러운 구성으로, 새롭고 풋풋함을 함께 느끼게 하는 가작(街作)이다.
손수성은 위의 작품 외에도 <김 주임의 하늘>에서는 공해와 환경 호르몬 등에 오염된 현실을 고발하여 역설적으로 건강한 자연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순금 낚시바늘>에서도 낚시바늘과 같은 초승달이거나 하현달이 물밑을 환히 밝히는 이유는 초록물고기를 솟게 하려고 그렇다고 한다. 이렇게 손수성은 절박한 현실을 형상화하거나 있어야 할 현실의 일들을 소망하여 개성적인 리듬에 담아 시절가조를 빚고 있는 솜씨가 돋보인다.
휘파람 휘파람새가 휘파람을 불고 있다.
무수히 일어서는 파란 소리 선율처럼
청하늘 숨겨진 뜻이 시대말로 양각된다.
휘파람 후파람새가 속울음을 우는 날은
풀숲 깊은 곳에 하늘이 내려앉아
빈숲도 잿빛이 되어 슬픈 노래만 줍느니
-김연동,<휘파람새>. 전문
김연동의 <휘파람새>는 풋풋이 쉽게 읽히며, 첫째 수와 둘째 수가 내용상 대조를 이루고 있다.
첫째 수는 '휘파람'→'파란 소리'→'청하늘'로 연결되는 발고 희망찬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는 반면, 둘째 수는 '속울음'→'내려앉은 하늘'→'슬픈 노래'로 연결되는 어두운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욕지>의 종장 '빈집도 파도에 닳아 맑은 악기 되느니.'란 가구(佳句)에서 김 시인의 영혼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더 언급하고 싶었던 작품들을 간단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박구하의 <뿌리>는 밝음이나 그 어떤 목표를 위해 고행하는 구도자이거나 순교자적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古木>에서도 아프도록 시린 고목의 비장한 의지를 노래하고 있고, <퇴적암>에서는 시적 화자의 자화상이며, 자서전적인 세계에 대한 내적 성찰을 가슴에 와 닿게 형상화하고 있음을 본다. 박자방은 <첫진달래> 종장의 '온산에 점점이 찍힌/ 내 딸 아이 초경이구나'에서 보인 감각적인 형상화가 돋보인다. 윤정란으<지리산 진달래>는 '어둠의 뿌리 들추고/ 떠오르는 아침해'. '비로소 눈 뜨는 역사/ 하얀 뼈가 붉게 탄다.'등에서 조국이 어둠에 덮여 있던 계사년에 동족상잔으로 죽어간 혼령들이 밝은 시대를 맞아 재조명하고 있음을 적절히 형상화하고 있다.
정남채의 <남한강 설화>는 중원에 남은 고구려비를 찾으며, 마음속에 그리고 그려보는 명상과 사유의 세계를 현장감 있게 형상화해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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