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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4-23 09:09
 조회 :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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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기호에서 생명으로 ◆
- 단시조 · 신작 특집평 -
조윤아
1.
현대인은 언어를 통하여 사상이나 감정을 전달하며 살아가는 언어적 존재다. 그러나 원시 시대에는 언어 기호가 발달하기 전이었기에 사물(혹은 자연) 자체가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다. 현대는 화폐라는 기호를 사용하지만 화폐가 생겨나기 전에는 물물교환으로 상품을 교환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는 사물의 대용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는 기호화된 언어가 갖는 사물로부터의 거리감을 극복하고자 원시적 언어가 지녔던 현장성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시에서 비유는 바로 그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이 보고 느끼면서 감동한 것 혹은 사색의 결정체를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전달하는 수단은 단지 언어뿐이다. 언어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기호이기에 언어로 전달되는 것은 추상적이기 십상이다. 그리고 추상적인 언어는 깊은 이해와 감동을 이끌어내는 데에 실패하기 일쑤다. 이러한 추상적인 언어의 한계는 비유로써 극복할 수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혹은 대상)과 유사한 사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체적인 사물을 비유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원시적 사물어가 지닌 현장성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추상화로부터 벗어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이미지의 생성이다. 루이스는 시적 이미지란 언어로 만들어진 그림이라고 하였는데, 이미지가 반드시 시각적인 것만은 아니다. M.J. 머어리에 의하면 이미지는 시각적일 수도 있고, 청각적일 수도 있으며 혹은 심리적일 수도 있다. 웰렉과 워렌은 이 밖에도 미각적 이미지, 후각적 이미지, 근육감각적 이미지, 역동적 이미지, 공감각적 이미지 등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이미지를 크게 감각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2.
지난 가을호의 단시조 특집과 신작 특집에 실린 작품 중 이와 같은 비유와 이미지를 아주 적절하게 구상함으로써 감동을 준 예들이 있어 이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강호의 <구절초>이다.
한 티 점도 없이
속살을 드러낸 하늘
연어빛 바람이 앉아
들판 가득 산란을 한다
툭
툭
툭
터지는 정적
짜릿한
향내음
- 김강호 <구절초> 전문
위의 작품에서 '연어빛 바람'이라는 표현은 이 시조를 단순히 언어의 집합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물, 즉 생명체로 격상시킨다. 상상해 보면, 시적 화자는 맑은 하늘 아래 들판 한가운데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바람이 일으키는 소리를 듣거나 향기를 맡고 있다. '구절초'하는 이 시조의 제목으로 인해 우리는 두 가지 상황을 다시 상상해 볼 수 있다. 홍 · 백색의 들꽃이 만발한 가을 벌판에 서 있는 시적 화자는 바람을 맞으며 꽃잎이 떨어지거나 혹은 부딪치거나 하는 소리를 듣고 꽃향기를 맡고 있다. 또 다른 상황은 소리를 듣거나 향기를 맡는 주체를 들판에 피어나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구절초로 보는 것이다.
어쨌든 이때의 바람은 '연어빛 바람'이다. 그래서 바람이 한번 휘돌때마다 바람이 '들판 가득 산란'을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산란한 알들은 어딘가에 부디쳐 '툭/툭/툭' 소리를 낸다. 정적이 터진다. 반짝이는 은빛 비늘이 눈부시게 흔들리는 모습이 연상되는 '연어빛 바람'이란 '한 점 티도 없이/속살을 드러낸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빛의 찬란함을 떠오르게도 한다. 시각과 촉각, 청각, 후각들이 모두 동원되어 하나의 아름다운 공감각적 이미지를 생성해내고 있는 이 작품을 보면서 언어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단지 언어만을 가지고 자연을 재현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은 이미지와 비유를 함께 사용하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한층 더 높은 단계로 상승시킨 작품이 있어 주목해 본다.
피안을 오간 고열 짚고 간 손 있나 보다
피조차 맑은 새벽 생이 문득 환할 때
문 앞에
흰 우유 한 병
기도 같다
눈물 같다
-정수자<幻>전문
위의 작품을 읽어가다가 마지막 시구 '눈물 같다'를 읊을 즈음 독자의 눈에도 눈물이 흐를지 모른다. 시적 화자는 밤새 고열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아픔은 혼자서 감내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육체적 고통에 고독이 더해진다. 사투(死鬪). 이 외에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피안을 오간 고열'이라고 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보낸 후 창가에 희붐한 새벽햇살이 느껴지자, 그에게 '생이 문득 환'하게 다가온다. 시적 화자는 땀으로 흥건한 자리를 벗어나 창을 열고 맑은 새벽 공기를 맞는다. '피조차 맑'아진 것만 같다. 이어 시적 화자는 문을 열어 본다. 그때 발견한 흰 우유 한 병. 실존을 확연히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죽을 것만 같았던 고통이 완전히 물러가는 순간이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이 마음은 '기도 같다'는 구절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른 새벽 수고를 아끼지 않고 우유를 놓아주고 간 사람의 정성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혼자 싸워 이겨내야 했던 지난밤의 고독을 일순 눈 녹듯 사라지게 한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마음은 '눈물 같다'는 구절에 담겨 있다. '문 앞에 흰 우유 한 병'을 '기도 같다', '눈물 같다'고 비유할 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정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이 가볍지 않은 정서를 시인은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로 선명하게 그려놓았다. 동이 터오는 시간이어서 빛은 강하지 않고 문 앞에 놓인 흰 우유 한 병이 선명한 정물호가 떠오른다. 이때 독자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강한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앞서 살펴본 김강호의 <구절초>의 경우 일면 단순한 정서를 다채로운 감각적 이미지를 동원함으로써 생동감 있게 표출하였다면, 위의 작품 정수자의 <幻>은 복잡한 정서를 단순한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로써 선명하게 그려놓았다. 각기 방법은 다르지만 메시지에 아주 적절한 기법들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 모두 수작이다.
3.
다음은 비유의 방식 중에서 직유를 의인화와 함께 사용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한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당이 왁실덕실 들떠 웅성거리는 날
밤이 깊어서 어수룩히 불 밝히고
풍지도 못대는 방에서 산중시(山中詩)를 읽는다.
바람이 괄괄한 놈들을 몰아붙이는 소리
시(詩)도 밀어내고 주절주절 끼어들어
경칩(驚蟄)날 개구리처럼 쭈빗쭈빗 나선다.
마음이 긁히던 소리 다짐받아 눌러놓고
자리에 돌아와 조아리고 앉았으니
오히려 없는 소란(騷亂)을 귀가 따라 다닌다.
- 강세와<바람부는 날의 詩읽기>전문
재미있는 상상으로 이끄는 작품이다. 도심의 아파트가 아니라, 산중 허름한 방이 시적 화자가 앉아 있는 곳이다. 깊은 밤 불을 밝히고 시를 읽는데, 바람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뿐만 아니라 바람으로 사물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린다. 그 소리로 시읽기에 방해를 받다 시적 화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에 부딪쳐 소리나던 것들을 치우거나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눌러 놓고 돌아와 앉는다. 이제 시를 읽어도 좋으련만 그의 관심은 온통 방밖으로 쏠려 있다. 이 작품의 정수는 바람을 의인화한 둘째 수이다. '괄괄한 놈들을 몰아부치'거나, '주절주절 끼어들어' 시읽기를 방해하는, 즉 '시도 밀어내는'것이 바람이다. 바람은 짓궂은 성격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 바람은 '경칩날 개구리처럼 쭈빗쭈빗 나선다'. 의인화한 바람은 다시 개구리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청각적으로만 느껴지던 바람을 시각화함으로써 그 존재를 한층 더 실감나게 만든다. 이 둘째수는 바로 언어 기호를 추상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자연의 생생한 현존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이 밖에 주목할 만한 비유나 이미지가 등장하는 작품 중에서 몇 가지만 짚어 보자면, 민병찬의 <붓꽃>과 신필영의 <거미에게 4> 그리고 윤우영의 <산행시초 · 봄>과 윤정란의 <고물상에는>등을 들 수 있다.
붓꽃이 호접에 비유되고 있는가 하면, 거미줄은 맴도는 길에 비유되고 있다. 이 비유들은 곧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민병찬의<붓꽃>의 경우 자칫하면 정물화에 그치고 말았을 것을, 중장에서 붓꽃을 '대궁 끝에 퉁겨앉은/진보랏빛 호접'에 비유함으로써 정지된 화면이 아니라 움직이는 동영상이 되도록 한다. 그리고 마침내 종장 '지금막/날개 벌리고/포롱/날아 오르누나'라는 구절에 이르면 붓꽃의 생명력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다음 신필영의 <거미에게 4>의 경우는 초장에서 '그물'로 묘사되었던 거미줄이 종장에 이르러 '촘촘한/슬픔의 둘레/눈이 멀어 맴도는 길'에 비유됨으로써 한층 더 깊이 잇는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윤우영의<산행시초 · 봄>에서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는 메시지를 한 여승이 등장하는 한 폭의 그림으로 전달하려 한다. 계절이 바뀌는 것은 도심에서보다 산중에서 먼저 알아챈다. 그 산중에서 살아가는 한 여승의 등장은 쓸쓸하면서도 당당한 겨울과 조화를 이룬다. '잠든 산 들깨우는/ 독경 소리 귀에 담고//멧부리 탯줄 같은 가풀막길 올라서' 있는 '한 여승'의 모습이 아름답게 눈앞에 그려진다. 그리고 첫째수 종장'한 여승/싸리비 끝에/쓸려가는 겨울 본다'는 구절에 이르면 그 인물에 동화되어 '쓸려가는 겨울'을 함께 보게 된다. 다시 말해 겨울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에 '탯줄 같은 가풀막길'등의 비유가 쓰였다.
윤정란의 <고물상에는>의 경우는 비유 없이 이미지를 구사한 작품이다. 대신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 동원된 사물들에 '혼'을 부여하였다. '버림받은 혼들이 꿈틀대는 고물상'이라고 하였는데, '허물벗은 세탁기'. '둘러앚은 소주병' .' 동전 몇 닢 딸랑대는 변두리 겨울햇살' 등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고물상이 모습이 죽은 정경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경이 되게 한다.
4.
지금까지 생동감 있는 빼어난 이미지가 담겨 있는 작품, 이미지와 비유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메시지를 한층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작품, 비유의 여러 방식을 동원함으로써 언어의 추상성을 극복한 작품 등을 살펴보았다. 비유나 이미지와 상관없이 훌륭한 작품들도 많았으나, 그것은 논외로 하였다.
훌륭한 시인은 상징적인 것고 구체적인 것, 사상과 감정, 이성과 상상력을 조화롭게 운영할 줄 아는 시인이라는 말이 있다. 훌륭한 시인이 낳은 훌륭한 작품이란 바로 언어에 생명을 부여한 작품이라고 할 때, 그 조화로운 운영은 비유나 이미지를 빠뜨리고는 이룰 수 없다.
비유나 이미지는 언어가 단순히 기호에 그치고 마느냐, 생명으로 나아가느냐를 결정하는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다.
(문학박사, 서울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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